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즈음 소련이나 중국에서도 민족문제가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선생님 소감은 어떻습니까?
소련은 여러 민족들이 결합한 연방국가인데, 그 동안은 민족들 사이의 갈등이 거의 노출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자유의 분위기가 약간 형성되니까, 연방이나 계급의 이름에 의해서는 해소될 수 없었던 민족갈등이 분출되기 시작했단 말이지요. 저는 그 밑바닥에 민중적 민족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다고 봐요. 그것은 소연방체제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해소할 수 없었던 민족적인 것, 이제까지 억눌려왔던 민족적인 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큰 나라들이 전부 해체되어 패권주의가 종식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에요. 중국의 경우도 그렇지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변방은 공산주의도 별로 침투한 것 같지 않고, 한(漢)족이 중심이 되어 공산주의를 내걸고 중국 전체를 지배해 온 것인데, 이것이 조금 느슨해지니까 이제까지의 체제에서 민중적 민족의 지위에 있던 소수민족들이 들고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미국에서까지도 소수 민족이 자기를 찾는 운동이 일어나 큰 나라로 읽어매놓았던 명분을 무너뜨리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 오늘날 전세계적인 규모에서 추진되는 동서 긴장완화가 남북관계나 한반도 상황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대 진영의 긴장완화와 화해가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될 까닭은 없지요. 양대 진영의 데탕트에서는 일차적으로 군사적 긴장관계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상당히 큰 모티프로 작용했으리라고 보는데,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약소민족들에게도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닙니다. 긴장관계를 구축해서 패권적인 제국주의적 이익을 오랫동안 향유한 것은 소련과 미국인데, 이 때문에 손해본 것은 전부 약소민족들이지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입니다.
요즈음 미ᆞ소회담과 한ᆞ소회담이 열리고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여 우리와 연계하면 우리의 장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데, 저는 이 기대감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은 예속적인 본능만 있는 치사한 것이지요. 민족통일문제는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할우리 민족의 문제이지, 미ᆞ소를 중심으로 한 데탕트가 곧 우리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요즈음 정부는 바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이나 양보할 듯이 하면서 내부를 옥죄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저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좀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과거에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갈라져서 양 진영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익을 추구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미국과 소련이 이해관계상 서로 연결되어 남ᆞ북관계에서 눌린 쪽에게 더 큰 착취와 불이익을 갖다줄 수도 있다고 봐요. 이 두 블록의 역학에 따라서는 일본과 중국까지도 이러한 일에 발벗고 나설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끝끝내 경계심을 놓을 수 없어요.
과거에는 패권주의적인 강대국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했지만,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란, 니카라과 등은 민족이라는 것이 강인한 것이고, 양적으로 커다란 세력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이 국가들은 약소민족으로 하여금 강대국의 허상을 보게 하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용기를 갖게 한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베트남이 궁지에 몰려 고생을 하고 있다지만, 베트남은 제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니 만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궁지가 굉장할 겁니다.
우리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켜보면 지상의 과제는 통일문제인데, 이 문제를 상부층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면, 또 다른 형태의 예속관계를 끝끝내 벗어나지 못한다고 봐요. 민(民)이 앞장을 서야 해요. 우리 민족의 민중적 민족의식이 이럴 때일수록 고도로 첨예화되어 인위적으로 분단된 분단선을 끊고 남북을 합쳐버림으로써 정권들이 마지못해 그 뒤를 따르고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세계 각국이 그 실상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한국문제는 제 궤도에 서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에요.
▶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따른 강대국의 세계전략이 변화되고 있는 요즈음 북방정책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세계의 추세가 점점 그렇게 되고 있지만, 미국이나 소련이나 일차적으로 실리주의를 추구하고 있지 않아요? 미국이나 소련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것도 한국을 돕자는 게 아니고, 경제적으로 좀더 많은 이익을 보자는 데 중점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민족은 그 동안 미국을 상대하면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밑졌는데, 어떤 의미로나 세계를 상대로 해서 힘을 가져보지 못하고, 밤낮 수동적으로 움직여왔던 우리 민족이 무작정 개방이나했다가는 소련과의 관계에서도 밑 지고 말지 않겠나 우려하고 있어요.
더 나아가,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를 통해 한반도에도 어느 정도 해빙 무드가 형성되면, 여기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소련을 위시하여 중국과 일본일 거예요. 특히 일본은 호시탐탐 우리를 자기들의 지배권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그런 상황이 온다면 미국과 소련은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묵인할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발벗고 나설 것 같지 않단 말이에요.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문화적 침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데탕트라는 것은 이처럼 한국에 대해서는 소련도 소련이지만 일본의 문화적 침략과 직결된 구도를 갖고 있어요. 왜 이 점을 강조하는가 하면, 그것이 한국민족의 아이덴티티문제와 관계가 있을 뿐더러 문화적 침략이라는 것은 그 다음의 여러 형태의 침략을 쉽게 해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