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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1

우리는 해마다 봄을 맞이한다. 일제시대의 어떤 시인이 '잃어버린 땅에도 봄은 오는가'고 읊었지만, 일제의 암흑시대에도 봄이 왔던 것처럼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이 생명의 상징이라면, 겨울은 죽음의 상징이다. 겨울은 생명을 가두는 무덤의 역할을 한다. 겨울은 매서운 추위로 대지를 동결시켜 온갖 생명의 싹들을 지하에 가둔다. 만일 겨울이 오래 지속된다면 땅속에 갇힌 생명들은 그대로 근절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봄은 정녕 다시 찾아온다. 봄은 땅에 갇힌 생명들을 불러 일으킨다. 봄이 오면 대지는 부풀어 오른다. 그것은 해빙(解氷) 때문만이 아니다. 땅 속에 갇혔던 생명의 싹들이 굳은 흙덩이를 떠밀고 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굳게 닫힌 무덤의 돌문을 밀치고 나오는 어떤 역사적 사건처럼 그 부드러운 새싹이 어떻게 그 딱딱한 흙덩이를 떠밀고 솟아나는지 피상적인 역학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봄은 땅에 갇힌 생명을 부르고, 땅에 갇힌 생명은 봄을 맞기 위해 쏟는 안간힘이 굳은 땅을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봄이 언제나 주기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었다. 지리학자들은 이 지구에 영하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대체로 그 기간은 5-6만 년이나 계속 됐으리라고 짐작한다. 영하시대에는 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이 지구상에 일어났다. 그것은 지구가 안고 있는 불덩이가 땅 껍질 가까이 솟았는지, 또는 태양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는 몰라도 그 어느 때인가 이 지구상에 동결(죽음)을 추방한 사건이 일어나, 봄은 주기적으로 오게 됐을 것이다. 영하시대를 종결시킨 첫봄! 그게 없었던들 우리는 주기적으로 오는 새 봄을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부활절을 기하여 자연의 봄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도 생명을 가두지 못한다는 인류역사의 결정적 사건을 증거하려는 것이다.

부활절은 봄과 함께 어김없이 온다. 부활절의 메시지는 세계에 널리 퍼져서 무덤 속에 갇힌 수많은 혼들을 불러 일으켜 돌처럼 굳어진 저들의 숙명적인 삶, 구조적인 박해의 돌문을 열고 일어나게 한다. 부활절의 메시지가 봄의 태양이라면 그 메시지를 들은 혼들은 봄의 새싹들이다. 그런데 부활절은 봄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이천 년 전에 일어난 한 역사와 사건이 가져다 준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도 오랜 영하기가 있었다. 그때도 태양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역사의 봄은 오지 않았다. 그때 인류의 역사는 물리적인 세력이 곧 절대적 진리인양,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라고 해서 물리적 힘만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에도 역시 몸은 죽지만 정신이나 혼은 족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 물리적 힘 위에 신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겨울은 계속됐다. 이 겨울은 영원불변이니 영혼불멸이니 하는 사변 따위로서 짓눌렀다. 그의 마지막 무기는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선이니 악이니, 의니 불의니, 진리니 거짓이니를 가름하는 것을 없애는 종국이라고 보았다. 어떤 진리를 말하는 입이거나, 어떤 선을 행한 손이거나, 죽음 앞에서는 거짓을 말하는 입이나, 악을 저지른 손과 꼭 같이 그대로 끝장난다는 데는 마찬가지였다.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느니, 사필귀정이라느니 하는 것도 이 죽음 앞에서는 다 거짓말이었다. 이 역사에서는 죽더라도 피안에서는 영생한다는 설교 또한 한갖 비겁한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때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이다.

