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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신앙양태를 청산하지 못 한채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하고 있고, 그것은 민족 살림의 모든 국면에서 신식민지적 종속화를 야기시키고 있다.

예언자적인 역사가인 슈펭글러는 근대화의 여러 국면에서 서구 몰락의 조짐들을 보았다. 즉 전통의 붕괴와 실용주의의 대두, 민족국가의 소멸과 국제적 국가의 성립(종속관계), 그리고 사실적 가치에서 허영적 가치로, 모성에서 여성으로, 정신적 내향화에서 정치적 외향화(군국주의, 군사주의)로, 질과 통일에서 과대망상적 혼합주의(권력욕)로의 전환이 그 몰락의 조짐들이다. 소로킨도 서구의 감각문화가 정신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공리주의, 실용주의, 관능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근대화의 맥락에서 보면 전통, 조국, 민족자결 등은 이미 무의미해지고 설 자리가 없다. 땅을 위시한 민족자본과 자립경제는 근대화에 의해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조국 근대화'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속되지 않은 자주적 독립국가, 민족자결의 민족주의란 근대화와 모순관계 및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양자는 병존할 수도 없고 서로 유대를 맺을 수도 없다.

그레이(Gray)는 1960년대 히피족이 미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역사과정을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분하였다.

첫번째, 삶의 목적이 오직 먹는 것에 있는 생존적 원시사회단계.

두 번째, 개인의 지위가 향상되고 민족적 정체를 추구하며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해결해가는 주체적 자아형성의 단계.

세 번째, 정치권력, 경제, 사회가 구조화되어 일정한 완충기재를 형성해놓고그속에서 잔인하게 먹이를 위해 싸우는 시대.

즉 파시즘과 제국주의와 전쟁이 합리화되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며, 무기상인이 영화를 누리는 생존 위주의 문명사회단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폭력적 대결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레이가 말한 세 번째 단계, 곧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개발도상국들을 체제적으로 수탈하는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체성을 추구하고, 민족자립을 달성하며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자는 것이 민족주의요,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지상과제이다. 이것은 결코 복고주의가 아니다. 제3세계가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과제를 설정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제양녀는 부자들이 먹다 버린 제3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쓰레기통이 될 것이요, 쓰레기통을 뒤지는 나자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가 GNP 싸움과 경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참으로 위대하다.

또한 우리는 분단의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독일의 분단은 인과응 보이지만 우리의 분단은 국제권력관계의 음모의 산물이다. 따라서 분단은 이 민족의 한으로 남아있다. 언어, 풍습, 이데올로기 등모든 국면에서 민족이 이질화되어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바로 이 분단 상황이 근대화에서 야기되는 모순을 더욱더 심화시키고 있는 암담한 현실이다. 근대화가 발전하여 민주주의, 민족주체성, 생산의 공정한 분배를 자동적으로 초래할 것이라는 희망은 이미 망상임을 드러내고 있고 억압과 착취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근대화는 이미 도전을 받고 있다.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체제로의 종속의 심화요, 매판세력의 억압과 전횡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을 민중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이러한 극한상황을 극복해나갈 주체는 누구인가? 지금 표면에 나타난 세력은 없다. 그래도 있다면 주인의식을 갖고 저항하고 있는 학생들 정도이다. 이것이 비극이다. 이러한 극한상황을 본질 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 상황에 의해 가장 극단적으로 억압과 수탈을 당하고 있는 민중이다. 오늘 이 땅에는 주인이 없다. 누가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남한'을 지키겠는가? 있다면 지금의 민족반역자들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사생결단을 할 것이다. 그들이 이 체제에 기생하여 이득을 얻고 있는 만큼이나! 그리고 또 하나의 세력은 넓게는 종교인, 특히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긍정적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오늘의 비극을 증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분단상황은 민족적 비극이요 부정되어야 할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모순의 현실을 민족의 정체를 형성하는 철호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분단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이 시대 최고, 최상의 이념과 세계관에 도달할 수 있는가능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드높은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이 제3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같지 않은 우리의 특수상황이다). 또한 분단상황이기 때문에 분단극복을 지상명령으로 아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남한체제에 항거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다. 왜? 이대로는 통일의 가능성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통일을 지상 명령으로 한다는 것은 현체제와 상황에 대한 저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이러한 분단상황을, 모순이 극대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민중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민중의 역량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그것은 민중이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하늘이 두 쪽나도 우리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앞세울 때 비로소 자신들의 역량이 강화될 것이며, 이것을 통해 불의한 정권과 그 배후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는 해방의 길, 통일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해방과 통일의 주체가 민중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향하고 희구하는 사회도 지식인이 유토피아적인 상을 만들어 제시하고 끌고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위험을 불러일으킨다. 민중이 자신의 역량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을 닦으며 지원 해야 한다. 대안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안을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청사진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강제성과 경직성을 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먼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모든 지배자가 물러나고 체제가 변혁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새것이 온다. 그 다음은 민중이 알아서하는 것이다. 민중의 대안이면 좋다. 일단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어떤 대안을 전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체제도 맞지 않고, 공산주의체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3의 체제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와 권력이 평등하게 최대한으로 잘 분배되는 사회체제일 것이다. 지금은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없다.

