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성대한 만찬회를 마련하고 초청장을 많이 보냈다. 만찬시간이 되자 초청받은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라고 주인의 초청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모두 소유 때문에 그 초청을 거부했다.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어서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맹인들과 절뚝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말했다. 종이 그대로하고 나서 주인더러 '주인이여, 분부하신 대로했는데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주인이 대답했다. '큰 길이나 울타리 밖에 나가서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 청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가 14, 16~24).
이 이야기의 청중은 두 편으로 갈린다.
한 편의 반응 : 이 이야기는 기득권자(초청받은 자)에게서 소외된 자에게로 참여권이 이동되는 혁명적인 이야기이다. 가졌기 때문에 폐쇄된 기존세계에 갇힌 자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자로 갈라놓고 전자를 심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시작은 있고 끝이 없다. 주인은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약탈당해서 집 밖, 성밖으로 추방되었던 사람들을 성안 만찬회의 참여권자로 초청한 것뿐 그리고……의 다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 참여한 이돌이 그 만찬회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저들에게 자율권이 주어졌다. 그 안에서 울든 웃든, 어떤 게임을 하든, 싸움을 하든 그것은 저들의 소관이다.
또 그것을 언제 끝낼지 아니면 그것을 계속시킬지도 저들의 뜻에 달린 것이다. 초청받는 자들은 술이 떨어졌거나 떡이 모자라면 더 가져오라고 호통을 칠 수도 있고, 그 집의 주인 또는 부인더러 나와서 노래를 부르거나 충을 추라고 요청할 수도 있고, 엎드려 절을 하라고 할 수도 있다. 초청했으면 그것에 응한 자의 뜻을 존중하여 그들의 기호에 따를 자세를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도리가 아닌가! 더욱이 큰 거리와 골목 또는 울타리 밖에 있던 사람들을 급작스레 불러들였으며 심지어는 억지로라도 오게 한 초청자가 아닌가! 그러니 만찬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또 그것이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까닭은 그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삶과 같다. 삶은 중단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배턴을 이어서 계속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만찬에 참여한 이들은 손님의 입장에서 이 만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 만찬회를 전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이야기는 끝이 없는 것이다. 즉 그 이야기의 배턴이 이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청중은 듣는 위치에서 이 이야기에 참여하게 된다. 즉 듣는 자가 단지 청중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다음을 엮어가는 주체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지나간 한 이야기(옛말)로 끝내지 않고 그 이야기가 계속되도록하는 것이다. 이로써 초청한 주인과 초청된 손, 즉 주객의 거리가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자(客)와하는 자(主)의 거리가 지양되어 서로가 이야기를 전개시켜가는 동역자가 된다. 이 현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민주적 질서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