2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교했다. 그때 사람들에게는 이 메시지가 졌던 해가 다시 뜨리라는 소리 이상으로 들리지 않았다. 까닭은 그 말이 그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편에 서서 저들에게 봄이 올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많은 예언자들도 그러했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그런 일이 예수에게서 처음 생긴 일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만도 이런 기적을 행한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른바 마술사들도 그럴 수 있다고 자부했고, 당시의 대중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당대의 집권자들, 곧 물리적 힘을 진리의 궁극적 기준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모든 것의 끝장으로 믿었던 집권자들의 눈에는 예수의 메시지와 그 활동을 소요분자의 소행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로마 정권의 눈에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로마운동을 주도하는 반란자의 하나로 보였고 로마 정권에 야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유대 지배층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축으로 하는 저들의 종교적 권력체제에의 도전자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인물과 집권은 당시에 흔히 있었다. 예루살렘 집권층에 항거해서 떠나간 에쎄네파나, 로마 침략정권에 정면도전한 젤롯당들을 비롯해서, 주로 갈릴래아를 거점으로 하는 반로마, 반예루살렘 운동을 펴는 이른바 '메시아 운동'은 늘 계속됐던 것이다. 그래서 집권자들은 이들을 죽임으로써 그 반역을 종식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예수도 그처럼 죽여 버리려고 결심한 것이다. 마르코는 이미 3장 6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회당에서 나가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처치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저들에게는 참이냐, 거짓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침해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문제였다. 그래서 유다의 집권자들과 로마의 정권이 야합해서 마침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를 죽이면 그 입이 다물어질 것이고, 그를 따르는 민중은 흩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이면 다 해결된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른 셈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예수를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처형했던 것이다. 이것은 로마 정권에 대한 반역죄를 의미한다. 까닭은 로마 형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의 십자가형은 정치범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한사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을까? 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죽어서는 안 된다. 죽으면 끝장이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됩니다"고 한 베드로의 만류가 제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저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순간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기적으로 예수가 위기에서 모면될 뿐아니라 도리어 영광의 승리자로 군림하게 될 것을 바랐을 것이다. 죽으면 끝장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통념이다. 어떠한 진리도, 죽지 않았을 적에 유효한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당신이 지금이라도 거기에서 뛰어 내려 오면 당신을 믿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하느님은 없는 덧이 침묵했고, 힘센 자와 약한 자, 죽이는 자와 죽는 자만이 현실일 뿐, 거기에 개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으로 일반사의 한 토막이 처리된 셈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망했고, 중립적 입장에서 관망했던 자들은 그를 조롱했다. 그후 남은 일이 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간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나 세우고 지난 날의 그를 추모하는 일뿐이리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를 묻어둔 무덤이 없다. 생명이 그 무덤을 깨뜨려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난 것이다. 여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깨뜨려졌고 거기에는 시체 또한 없었다. 그가 부활한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장으로 보았고 죽음이 무서위 스승을 배반하고 비겁하게 도망쳤던 베드로였지만 마침내 그는 "여러분은 그를 불법자들의 손을 빌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는 역사적인 첫 증거를 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교회는 바로 이 부활 증거 위에 세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곧 생명은 죽음이 가둬둘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보여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3

부활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괴테는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이 절망에서 소생하므로써 예수의 부활의 축제를 버렸다고 했다. 절망에 빠졌던 저들이 어떻게 소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사선을 헤매는 자가 다시 소생하므로써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는다는 사실은 현존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한 측면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실의에 빠졌다가 다시 소생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슈바이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렇게 그렸다.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굴러오는 역사의 바퀴를 전신으로 가로막았다. 그러다 역사의 거대한 바퀴는 그대로 굴러서 이 젊은이를 압살(壓殺)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압살된 그 시체가 그 바퀴에 그대로 붙어 돌아갔는데, 그것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굴러가는 바퀴를 정지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이것은 분명히 한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마침내 로마가 굴복하고 역사의 방향이 바꿔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러한 역사적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수의 죽음의 참뜻이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예수의 부활의 의미는 그의 죽음의 의미와 직결된다. 나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골돌히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고서 글로 옮긴 적이 있다.

