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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1

나는 후회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남에게 공언(公言)할 때가 있다. 내가 후회를 하지 않는데, 그것에는 몇가지 심리적 작용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후회한들 이미 저지른 일을 만회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이건 나의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이제 할 일이 많은데 지난 것을 생각할 사이도 없고, 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넷째로 지난 일을 되새기면 마음이 괴로워서인데, 아마도 이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으려는 가장 큰 원인인지 모른다.

나는 어제 오늘의 본문을 정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까지 내 안의 바닐 주머니 같은 것에 싸두었던 것이 찢겨져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이미 기억에서 떠난 듯했던 과거의 일들이 하나 하나가 칼끝같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르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 칼끝 같이 된 과거사는 남을 사랑한 일이거나. 또는 남을 잔인할 정도로 괴롭힌 일 따위가 아니라, '그 때 왜 그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이러저러지 못했던가?' 하는 따위의 일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후회는 나와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그 때 그리고 지금도 잡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이다. 가령 '나의 어머니에게 왜 그 때 이리저리 해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등등이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 중에는 6.25때의 사건이 있다. 6.25 나기 약 6개월 전에 영포(英布)라는 소녀가 이상한 인연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꼽추였다. 20세가 가깝도록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했는데 나를 만난 이후 급속도로 열심있는 크리스챤이 되었고, 삶의 희열을 느껴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전도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6.25가 터졌다. 그녀는 자기 집이 있는 청파동에서 내가 사는 남산동까지 걸어오는데 십여 번을 쉬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폭격이 진행되는데도 나의 안부를 알고 싶어서 찾아오곤 했다. 한 번은 나는 그녀를 잔인할 정도로 욕을 퍼부어 다시는 못오도록 했다. 나는 그 후 그녀를 기억할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피난에서 돌아오니 그 소녀는 죽어서 땅에 묻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부모에게서 그녀의 일기와 그리고 그녀의 동생이 그녀의 최후를 기록한 것을 받았다. 그것은 한 성녀(聖女)의 기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안 선생님은 충청도로 피란 가셨다는데 … '였다고 한다. 하여간 그녀의 기록들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것을 읽고 나는 무서운 죄의식을 느꼈다. 그것은 마지막에 그렇게 가슴 아프게 그녀를 냉대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심정을 알려는 수고를 중단한 일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한동안 언제나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그녀에게 쫓기고 있었다.

매 주일 오후마다 학생들 몇 명과 함께 가매장한 그녀의 무덤 앞에서 죽음과 부활의 설교를 다시 피란 떠나는 때까지 했다. 그 때 내 마음에는 부활에 대해서 두 가지 착잡한 생각이 교차되었다. '부활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녀에게 못다한 것을 속죄할 수 있다' 하는 생각과 반면에 '부활한다면 어떻게 그녀를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심정에서 오는 부활에 대한 공포심이었다.

또 하나는 박재홍(朴在弘) 군에 대한 기억이다. 해방 후 월남할 때, 나를 따라온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일본식 6조 방에서 지냈다 나는 그들에게 생업을 위해 주선을 해준다고는 했으나 따져보면 그들 등에 업혀 산 셈이다. 그들은 매일 새벽 신문을 받아 배달했고, 내가 주선해 준 책자들을 거리에 놓고 팔아서 연명했다. 그 중에 재홍 군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이미 폐가 나빠있었다. 결국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들어갔다가 6.25통에 대구의 피란길에서 죽었다. 나는 그의 시체를 태운 재를 담은 단지를 손에 들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를 좀 더 돌보아 주었던들…' 하는 후회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일면 '다시 만난다면!'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무슨 면목으로!' 하는 심정이 내 안에 함께 맴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나의 어머니의 경우는 그래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과 또 용기가 생기는데, 그들을 다시 만날 용기가 없다. 왜 그럴까? 그래도 어머님은 나를 받아주리라 하는 심정에서 나오는 용기가 아닐까?

