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1. 생물이 부활하는 봄

우리는 지금 가장 중대한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 모였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사건이다. 그리고 참 삶은 죽음도 가두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이 사건은 이 역사상에 뚜렷이 나타났으며, 또한 이 사건이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당시의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사건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매년 봄을 맞이한다. 어떤 식민지 시대의 시인(이상화)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읊었지만, 일제의 암흑의 시대에도 봄은 틀림없이 왔던 것처럼 오늘도 봄은 기약을 어기지 않고 찾아왔다. 봄을 생명의 상징이라면 겨울은 죽음을 상징한다. 겨울은 생명을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한다. 겨울은 추위로 대지를 돌처럼 동결시켜서 싹들도 영원히 질식시켜 근절시켜버리듯이 완전히 내리누르고 가두어 버린다. 만일 이 겨울이 오래 계속된다면 갇힌 생명들은 땅속에 묻힌 채 그대로 근절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봄은 정녕 다시 찾아온다. 봄은 땅에 갇힌 생명들을 불러 일으킨다. 봄이 오면 대지는 부풀어 오른다. 그것은 해빙 때문만이 아니다. 땅에 갇혔던 생명의 싹들이 아직 돌처럼 굳은 흙덩이를 떠밀고 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굳게 밀폐시킨 무덤을 막은 큰 돌을 떠밀고 나오는 어떤 역사적 사건처럼 봄의 기운은 굳은 흙덩이 뿐만 아니라 바위 위에도 와서 그 온통 얼어붙었던 바위 위에도 이끼를 맺게 한다.

봄을 맞은 새싹의 순 끝은 액체에 가까울 정도로 한없이 부드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그 무거운, 돌처럼 굳은 흙덩이를 떠밀고 솟아나올 수 있는지 피상적인 역학(力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봄은 땅에 갇친 생명을 부르고, 땅에 갇힌 생명의 새싹들은 봄을 만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쓴 결과는 굳은 땅을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을 낳게 한다.

그러나 봄이 언제나 주기적으로 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지구과학자들은 이 지구에 빙하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 기간은 5, 6만년이 계속되었으리라고 한다. 이 빙하시대에는 봄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이 지구에 일어났다. 그것은 지구가 안고 있는 불덩이가 땅껍질로 가까이 표출되었는지, 태양과의 거리가 달라졌는지는 몰라도 그 어느 때 이 지구상의 동결, 죽음을 추방한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봄은 주기적으로 왔다. 빙하시대를 종식시킨 첫 봄! 그것이 없었던들 우리는 주기적으로 오는 봄을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지금도 겨울은 온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고 전투만이 남은 같은 현상에 불과하다.

2. 폭력에 죽은 시체들이 일어나는 날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봄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생명은 죽음도 가두지 못한다는 인류 역사의 결정적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 모였다. 부활절은 봄과 더불어 주기적으로 반드시 온다.

이 부활절의 매시지는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서 무덤 속에 갇혔던 수많은 영혼들을 불러 일으켜 돌처럼 굳은 저들의 숙명적 사연, 구조적인 박해의 돌을 굴리고 일어나게 한다.

부활절의 메시지가 봄의 태양이라면 그 소식을 듣는 영혼들은 봄의 새순들이다. 그런데 부활절은 봄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의 한 결정적인 사건이 가져다 주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도 오랜 빙하기가 있었다. 그 때에도 태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는 물리적인 힘이 곧 진리처럼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때에도 물리적인 힘만이 실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 바가 아니었다. 그때에도 아무리 몸은 죽어도 정신이나 혼은 죽지 않는다고도 했으며, 물리적 힘 위에 하느님이 계시다고도 했다. 그러나 겨울은 계속되었다.

겨울은 영원불변이니 영혼불멸이니 하는 사변 따위를 그대로 짓눌러 버렸다. 마지막 무기는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선이니, 악이니, 의나, 불의니, 진리니, 거짓이니를 가름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한계선이었다. 어떤 진리를 말한 입이거나, 어떤 선을 행한 손이거나 간에 죽음 앞에는 거짓을 말한 입이나, 악당의 손과 꼭 같이 그대로 끝장이 난다는 데는 마찬가지였다.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느니, 사필귀정이라느니 하는 것도 이 죽음 앞에는 다 거짓말이었다. 이 역사에서는 죽어도 피안에서 영생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런 식의 설교도 비겁한 도피처였을 따름이다.

이럴 때 예수가 세상에 왔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졌던 해가 다시 뜨리라는 이상으로 들리지 않았다. 까닭은 그 말은 그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편에 서서 저들에게 봄이 올 것을 약속했다. 비록 그의 이런 행위가 철저하기는 했으나 반드시 그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많은 예언자들도 그러했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많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에게서만 처음 생긴 일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만도 이런 기적을 행한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며, 이른바 마술사들도 그럴 수 있다고 자부했고, 당시의 민중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의 말씀은 황홀했다. 그러나 역사상 무수한 아름다운 말씀이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우면 뭘하나? 실효가 없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기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만일 그것 뿐이라면 그런 평은 당연하다.