고대말, 유럽의 어떤 도성이라고 기억된다. 어느 성주가 그 나라를 평정하고 절대군주로 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신격화시켜서 갖은 학대와 박해를 일삼았다. 그는 자신이 왕관을 썼던 그 승리의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무명의 젊은이가 왕권에 저항하기 위해서 무리를 이끌고 왕도에 잠입했다. 그 소식을 듣고 왕은 진노했다. 그는 이 반역자를 체포,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 젊은이를 따랐던 무리들은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나 사태가 역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마음조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를 따른 무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 실망은 분노로 변했다. 군중들의 마음은 다시 왕의 신력(神力)에 쏠렸다. 왕을 향한 저들의 충성은 배가됐다. 우리 왕 만세! 우리 신 만세!를 외치면서 이 무리들은 왕을 칭송하는 대행진을 벌였다. 그것은 승리와 영광의 대행진이었다. 그때 맥없이 죽은 그 무명의 젊은이의 시체를 메고, 침통한 표정으로 그 영광의 행렬을 거슬러 오는 적은 무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패배와 죽음의 행진이었다. 사람들은 이 패배자의 시체를 또 한번 조롱했다. '못난 자의 최후여!'라고.

그런데 그 시체는 군중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시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시체는 한낱 죽은 살덩이가 아니라 그 왕의 학정에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의 시체였다. 아니, 그것은 그 때문에 죽어간 그들 자신의 부모, 형제, 아들들의 시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승리지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어간 수많은 인간들의 시체로 변했다. 아니, 그것은 인간의 모든 죄와 고뇌, 슬픔과 불안과 절망의 시체였다. 이때 그들에게는 계시와도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것은 저 시체가 바로 내 것이 아닌가, 잃었던 '나'가 아닌가고 생각됐던 것이다. 그와 함께 그 승리자만이 우리의 절대 군주이며 신이라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왕이 바로 우리를 학대하고 착취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의 진정한 신은 바로 우리의 패배와 고난, 능욕과 저주를 제몸에 걸머진 이 젊은이가 아닌가. 마침내 이 무리들은 이 초라한 수난자를 우리의 신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승리의 대열에 가담했던 무리들이 이 죽음의 행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 수는 계속 늘어나 끝없는 행렬로 이어져 갔다.

이러한 환상을 보고 나서 나는 울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나의 '환상'이다. 그렇지만 이 환상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나타낸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이다. 성서의 부활증거는 바로 이 같은 죽음, 이러한 시체를 하느님이 살려 일으켰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증언처럼 너희들이 불법으로 죽인 그를,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를, 하느님이 살려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죽음은 불법자들의 손에 죽었다. 그는 우리를 대표해서 죽었다. 어떤 우리를? 이제껏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죄를 대신했다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을 망각했다. 그것은 예수가 불법자의 손에 죽으므로써 바로 그들의 손에 죽어간 수 많은 죽음을 대신했고 또한 그 죽음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불법자들에게 당한 억울함, 패배, 수치, 모욕, 병고에 짓눌려 죽어간 저들을 살려 일으킨 첫 열매인 것이다. 그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 이것은 죽음을 최후의 무기로서 휘둘러 온 권력자들의 위협과 그 죽음의 공포에서 인간을 해방했다는 뜻이다. 그의 죽음이 불법자들의 손에 의한 죽음인 것처럼 그의 부활도 바로 불의한 자들에게 짓밟혀 죽은 자들을 해방하는 사건이었다.

4

그러면 오늘의 부활사건의 현장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물리적 힘을 최상으로 알고, 죽음으로 위협하면서 부당하게 억누르는 현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3.1운동과 4.19혁명을 우리 민족의 저항사에서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서 알고 있다. 그것은 불법자와 불의한 자들의 손에 죽은 듯했던 민중들이 죽음과 대결하면서 그 위협 아래에서도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한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불법자의 손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불법과 불의의 현장에서 억울한 혼들이 아벨의 피가 땅에 묻히듯이, 그대로 깔려 버리는 것을 본다. 그러나 동시에 죽은 듯했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불의에 대항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저들 속에 현존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지상의 예수가 바로 눌린 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있고 또 그들을 위해 싸웠으며 그의 부활의 사건은 죽음마저도 그 뜻을 단절하지 못한다는 하느님의 힘을 이 역사에 드러낸 사건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오늘의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 소외, 부자유, 압추(壓追)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아니, 하느님이 주신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힘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속에서 오늘의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불법자의 손에 죽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살려 일으킨 것을 믿기 때문이며, 그 부활한 그리스도가 바로 불의와 싸운 저들 속에 현존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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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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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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