하여간 우리는 태연하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일들이 우리 안에 독 묻은 화살처럼 박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결국 이것을 만회할 길이 없이 죽고마는가?

2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에만 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었을까? 이것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다. 그럼 이것을 통해서 무얼 말하자 하는가? 여기서는 부활의 의미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뒤 갈릴래아 바다에 되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한다. 이 때 그들은 체념 속에서 모든 희망을 버리고 죽지 못해 사는 때이다. 과거를 생각만 해도 몸서리 칠 때이다.

저들은 모든 것을 잊고자 다시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그런데 밤새 애를 썼으나 고기 한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새벽 미명에 어떤 이가 바닷가에서 그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한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다. 이것은 그 어느때의 그 누구를 만났던 경험의 반복이다. 언젠가 한 번 베드로는 이런 일을 당했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라고 했는데, 그 때와 지금은 서로 다른 관계에서 마주한다. 왜냐하면 그 때와 지금의 사이에는 <배신>이란 사건이 가로 놓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스승을 혼자 십자가에 달리게 하고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쳤다. 그리고 옛 일터에 와서 과거를 잊으려고 더 열심히 그물질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 분이 나타났다.

베드로는 옷을 주워 입었다. 차마 그를 알몸으로 대할 수 없다는 듯이 물 속에 뛰어든다. 이것은 만날 면목이 없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물에서 헤엄쳐 간 곳은 그의 곁이다. 그래도 만나서 속죄하고 싶은 심정 때문일까?

그런데 이 예수는 거기서 숯불에 떡을 굽고, 생선을 굽고 그들을 기다려 떡과 생선을 나눌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이것도 바로 그가 처형되기 전날 밤의 그 장면의 되풀이이다.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것' 같은 장면이다. 물론 이것은 옛날의 사건과 외적으로는 같으나 얼마나 질적으로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일인가!

"아!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그 식탁에서 그와 마주할까! 바로 며칠 전에 그와 같은 식탁에서 맹세하고 그리고 그렇게 배신했는데!"

이것은 잔인한 재연이다. 어찌 보면 그 때부터의 일을 재연함으로써 저들의 가슴에 독 묻힌 칼을 꽂으려는 그런 장면일 수도 있다. 만일 영포가, 재홍이가 오늘 새벽에 나의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서 "안 선생님! 충청도로 피난가셨다더니 건강하게 오셨군요?" "선생님, 오늘은 신문이 별로 팔리지 않았어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베드로는 가졌을 것이다.

본문은 저들을 다시 찾아온 예수가 저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감히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 못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와서 조반을 먹어라!"

나는 이 말 속에서 밤새 일하고 지친 다리를 끌고 돌아온 자식을 위해 가난한 살림이지만 애써 더운 음식을 만들고 "와서 조반을 들어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밤새 외도하고 아침에 지쳐 들어온 남편에게 따뜻한 음식을 차려놓고 "어서 아침을 들어요. 해장국이에요" 하는 아낙네의 마음을 본다. 그리고 집에 불을 지르고, 식구 한 사람까지 죽이고 산으로 도망한 남편을 찾아 음식을 만들어 가서 "여보, 아침을 들어요"라고 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아내의 마음을 생각한다.

저들은 말없이 주께서 주는 생선과 떡을 받아먹는다. 그런데 예수는 특히 그들의 대표격인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한다. 마치 베드로가 세 번 그를 부인하면서 도망한 상처를 건드리려는 듯이. 그리고 그는 저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부탁한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기 이 이야기 안에는 '부활은 이런 것이다!'라는 고백이 있다고 보인다.

첫째 부활은 인간의 한계, 즉 죽음의 경계선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제자들의 비겁, 무지, 배신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부활의 사건은 일어났다.

사람은 무엇이나 산 채로 먹지 못하고 죽여 먹는다고 하는데 이런 때의 사람은 모두 더 만회할 수 없는, 그런 뜻에서 나로서는 죽음이 되는, 아니 내가 그것에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체념이라는 시체 속에 살고 있을 때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냐?"

