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민중신학은 어떤 주의(Ism)를 가진 것도 아니요, 어떤 주의도 아니다. 민중도 민중중심으로 세계를 바꾸어보려는 구체적인 설계도를 가지게 되면 그때는 민중주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민중과 관련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민중문학의 발전은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민중문학을 어떻게 규정하든, 참으로 민중의 시대가 도래하여 민중이 자기 자신의 문학을 주체적으로 전개한다면, 이른바 오늘의 민중문학과 같은 그러한 문학을 하겠는가? 민중신학도 마찬가지이다. 민중은 오늘의 민중신학과 같은 신학작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까지는 민중신학이 존재할 것이고 필요할 것이다. 민중문학이 민중의 소리와 감정을 지식인의 언어로 바꾸어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지식인)에게 전달해주듯이 민중신학도 민중의 사실을 신학적 언어로 바꾸어 전달하는 것이다. 곧 번역작업인 것이다. 즉 지식인에게 민중의 말과 희망과 의지를 전달해주는 통로, 그것이 민중상황이다.
분단상황 속에서 가장 뼈아픈 문제들은 무엇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진실로 민중의 소리가 압살되고 있는 이 마당에 민중의 요구와 희망은 무엇인가? 분단상황 속에서 일고 있는 고통의 소리는 무엇인가? 민중신학은 바로 이러한 민중의 물음을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은폐되어 있는 민중사실을 지식 인의 언어로 바꾸어 그것을 증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영역에서 일어나는 예수사건에 대한 증언이다. 즉 "민중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 하느님이 활동하고 있다. 아니! 그리스도는 이렇게 현존하고 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또한 민중신학은 당신(민중)이 우리 역사의 실질적인 주인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든 안 부르든 간에 당산이 이 민족사의 과제를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바로 그 민중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노동하고 고난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음을 증언해주는 것, 아니 오늘도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부활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 민중신학이 할 일이다.
함석헌은 분단시대의 민중(씨알)의 고난을 단순한 비극으로 보지 않고 세계의 죄악과 고난이 압축된 현장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이것도 모든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식을 넘어서는 신학적 통찰이다. 오늘 날 한국 교회가 반공주의와 물질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는 행태는 자본주의사회체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교회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숫자나 참재력에 비해 오히려 바람직 한 민족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반동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교회가 분단구조와 독재체제, 자본주의체제에 유착하여 오히려 그러한 부패한 체제 유지에 공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한국 교회는(물론 대부분의 가난한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쓰고 남은 돈을 부동산과 은행에 투자하고 있다. 이렇게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 자본을 축적하고 자본에 의해 이익을 남기는 관행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회가 사유재산을 소유해도 좋은가? 오늘날 타인의 노동 위에서 있는 유한적 종교사제계층의 존재는 정당한 것인가? 그 정당성 여부는 도대체 질문조차도 할 수 없는 절대금기 사항인가? 노동하지 않고 민중의 아픔과 고뇌, 절망과 희망을 체험하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우리는 제도적으로 비대해지는 기성교회의 변혁에 대해 희망을 걷기보다는 작은 교회운동(바닥공동체운동)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새 기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민중 속에서 노동하고 기도하며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예배드리는 민중교회 공동체에서 한국 교회의 희망과 바람직한 한국적 그리스도인 상의 씨앗을 본다. 새로운 교회의 언어와 문화가 그들을 통해 창출될 것이다. 이제 민중신학은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민중현장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민중사실을 수령하는 작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존교회가 해야 할 일은 질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기를 축소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는 돌 위에 돌 하나조차 포개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경고한 예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제도적 교회의 존립이 문제가 아니다. 예수사건이 지금 민중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또 그 사건을 몸소 체현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 확립이라는 우리의 과제를 푸는 열쇠는 바로 그러한 공동체적 삶 속에 간직되어 있다.
■ 『신학사상』 제52집(1986년)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