당시의 물리적 힘을 궁극적 진리의 기준으로 알고, 사람을 죽여버리는 것으로 모든 것은 깨끗이 처리된다고 믿던 집권자들은 예수를 또 하나의 사회 소요분자로 본 것이다.

로마 정권의 눈에는 저가 민중을 선동해서 반로마 운동을 벌이는 반란자의 하나로 보였고, 로마 정권 밑에서 기득권을 수호하는 유대인 지배층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추로 한 저들의 종교와 권력이 야합된 집권체제의 도전자로 보인 것이다. 그런 인물은 흔히 있었다. 그 시대에는 예루살렘 집권층의 불의에 항거해서 떠나간 엣세네파나 젤롯당들을 위시해서 주로 갈릴리를 근거로 하는 반로마, 반예루살렘 운동을 펴는 이른바 메시아 운동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저들은 모든 것을 죽음과 더불어 끝을 낼 수 있었다. 죽여버리고 나면 그러한 것들도 언제 그랬냐 식으로 그들의 죽음과 함께 겨울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시대적인 생리였다. 그러므로 저들은 결국 예수도 그렇게 죽여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도 다른 것들처럼 그렇게 겨울땅 속에 영원히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회당에서 나가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처치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마르 3, 6)고 한다. 저들에게는 참이냐, 거짓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가 저들의 기득권을 침략하느냐, 않느냐 만이 문제였다.

3. 죽임을 해결의 보도처럼

마침내 유대의 집권자들과 로마 정권이 야합해서 예수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죽이면 다 해결된다. 그것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이다. 죽이면 그 입이 다물어지고, 그를 따르던 민중들도 흩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마침내 저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것은 로마 정부에 대한 반란죄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한 것이다. 로마법으로는 십자가 처형은 식민지에서는 정치범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예수와 더불어 처형된 두 사람을 '강도'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저들도 정치범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왜 한사코 예루살렘으로 진입했을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을까? 천만에! 죽어서는 안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그래서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고 한 베드로의 만류는 그 제자들의 입장을 대신한 것이다. 저들은 필경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기적으로 예수가 위기에서 모면할 뿐 아니라, 승리자로 군림하리라고 제자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죽으면 안 된다. 죽으면 끝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의 판단이다. 어떤 진리도 죽지 않을 때 유효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그를 쳐다보는 자들도 '당신이 지금이라도 거기서 뛰어 내려오면 당신을 믿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하느님은 무(無)와도 같이 침묵했고, 힘센 자와 약한 자, 죽이는 자와 죽는 자만이 현실이고, 그것에 개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으로 일반 역사의 또 한토막이 처리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망했고, 중립적 입장에서 관망하던 자들은 조롱했다. 그 후에 남은 일이 있다면 이렇게 죽은 그를 묻은 무덤 앞에 비석이나 세우고 과거의 그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를 묻은 무덤이 없다. 까닭은 생명이 무덤을 깨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여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무덤은 깨뜨려졌고, 거기에 시체는 없었다. 그는 부활한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보아 죽음이 무서워 비겁했고 그래서 배신하여 도망쳤던 베드로는 '여러분은 그를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라는 역사적인 첫 증언을 했다.

우리의 신앙, 교회는 바로 이 부활의 증거 위에 세워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우리는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즉 생명을 죽음이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보여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오늘에도 현존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4. 죽임의 현장에 현존하는 부활

괴테는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이 절망에서 소생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의 축제를 벌였다고 했다. 실의에 빠진 저들이 어떻게 소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예수의 오늘의 부활은 실의에 빠졌던 자, 절망 속에서 사경을 헤메는 자가 소생하여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는 그 속에 현존한다는 뜻으로 볼 때, 현존의 부활의 한 측면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실의에 빠졌다가 다시 용기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는 죽었다 살아났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렇게 그렸다.

예수라는 한 청년이 단신으로 굴러오는 역사의 바퀴를 가로 막았다. 그러나 이 역사의 바퀴는 그대로 굴러서 이 청년을 그대로 압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압살된 그 시체는 그 바퀴에 그대로 붙어서 돌아갔는데 그것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굴러가던 바퀴를 정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굴러가게 했다. 이것은 분명히 한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조그마한 사건을 발단으로 마침내 로마가 굴복하고 역사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린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 것은 아니며, 예수의 죽음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고 글에 옮긴 일이 있다. 어떤 왕이 천하를 평정하고 절대 군주로 임했다. 그는 차츰 왕에서 신으로 승격했다. 그는 그가 왕관을 쓰던 날에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무명의 청년이 왕권에 저항하기 위하여 무리를 이끌고 왕도에 잠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왕은 분노했다. 그는 부하를 시켜서 마치 축제의 홍취를 깨뜨리는 벌레 한 마리를 처리하듯 처형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일부 사람들은 이제 어떤 곳에 숨겨둔 복병이 쳐들어와 저를 구하거나 아니면 어떤 신술(神術)로서 극적으로 모든 일이 역전될 지 모른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처형에서 숨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 실망은 분노로 변했다.