이상과 같은 과제 앞에서 한국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관심해야 할 사항은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물(物, Materie)과 계급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사고에서는(특히 지식인계층) 물질을 멸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노동의 산물을 탐하거나, 바로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면서도 노동을 천시했다. 오늘 우리는 그 물질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부터 농민은 쌀 한 톨을 아꼈다. 그것은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들의 피땅의 결실이라는 의식 때문이었고, 물에 대한 경외와 존중 때문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풍요한 사회에서는 물질이 포화상태에 달하여 물이 천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굶주려 죽어가는 수억의 인구가 있다. 1950년대 독일에서 경험한 것은 철저한 검소와 절약이었다. 남아도는 찌꺼기가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독일에서는 그야말로 천연과일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 이삭을 줍는 시간에 다른 노동을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거기서는 시간이 돈이었다. 이렇게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물을 멸시하고, 그러면서도 탐욕스럽게 물을 팔아 돈을 버는 유물주의, 실체는 무시되고 명목상의 허영적인 돈이 모든 가치를 좌우하는 사회,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대지에서 멀어질수록, 뿌리 뽑힐수록 노동과 생산물에 대한 간접적 관계를 갖게 되고, 소비와 향락만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원론적으로 '물질'과 '영혼'을 나누어 물질을 멸시한다. 가장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있으면서도 그 물질을 천시한다. 그러나 '대지 '와 '자연'이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그것을 공동의 노동을 통해 가꾸고, 그 생산물을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요, 목적이다.

물을 존중한다는 것은 물질주의가 아니다. 가장 탐욕스럽게 물질을 추구하며 물질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물질을 혐오하는 체하는 것, 남에게 물질을 경시하도록 하면서 물질을 독점하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물질주의이다. 그러므로 물을 존중한다는 것은 가장 정신적인 말이며, 곧 노동을 신성시하고 노동을 통한 인간의 연대 추구를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물질은 인류가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데 쓰여야 한다. 유물론이란 물질의 독점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유심론(관념론)에 대한 상대개념이요 대안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공유와 정의로운 분배가 물질주의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공유와 정의로운 분배를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알아야 한다. 이 사랑의 행동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은 한국 역사 속에서 그 정체를 형성할 수 없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말대로 "하느님이 태초에 물질을 창조했다." 이 물질은 인간이 함께 누리며 사랑하고 친교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독점에 대한 투쟁, 분배의 정의를 위한 싸움은 물질을 창조한 하느님과 노동의 주인인 기층생산자, 곧 민중에 대한 사랑의 행동이다.

둘째, 지금까지 금기가 되어 온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주장을 누가 하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미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욕구와 관심도 다르다. 이 분명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다고 해서, 그리고 우리가 마르크스와는 반대편에 속한다고 해서 그 계급의 현실이 무시될 수는 없다. 이 계급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현실문제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은 못 가진 자, 과부, 고아, 노예, 거류민 등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작은 자와 큰 자의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계급 현실에 대해서 애매해서는 안 된다.

성서의 죄는 집단과 구조에 관련된 개념이며, 그러므로 사회구조에 내재하는 계급차별이 가장 큰 죄이다. 성서에서 죄는 가난한 자, 눌린 자, 빼앗긴 자, 추방당한 자의 현실과 직결되어 있다. 이 현실을 인식하고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실천이 허공을 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정책도 공허하지 않게 될 것이다. 계급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대결을 위해서 라기보다는 이에 대한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 그리고 민족과 역사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마르크스주의만이 계급 현실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올바르게 제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분석과 처방이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믿음 안에서 모든 계급의 현실성이 저절로 소멸되는가? 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신도 사이에 계급 현실은 과연 없는 것인가? 교회 안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에 대한 야고보서(2, 1~6)의 비판은 오늘 한국 교회 안에서는 과연 아무런 타당성이 없는가?

나는 물질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혁명적 모델을 주기도문에서 본다. 주기도문은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순서이고 전략이다. 이 기도의 주체는 민중이며, 그것은 가난한 자들의 기도이다.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것이 대전제요 목표이다. 그 다음에 구하는 것이 물질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리고 죄가 용서되고 인간관계가 회복 되기를 간구한다. 이런 주의 기도를 드리는 민중이 실제로 역사와 민족정신을 이끌어왔다. 민중은 전통적으로는 농민이었고, 근대사회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이다. 이들이 생산주체요, 기층생산자이다.

주의 기도의 내용이 이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기도를 일상적으로 암송하는 한국 그리스도교는 물을 멸시하면서 농민과 노동자의 노동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 발전의 터전이요 생산주체인 민중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이 주의 기도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계급의 현실을 인식하라는 말은 바로 그들이 물질(일용할 양식, 생필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사람인데도 계급적 현실로 인해 소외되고 억눌려 있음을 인식하고, 그들에 대해 당신들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있는 역군 임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인식하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역사 개입의 양식과 예수의 실천방식은 당파적인가? 결과적으로는 당파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당파적'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단 굶주린 자, 억눌린 자, 갇힌 자, 소외된 자, 약한 자의 편에 서게 되어 있는데, 그 결과가 '당파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당파 적'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나, 예수의 행동양식을 애초부터 그렇게 규정하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단지 예수의 실천이 전략적, 방법론적이었다기보다는 그의 사랑이 너무나 순수하고 철저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하였다고 하겠다. 우리는 민중의 편에 서서 예수의 행동양식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예수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이요, 민중신학도 그것을 증언하는 신학 이외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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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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