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론이 이 책의 표제이자 초점이기에 그것에 집중해보겠다. '민중'이란 말이 특히 문학계에서 상당히 논의되고 있는데, 신학계에서도 비중은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민중발견에서 온 현상이다. 그런데 민중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민중의 유사개념으로 '국민', '인민', '백성', '대중', '공중' 등 많은 용어가 있다. 각기 다른 뉘앙스를 지녔으나 공통점은 집권층에 대한 비(非)집권층 내지는 집권층에 대해서 대립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민'과 같은 좋은 용어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경제적 계급성에 국한시킨 '프롤레타리아'라는 뜻으로 사용되어버렸고, '국민'은 예속성을 암시하므로 국가와 정부를 혼동하는 독재적 지배에 협오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대중'이라는 것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소갈머리없는 군중이라는 뜻에서 다분히 멸시되고 있다. 그럼 민중은 무엇인가?
한완상은 "지배 엘리트가 통치수단과 생산수단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여 국민 위에 군림할 때 그 국민은 '민중'이 된다"고 함으로 써, 민중이란 지배체제의 성격과 함수관계에 있는 상대적 개념임을 밝히면서 '국민'이어야 하는 계층이 '국민'이 될 수 없게 된 것을 '민중'이라고 보고 있다. 한완상은 '국민'이 위와 같은 상황에 놓일 때 "국민은 통치수단과 생산수단을 공유할 수 없다. 공유할 제도적 장치가 없거나 설령 겉으로 보기에 그러한 장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국민은 민중이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본래적 권리를 강권에 의해서 빼앗긴 계층이 민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를 경제권에서의 소외계급으로 국한한 데 대해서 민중은 그 폭을 경제권에 국한시키지 않고 공동의 삶의 영역 전반으로 넓혀서 본다.
정치적 통치수단과 경제적 생산수단과 사회ᆞ문화적 군림수단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민중이라고 한다(14면).
그러나 민중은 단순히 소외된 것만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은 "부당하게 억압받고 빼앗기고 냉대받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즉 민중은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사회적으로 대우와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41면). 여기에서는 민중으로부터 강권으로권력, 재력, 문화 등을 빼앗아 독점하는 집단이 전제되어 있다. 동시에 민중은 강탈당했다는 선행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민중은 그 의식면에서 둘로 나뉜다. 하나는 "그저 객관적으로 거기서 존재하며", "정치적 객체로, 경제적 수탈대상으로, 사회적 차별대상으로" 있으면서도 "체념 속에 매일매일을 문제의식 없이 안일하게 살고" 있으며, "그저 객체로 대상으로 자족하고"(15 면) 있는 이들, 말하자면 이 사회, 이 역사의 주인이면서도 그 자기 권리를 빼앗긴 상태마저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세뇌당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다른 하나는 바로 위의 민중과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바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주체적으로 의식하며, 자기의 "허약함"과 동시에 "자기의 잠재력과 저력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가 역사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대중이 아니며" 그러기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세력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허약하지만 그것을 개발하면 막강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저들은 "지배집단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유토피아의' 변혁의지를……키우고 있다." 한완상은 전자를 즉자적(卽自的) 민중, 후자를 대자적(對自的) 민중이라고 부른다.
이상의 정의에서 그는 경제구조에서 맨 아래에 속한 피착취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구별된, 광의(廣義)의 피지배계층을 민중이라고 본다.
마르크시즘에서는 지식계급을 프롤레타리아계급과 구별하여 '반동'이라는 도매금에 몰아버리는 것으로 안다. 이른바 혁명적 사고를 계급적으로 구분할 때, 지식계급을 제2계급에 포함시키고 농민과 노동자들을 제3계급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한완상은 민중 속에 지식인을 포함시킬 수 있는 길을 트고 있다. 그것은 그가 계층화를 외적 조건에 국한시켜 그런 외적 조건들이 계층화를 이루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보지 않고, 계층화에 대한 의식을 내면화해서 민중을 가려내는 척도를 찾음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지식인을 민중 안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재래의 이른바 '인텔리겐치아'라는 개념에서 반영된 상(像)을 분석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한완상은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지식인을 민중과 지식기사로 구별한다. 이들은 관찰과 분석의 능력을 갖고 있는 점에서는 같으나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지식기사는 단순한 관찰자이기 때문에 사실(fact)을 말할 뿐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민중으로서의 지식인은 분석에서는 관찰자이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진실을 판가름하는데 참여한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사실만 밝히는데 그치지 않고 진실(truth)의 증인이 된다.
둘째, 지식기사는 '마시적 관찰'에 열심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전체로 파악하는 눈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업적이 무엇에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무분별하다. 이에 반해서 지식인은 '거시적 조망'을 할 줄 안다. 여기서 '거시적 조망'이란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인간문제나 사회문제"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지식기사는 기존의 그대로의 표면을 객관화하고 관찰하는데 반해서, 지식인은 표출된 배후를 뚫고 들어가서 그 허위성을 폭로한다. 그러므로 "당연시되는 세계 속의 비당연성, '물론'(勿論)의 세계의 그 비물론성(非勿論性)을 드러낸다." 즉 그는 진실을 추구하여 허위를 고발하는 것이다(이상 17면 이하. 49면 이하 참조).
물론 지식인이 민중인데는 그런 것에 앞선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며, 지식인은 이러한 입장을 철저히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민중과 지식인이란 피박해자라는 같은 상황에서 공동분모를 갖고 있으며, 단지 이 둘간의 차이는 그런 사실을 의식하느냐, 의식하지 못하느냐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지식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단순한 대자적 민중이 아니라 의식화되지 못한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하는 대자적 민중"(19면)이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자신이 민중이면서 민중을 의식화시킨다는 뜻에서 민중의 전위가 된다."
이렇게 보면 민중 속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게 된다.
① 민중이면서 민중임을 깨닫지 못한 층
② 민중임을 깨닫고 자기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화한 층
③ 이른바 대자적(對自的) 민중을 의식화시키는 지식층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 저자가 ②와 ③의 구별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대자적 민중'이란 개념을 좀더 분석했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①의 민중성과 ③의 민중성을 좀더 심화해주었으면하는 바람이 있다. 대자적 민중은 그대로 있을 때는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대중과 같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그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저들은 ③, 즉 지식인의 '전위적' 노력에 의해서만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되는 것일까? 그들이 놓여 있는 생활조건이 채찍이 되어 그들이 스스로 의식화될 수는 없을까? 이런 질문은 물론 존재론적 관심을 담고 있다. 따라서 사회학자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