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뭐니 해도 가장 아름다운 말은 '민주'지요. 민이 주인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거요. 우리가 바라고 지향하는 사회는 민주사회 지요. 엄밀한 의미의 민주사회를 형성하면 다 되는 건데, 민의 이름을 자꾸 가로채서 문제란 말이에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이 주인이지요. 자본이 권력을 갖거든요. 저는 언젠가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이렇게 말한적이 있어요.그것은 결코 고르바초프 개인이나 소집단이 만든 작품이 아니고 그 동안 억울하게 당하고 당하면서 부르짖고 생각했던 피압박자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을 수용한 것이라고요.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방향으로 조금씩 나가는 것도 민중운동을 자꾸 하면서 내세우는 대안이 조금씩 수용되어가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 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민중이 수난 속에서 도전을 받고 이에 대응하는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청사진만이 우리 민족을 살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봐요. 여기에는 대전제가 있어요. 우리 민중은 그것을 할 만한 지혜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제까지는 엘리트들이 자꾸 앞장서서 해버리는 통에 실패의 역사가 반복되어왔는데, 엘리트들이할 일은 민중을 앞장세우면서 민중을 방해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에요. 글자 그대로 민주적으로하려면, 엘리트들이 먼저 청사진을 내세워 민중을 그리로 강제로 밀어넣는 우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대답을 엘리트가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도 하느님 나라를 얘기하면서 단편적인 이야기를 조금씩했을 뿐, 설계도 같은 것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이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요.
▶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선생님, 민중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스스로 망각하는 일은 없을까요? 그래서 생명의 힘과 본질을 잃고 스스로 반생명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까요?
요즈음 저는 영지주의에서 새삼스러운 점을 보고 있어요. 기독교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영지주의의 통찰가운데 중요한 것은 인간이 포로가 되어 갇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의 아이덴티티마저 잃어버렸다는 데 있어요. 육체에 갇혀 헤어나올 생각도 하지 않는데, 빛의 세계에서 파견된 사자가 "너는 빛의 아들이다" 하는 것을 전달하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 즉시 포로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지요. 그것이 잘못된 것은 너무 종교적인 면으로만 기울어져서 그런건데, 사회경제적인 시각으로 아를 확대시키면 굉장히 좋았을 거예요. 기독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종교적인 면에서만 받아들였지요. 물론 영지주의는 이원론을 너무 극단적으로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는데, 기독교가 그것을 상대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공헌이라고 봐요.
아무튼 이제까지 저는 민중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고 해왔는 데, 현재의 민중이면 다 되는 거냐, 그 민중도 자신의 실체를 망각하고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하는 생각을 최근에는 깊이 하게 되었어요. 민중은 생명의 근원인데, 그것을 망각한 민중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제까지 민중신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든지, 구원의 주체라든지 하는 것을 지식인들에게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일보하여 자기다움을 잃고 있는 민중에게 "당신은 생명의 근원이오" 하고 말하고 깨우쳐야 할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해 미국에서 큰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도중의 무의식상태에서 제가 정충이 되어 태평양 바다만한 곳에서 고독하게 헤엄치는 환상을 보았어요. 기진맥진해서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나 거의 체념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배를 쓸어주는 것을 느꼈어요. 그 순간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누군가 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서 힘을 얻어 다시 헤엄쳐 나오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지요. 밖에서 인정해준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해요. 그것은 민중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대체로 민중은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잊어 버리고 마는데, 그 민중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무서운 힘을 갖는다는 말아지요. 민중은 오랫동안 체념에 빠져 약화됐기 때문에 바깥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지식인과 민중을 일단 구별하고 있습니다만, 양자의 관계라고 할까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중의 민중성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지식인과 민중이 관계를 맺어 민중지향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봐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이 글은 강원돈씨와의 대담으로 『신학사상』 제69집(1990년)에 수록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