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수술하는 예리한 집도자 같다고 했다. 그것은 그와 마주선 대상이 병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젊음이 죄 되는 사회', '허위 의식'으로 충만한 사회, '수인화(囚人化)한 사회', '양극화', '국가와 사회가 미분화된' 현실, '준거집단'이 없는 사회가 저자가 서 있는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민중이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 되고, 주역이 아니라 구경꾼이 되고,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고 운용자가 아니라 대상이 된"(58면) 것이 근본적 원인이다.
이상과 같은 허위성을 파헤치는 것은 그 사회와 더불어 아파하는 행위요, 그 사회를 치료하기 위해서다. 그는 가정에서 학교, 청소년에서 여성의 현장, 텔레비전에서 정치ᆞ경제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잘못된 것은 폭로하고 옳은 방향 제시를 시도한다.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자유를 민주주의로, 외세배격을 민족주의로, 그리고 사회정의를 사회복지로"(121면), "오늘의 권력 엘리트는 중상층, 지식인에게 일차적으로 자유를, 서민 대중에게는 우선 평등을, 그리고 온 국민에게는 반드시 인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등의 간결한 그의 주장은 바로 병든 이 사회를 수술칼을 들고 집도하는 의사의 처방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장인 「분단상황의 지식인」이라는 글은 오늘의 이 나라를 사는 참 '지식인'의 진실(truth)의 증언이다. 강대국에 의한 분단의 비극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적으로 분단 이 양 체제의 확고한 존립에 이용된다는 기막힌 현실, 크게 그리고 계속 반복하는 슬로건의 허위성과 그 '역기능', 그러므로 동일은 사실상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는 저자는, 우리 현실에서 크게 과시되고 주장되는 것들을 분석하고 그 핵심적 병폐가 무엇인가를 아픔을 참고 지적하면서 새 방향을 제시한다.
통일의 거점은 민족주의이다. 그러나 그 형태는 민주주의여야 한다. 민족주의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경제건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정의가 무시된 경제성장은 "민족의 중심인 민중의 이익과 권익을 무시함으로써 바람직한 민중적 바탕을 약화시켜버린다. 민중의 권익을 외면한 민족주의란 아예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본 저자는 이런 식의 경제성장, 민중수탈은 결과적으로 민족애에 역행한다고 본다. 저자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서도 역시 민중이 핵심이 된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지배 받기를 원해야 한다. 그들이 지도자들을 자유롭게 뽑고 자유롭고 평화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적인 보장이 마련되어야만 비로소 자발적으로 지배받기를 원하게 된다.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가 확고하게 제도화되어야 한다…… 이때 민주주의의 주인인 민중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하면서, 민주적 민족주의라는 말 대신에 '민중적 민족주의'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민족주의니 통일이니 하는 슬로건 밑에서 주인이 되어야 하는 민중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며, 지배집단의 주장의 '역기능'을 갈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은 반드시 정의와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중의 권익이 최대로 보장되는 방식으로 민중에 의해 성실하게 추진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강력한 주장은 "통일을 하나의 허위의식으로 활용하는 권력의 생리"를 간파한 데서 오는 주장이며, 마침내 "민중 없는 민족과 민족주의, 민중이 무력화되는 통일은 모두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렇게 희구하는 통일마저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저항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제3의 체제를 모색, 제시하는 것이 민중으로서의 지식인의 다급한 과제임을 역설하고 있다.
■ 『창작과 비평』 1978년 봄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