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서구 신학을 배웠으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미국에서, 몇 사람은 유럽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력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서구 신학적인 오리엔데이션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사상은 저개발상태에 있을 때가 많았으며, 우리는 기껏 수동적인 자세로 배우기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내용적으로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논쟁을 할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표현하고 비판을 표명하는 데 필요한 어떤 언어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구의 논리와 문제 제기에 매여 있었으며, 우리의 문제에 대한 답변도 서구에서 찾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 자신의 현존이 전면에 부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소화할 수 없는 것을 제쳐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신학의 '학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들만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학문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선입견이 없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분석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해되는 학문은 '순수이성'을 전제하며, 그 자체가 '이성활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에서 '학'(한자어 '學問')은 결코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학'은 지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도야활동입니다. 지적인 인식은 그것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총체적 의미의 인간형성입니다. 가치판단은 언제나 이와 연관되어 있으며, 객관성이 목표가 아닙니다.
현영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국어에서 '회개'(metanoia)는 순윤리적이거나 순도덕적인 것을 뜻하지 않고, 인식행위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에 따르면, '회개'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행위를 동시에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인식은 실천과 연관되어 있고, 언어로 표현되는 논리적 인식은 지식인들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도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논리가 결여되어 있을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지식인은 결론을 얻고 그 결론을 고정시킴으로써 독단주의나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않고, 어떤 고정된 결론도 갖지 않으며, 부정의 방법에 따라 끊임없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학문만이 진리로 이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독단적인 주장입니다. 단순한 사람들에게도 진리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김용복 박사는 서구적 사유는 동일성을 강조하지 않고 차이를 강조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긍정적으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고, 분석적인 사유양식은 꼭 필요한 조화(연대)를 손상시킬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컨대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평화나 세계 경제질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공통점을 찾지 않고,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입니다. 그리하여 서구의 학문은 연대적인 행위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주어는 객어를 '배열'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차이가 표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치판단이 우리들에게 언제나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에게는 '객관적인 진리', 곧 사변적인 진리가 없습니다. 인식의 내용은 상황에 매여 있습니다. 학문은 실천을 목표로 하며, 행위의 근거를 제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관'이 아닙니다.
서구 신학은 뿌리 깊이 이원론에 의해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상적인 경험과 종교적인 것은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서구 교회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만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며, 그 때문에 세속화를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역사와 구원사, 국가와 교회, 하느님의 백성과 민중은 무조건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분리요구는 본능의 강제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질 정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방식은 창조신앙과 하느님의 총체성과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원론은 작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통일성을 추구하지, 차이를 찾지는 않습니다. 분석이 사건을 갈가리 찢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분석을 통하여 사방팔방으로 뻗은 연관과 상호작용과 계속적인 발전과정이 파악되어야 합니다. 공간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것도 해석되어야 합니다(공시적―종합적 해석). 우리 자신은 오랫동안 서구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이제 우리는 이원론적인 구별을 단호히 배척하고 있습니다. 현영 학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 '은혜' '성령'―이런 말 들은 모두 교회의 언어들인데, 이 용어들이 일상생활에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언어들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힘을 다 쏟아부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체험한다는 것이 아닌가? '아가페'―그것은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는가? 아니, 그것은 공동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일상적인 경험(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경험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현 교수는 말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가르친 교훈의 실제 내용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되는 것이 바로 종교간의 대화영역입니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모든 종교들과 구별지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제국주의의 잔재를 봅니다. 서구 신학은 학문적임을 자처하고 다른 종교들의 가치를 낮추어보고 차이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자비'를 가르쳤고, 공자는 '인'을 가르쳤습니다. 뉘앙스는 각각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아가페'와 '자비'와 '인'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니그렌(Anders Nygren, Agape and Eros, trans. Philp S. Wastson, London, S.P.C.K, 1953)은 아가페와 에로스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이러한구별이 현실적인 것도 유용한 것도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신학들은 불교나 유교를 종교로 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는 '신앙'이 없고, 신앙의 대상인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석적인,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사유의 결과입니다. 공통점들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또 다른 학문적 결론들이 얻어졌을 것입니다. 궁극적 목표로서의 니르바나(nirvana, 열반ᆞ초탈)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공'(空)이나 '무위'(無爲)나 '무의식'(無意識)은 이 종교의 최고 수준을 가리키는 개념들이지만, 서구인들은 이 개념들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 종교들에서는 주객 분열이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언(無言)이 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더 큰 참재력을 지닌 신앙인 것 같습니다. 유교에는 명확한 신앙의 대상(上帝)이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은 신앙과 신앙의 대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서구 신학은 언제나 그리스도교의 절대성만을 강조합니다.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는 비종교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고(바르트), 다른 종교들을 전이해의 영역에 놓고 그 가치를 절하하기도 합니다(불트만).
아래에서 우리는 대강 여러분들이 말한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의 질문들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 그만큼 여러분들이 던진 질문의 동기를 다루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