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일제의 꼭두각시인 만주국이 창설되었을 때, 일본인들이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통치하던 것이 잊혀지질 않아요. 그 당시 만주에는 일본인, 조선인, 몽고족, 러시아인, 만주족 등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가장 우수하고, 조선인들이 그 다음 이고,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만주족은 가장 열등하다는 식으로 민족서열을 만들었지요. 일본인들은 음식의 차이, 품성의 차이를 들먹이면서 그런 짓을 했는데, 그렇게 한 까닭은 폭력적으로 침략하는 제국주의 아래서도 '민족'이라는 것은 함부로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통치하려고 한 데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사소한 문제에서도 민족감정이 맞부딪치면 격렬한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민족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의식했었지요.
그 다음으로는, 독립투쟁에 대한 경험을 들 수 있어요. 그 당시 민족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합작하여 일제에 대항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무시로 우리 집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단 말이지요. 저의 어머니는 무식한 분이셨는데, 저희 집을 찾아온 게릴라들에게 의복이나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어요. 제가 자는 사이에 가만 가만히 하신 일이라 처음에는 저 역시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요. 이렇게 무식한 어머니마저 민족해방을 염두에 두었나하는 것이 퍽 신기했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더해요. 그 당시에는 신화적인 존재들이 많았어요. 김일성을 위시하여 민족해방을 위해 통일전선에 선 장군들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떠돌아다니고, 어린 우리들은 뜻도 모르 면서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 하는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이런 경험들이 민족은 뿌리 깊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지요.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인 교장에 대항하여 데모를 벌이다가 퇴학당한 경험도 잊을 수 없어요. 그리고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없는 데서 살았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이 다시 싹렀어요. 그 당시의 교회는 민족의식이 상당히 강했어요.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크리스마스 때는 크리스마스와 직접 관계가 없는 모세 이야기나 에스더 이야기를 했고, 새벽기도회에서는 "주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가 이때입니까" 하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한국이 독립할 때가 이때입니까" 하고 절규하곤 했었어요. 그 당시의 교인들은 그런 의식이 상당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잃어버렸던 민족의식을 교회에서 되찾았단 말이지요. 그후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부터는 민족의식을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압박을 당하곤 했으니까요. 강제정병, 학병, 징용 등을 보고 들으며, 처절한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어요.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반성한 것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 간도의 조선족은 300만 명 가량 되었는데, 그들은 중국 말을 사용하지 않고 조선족끼리 자급자족하며 살았어요. 만주 사람들과 몇 차례 어울려 살다가도 구타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서로 배척하며 살았지요. 그들의 입에서 직접 한마디도 듣지 못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일본에 의해 민족적으로 당한 한과 분노가 응어 리져 있었어요. 그들의 사는 모양은 극히 한심했지요. 가난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들은 연변에 잠시 머물다가 고향에 돌아간다는 생각만했지 영주한다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에게는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개념화되기 이전에 감정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민중신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간도에 있던 그들이 바로 전형적인 민중이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아요. 우리 민족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민중적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도 간도에 있던 우리 민족이 바로 전형적인 민중이라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지요. '민족주의'에 대해 논의할 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지 않아요? 제국주의적 팽창을 위한 민족주의가 그 하나고, 그것에 대항하는 민족주의가 또 다른 하나지요. 우리 민족은 '민중적 민족'으로서 외세에 의해 계속 당하기만했는데, 저는 우리나라 말 '민족'에 해당하는 의국어는 없다고 봐요. 영어의 네이션(nation)도, 독일어의 폴크(Volk)도 우리말 '민족'을 표현하지는 못해요. 일본 사람들도 '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우리말과는 뉘앙스가 달라요. '민족'이라는 것도 '민중'만큼이나 고유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