이것은 다가올 새로운 것에 희망을 두고 있는 말이 아니라 절망, 아니 절망을 느끼는 것까지도 사치스러운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데 이로써 인간은 비극의 늪 속에 점점 빠져들어가게 한다.

그런데 부활은 바로 디베랴 바닷가에서 하룻 밤 내내 고기 한 마리 못잡았고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에 인간의 극한계의 수평선 저 쪽에 서서 내게 말을 걸어 오는 예수처럼, 내 생의 체념, 나의 한계, 내 죽음의 수평선 저 쪽에서 여기 있는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사건, 새 희망이다.

둘째, 부활은 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사건이다. 내 삶을 출발하던 그 원점, 내 정성과 꿈을 순진하게 꿈꾸던 그 원점, 내가 내 힘으로는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그 원점으로 되돌리는 사건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가슴 앓은, 그 후회할 수밖에 없는, 내가 내민 칼 끝에 상처받은 이들이 내 칼에 맞기 이전으로, 또는 저들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내 마음에 칼맞기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부활은 절망의 나락에서 몸부림칠 때 저 편으로부터 내게로 와서 '옛 것은 지나갔다', '나는 다시 났다'를 알려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바로 철저한 '은혜'의 계시이다. 그 은혜가 나에게 감격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의식을 더 깊게 안겨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으로 되돌려서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인간 권리를 도로 찾아 주는 사건이다. 아무런 추궁도 없이, 그것도 스스로들에게 죄인이 된 제자들이 식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배신하고 잡히지 않는 바다를 향해 빈 그물질을 하는, 아니 자신들의 허망한 마음에 그물질하는 저 제자들을 위해 예수 자신이 식탁을 준비하는 데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라 옛것은 지나갔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살인자가, 창녀가, 사기꾼이 자기가 죽인 혼에게, 자기가 사기한 대상에게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만든 사건이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처럼 변신하여 담대히 그리스도의 사도로 떳떳이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부활은 새 삶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보라. 새 사람이 되었다'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법처럼 잠깐 옛날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새 것을 위해 새로 탄생했다. 새 사람이 되었다' 함은 전에는 나를 중심해서 나를 위해 살았으나, 바로 그랬기 때문에 남을 희생물로 나를 영위했으나, 이제는 너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저들에게 소명에 의해 사는 삶이 주어진 것이 부활 사건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는 세 차례의 간곡한 부탁이 바로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소명이다.

넷째, 사랑에서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만의 일어섬의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실패한 제자들의 일어섬과 연계된다. 부활한 예수가 처음으로 찾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멀리 떠나 버린 제자들이었다는 데에 주목하자. 어쩌면 원수된 저들의 이름을 부활하자마자 부르고, 그리고 다시 찾아나서는 예수의 모습! 그것은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주저앉아 헛된 그물질만 하던 제자들이 부활했다.

3

이상을 그 제자들의 그리스도 증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저들보다도 더 더럽고 비겁한 죄인들, 우리가 전하는 그를 배신한 자들이다. 이 이상 우리의 극한점이 더 어디 있으랴! 더 이상 어떻게 예수를 배신하랴!

이 아침, 우리들의 이 극한점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자. 매일 매일 고깃배 타고 세상의 바다로 나가 헛된 그물질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또 우리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렇다. 부활절 아침에 그 분이 준 떡을 그 분과 함께 먹자. 다시 만회할 수 없으리라고 체념했던 그 시간이, 그 가능성이 다시 한 번 더 내게 왔다. 그와 더불어 그리고 형제와 더불어 아침을 먹자!

그리고 이 부활의 아침이 정부의 권력자들, 감옥에 있는 투옥자들, 고난 속에 있는 가난한 자들도 와서 한 식탁의 아침을 먹을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자.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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