'환생'이라는 말은 기독교권내에서는 아주 어색하게 들릴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이 말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서 교리화할 노력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로를 통해서 이런 시각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4, 11).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예수의 고난은 이미 과거사이지만 지금 그를 따르는 사람의 고난 속에서 현재적 사건으로 환생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까닭은 그의 고난을 자기 몸에 현재화함으로써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 예수의 생명은 일반적인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사인데, 그 생명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바울로의 말은 몸에 환생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은 이런 이야기로 가독 차 있습니다. 4절이 위와 거의 같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라면 세례를 받는 것이 그 구체적인 관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을 따름입니다. 즉 세례받음으로 그의 죽음에 참여하고 나아가서는 그와 함께 묻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난 예수의 생명 가운데 우리도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의 죽음과 그가 말한 생명이 부활사건을 뜻한다면 이미 과거사이지만 세례를 받음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현재화 즉 환생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다음과 같은 좀더 구체적인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믿음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자기 삶 안에 환생시킴으로 그와 더불어 죽은 것만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이미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하고 그것을 더 강조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결연 한 신념을 토로합니다. 바울로는 거듭 "이미 나는 죽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런 의미의 말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울로가 말하는 그 자신의 삶을 '자기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환생'이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하는 데에는 별로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로는 '죽었다'(과거)라는 표현을 통하여 예수와 오늘의 자신의 생명(현재)의 연대성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를 엄격히 질적으로 구분하려는 과거의 서구의 신학적 수고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삶 안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로는 주저 없이 예수를 죽음을 이긴 삶의 첫 열매라고 하고, 그를 따르는 우리를 그 다음의 열매라고 했습니다(고전 15, 20~21). 이것은 부활문제를 논하는 데서 언급된 것인데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까 당연히 우리도 부활한다는 신념으로 꽉 차 있습니다. 또는 그는 그리스도가 상속자이듯, 우리도 똑같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선언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주장 속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처럼 우리도 그의 자녀라는 그리스도와의 동등의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로마 8, 17).
그런데 이러한 연대성, 바꾸어 말하면 환생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전제가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까지 반복됩니다.
다음에는 요한복음에서 이런 사고의 틀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요한 5, 24)고 선언합니다. 또 11장 25절에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음은 이제는 더 없다는 선언입니다.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구하다는 선언으로서 바울로와 꼭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쉽게 한 구절로 대치한다면 "나는 생명이요" 하는 것처럼 그가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요한복음은 의례적으로(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를 생명으로 표시한 데가 많습니다. '생명의 샘'(4, 14), '생명의 떡'(6, 35) '생명의 나무'(포도나무, 15, 1), 그리고 특히 죽은 라자로를 살려 일으키는 이야기(11, 28~44)와 더불어 그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임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생명의 환생의 길을 성령의 내림과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의 처참한 죽음에 국도로 실망한 제자들, 체념 속에서 마침내 에제키엘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에제37, 1~14) 같이된 제자들에게 생명인(산) 예수는 성령(πνεῦμα)을 불어넣음으로 그들에게 자신이하지 못한 과제를 인계해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한 20, 22). 성령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창세기 2장 22절에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불어넣은 것, 에제키엘이 환상으로 본 마론 시체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아 핏줄이 이어지고 살이 차오르고 가죽이 생긴 다음에 하느님이 "숨아!"라고 명령하자 그것이 불어들어 마른 뼈를 산 것으로, 즉 생명체로 바꾸는 것을 보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이 성령을 받은 제자들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영원히 살고 있나? 저들은 한결같이 그는 그의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로는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집단 속에 환생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도 거의 예의없이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부활의 환생을 말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보(정신)를 이은 사도행전에 비로소 이런 모습이 극적으로 표면화됩니다. 이미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를 처형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일, 그것도 유다 사람들이 운집한 오순절에 모여든 자체가 그들이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모임에서 결정적인 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의 날이기도 하며, 동시에 적대자의 상징 같은 예루살렘에 뿌리를 박는 계기이기도 하며, 이스라엘, 아니 예루살렘, 아니 성전에 감금되었던 하느님을 해방시켜 온 세계를 위한 하느님으로 환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난사에서 본 예수의 고난이나 그의 무능과 대조하면 더 큰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인데, 가시적으로는 패배 이 상의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것에 비해서 이른바 '오순절 성령사건'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리고 바로 이 오순절사건이야말로 환생한 예수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올라간 목적은 바로 죽음이라는 쓰디쓴 과정을 거쳐 민중 속에 환생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예루살렘을 예수 없이 저희끼리만 진격함으로 오순절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던 예수의 민중의 신념이 아니었겠는가? 그것을 단순하게 성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현실은 예수는 그 민중 속에 환생함으로써 그는 죽지 않고, 그의 목적을 실현시켜나가는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