군중들의 마음은 다시 그 왕의 신력(神力)에 쏠렸다. 왕을 향한 저들의 충성은 배가되었다. "우리 왕 만세! 우리 신 만세!" 이 무리들은 마침내 왕의 은덕을 칭송하는 대행진을 벌였다. 그것은 승리와 영광의 대행진이었다.

그런데 맥없이 죽은 그 무명의 청년의 시체를 메고 침통한 표정으로 그 승리의 행렬을 거슬러 오는 적은 무리가 있었다. 한쪽은 승리와 영광의 행진이요, 다른 한쪽은 패배와 죽음의 행진이다. 사람들은 패배자의 시체를 다시 한번 조롱했다. '패자의 최후여!'라고.

그런데 그 시체는 군중에게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죽은 살덩이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보고 있는 저들 자신의 배신, 무능, 그리고 왕권 밑에 깔려 희생된 이들의 응결된 시체였다. 아니, 그것은 해야 할 말을 못한 채 죽은 입, 써야 할 글을 못 쓴 채 죽은 손, 가져야 할 권리를 박탈 당한 채 죽은 몸, 그리고 그 때문에 원한의 죽음을 당한 내 엄마, 내 아빠, 내 아들 딸의 시체로 변했다. 또 그것은 세계의 승리자들이 누비고 간 그 발굽에 짓밟혀 죽은 피와 살의 응결체로 변했다. 아니, 인간의 모든 죄와 고뇌, 울음과 슬픔, 불안과 절망의 시체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저들에게 계시와도 같은 생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신념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저 시체는 바로 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저 시체가 잃었던 '나'라고 생각되었다. 이와 더불어 승리자만이 우리의 왕이며 신이라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왕이나 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아니 저런 것이 우리를 실상 부려먹고 착취하고 있지 않느냐?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은 바로 우리의 패배와 고난, 능욕과 모욕, 그리고 저주를 제 몸에 짊어진 저 사람, 저이이다.

마침내 이 무리들은 "저 시체가 바로 우리의 신이다. 저 초라한 수난자가 우리의 신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승리의 대열에 가담했던 무리들이 이 죽음의 행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 수는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행렬은 2천년, 아니 만년이 되어도 다할 수 없는 행렬이 되었다.

이런 환상에서 나는 울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다. 성서의 부활 증거는 바로 이같은 죽음, 이러한 시체를 하느님이 살려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불법으로 죽인 그를 살려 일으켰다는 것이며,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를 살려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 죽음을 살자!

그의 죽음은 불법자의 손에 죽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했다. 어떤 우리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신했다는 데만 강조점을 두었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을 망각했다. 그것은 그가 불법자의 손에 죽음으로써 바로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 죽은 그 죽음을 대신하고 그 죽음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이다.

그의 부활은 불법자들의 손에 말 못한 채, 억울함, 배신, 수치, 모욕, 절망, 그 가난함, 그 울음, 그 고통을 안은 채 깔려 죽은 저들을 살려 일으킨 첫 열매인 것이다.

그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 이것은 죽이는 것을 최후의 무기로 협박한 권력자들에게서 인간은 공포에서 해방했다는 뜻이다. 그의 죽음이 관념상의 죽음이 아니라 불법자의 손에 죽은 것처럼 그의 부활도 바로 불의한 자들에게 깔려 죽은 자들을 해방하는 사건이다.

그러면 오늘 부활 사건의 현장은 어디인가? 바로 물리적인 힘을 지상으로 알고 죽음으로 협박하면서 불법으로 민중을 억누르는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3.1운동과 4.19의 봉기를 우리 민족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안다. 그런데 그것은 불법자들의 손에 죽은 듯했던 민중이 죽음과 대결하면서 소생하여 우리는 살았다는 것을 증거한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피상적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그것은 바로 불법자의 손에 죽었다가 그렇게 죽은 자들 속에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 부활 사건의 구현이다.

우리는 오늘도 불법의 현장에서 수없는 억울한 혼들이, 아벨의 피가 땅에 묻히듯이 깔려 버리는 것을 본다. 그러나 동시에 죽은 듯했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불법에 대항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담대하게 증거한다. 부활한 예수는 지금 저 민중 속에 현존한다고 소리높여 말한다. 까닭은 지상의 예수가 바로 저렇게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왔다고 했고, 그들을 위해 싸웠으며, 부활의 사건은 죽음마저도 민중을 위하는 그의 뜻을 단절하지 못한다는 하느님의 권력을 이 역사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싸우는데 총 집중하고 있으며, 그러한 싸움 속에서 오늘의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것같은 민중, 나약한 민중이지만 저들은 무너져도 무너져도 끝끝내, 지긋지긋하게 칠전팔기해서 하느님이 주신 정당한 권리를 찾을 것을 믿고 그들의 편에 설 것이다. 동시에 어떠한 강권도 이같은 민권운동을 죽음으로 가두어 버리지 못할 것을 믿는다. 까닭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불법한 자의 손에 죽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살려 일으킨 것을 믿기 때문이며, 그 부활한 그리스도는 바로 저들 안에 현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TAG •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