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1. 이 비유의 초점

마태 25장 14-30절에 한 비유가 있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먼곳으로 여행하기에 앞서 세 종에게 열, 다섯, 한 달란트씩 맡겼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 주인은 그들을 불러 맡겼던 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었다. 열과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들은 그것으로 장사해서 배로 남겨서 주인에게 바칠때 주인은 그들에게 꼭 같은 칭찬을 한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한 달란트 그대로 돌리면서 "주인이여, 나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임을 알고 두려워서 그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고 한다. 이에 주인은 분노하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더면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 두고 내가 와서 본전에 이자를 붙여 받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고 하며 그에게 맡긴 한 달란트를 열 달란트 맡은 자에게 주라고 명한다.

흔히 있는 민담이며 오늘에도 일상적으로 듣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그런데 이 비유가 많은 수난을 당했다. 그것은 이른바 경제 균등을 사회정의의 중심으로 보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런 눈으로 보면 첫째 그 분배가 불균등했다는 것과, 둘째 적게 받은 자의 그 한 달란트마저 뺏어 많이 받은 자에게 준다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이 비유의 핵심을 무시한 경향성적인 이해이다. 이것은 경제질서의 교훈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비판은 더 가혹하다. 예수의 미래세계의 비전이 고작 그런 것이냐고! 그러나 주의해서 보면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 자체를 나타낸 것이 없고 오직 이제 올 그 나라 앞에서의 인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을 말했을 따름이다.

세 사람에게 차이있게 돈을 맡긴 까닭은 "각각 힘에 맞도록"한 것이다. 말하자면 역량에 따라서 일을 맡겼다. 이것이 벌써 인간차별이 전제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에는 인간을 '한 기능'으로 보고 그 존엄성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다. 그러기에 열 달란트를 맡긴 자나 다섯 달란트 맡긴 자들에게 꼭 같은 칭찬과 축복을 한다. 또는 처음부터 인간의 역량의 차를 전제한 것은 불공정 한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 인간역량의 단정은 없다. 그것은 위의 두 사람에게 꼭 같이 "네가 적은 일에 신실했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네게 맡기겠다"고 한다. 인간의 기능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능력에 따라서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사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선입주견 없이 더듬어 보자.

2. 심판의 날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라고 했으나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도래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혔다. 그것은 재량껏 해보라고 돈을 맡기고 여행을 떠났던 주인이 돌아왔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주인의 돈을 맡고 있는 동안이 현재의 삶을 의미한다면 이 현재는 이제 주인이 돌아올 날이라는 구체적인 미래 앞에 있는 중간시(中間時)란 말이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은 바로 그들의 삶의 진상이 폭로되는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심판의 날인 것이다.

성서의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설계에 의해서 이루어질 낙원 또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것은 과거(현재)를 청산하는 심판의 날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인간의 상황은 바로 도래할 심판이라는 한계적 상황이다. 이것은 인간은 모두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나 종말적 성격이 강조된다.

심판이란 말은 현대인에게 소원하다. 까닭은 그 말에 채색된 종교 신화적 표상 때문에 이른바 과학적 사고에 의해 저항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낙관론에 심취한 사람도 인간은 한계 존재라는 말,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또는 역사가 심판한다는 말도 현대인에게 소원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것이나 종당에는 그 진상이 폭로될 때를 뜻하는 동시에 어떤 시대나 또는 체제를 막론하고 결국 종언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런데 근경에는 역사의 종언 또는 인류의 운명이 지구의 종언과 더불어 종말이 온다는 소리를 서슴없이 하게 됐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학적 견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이른바 풍요사회적인 지향성이 빠른 시기 안에 자원의 고갈을 가져 올 것을 전제한 과학자들의 예견이다.

그런데 성서는 단순히 모든 것의 끝장만을 말하지 않고 숨겨졌던 모든 진상이 폭로되는 것을 심판이라고 한다. 이 삶은 끝없이 연장되지는 않는다. 지금의 가치, 기쁨, 미, 행복, 그리고 승리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그것에는 반드시 끝장이 오되 그 내용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 것들이 모두 무로 돌아갈 뿐 아니라 나에게 안주의 보장이요 자랑으로 보이든 것이 나를 고소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든 말든 내 하는 일에 정지 명령이 떨어진다. 그때 나는 내 손에 나만 볼 수 있게 움켜잡았던 카드를 그대로 내놔야 한다. 이것이 심판의 때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사나 계산할 수 있는 종언 따위와는 상관없이 돌연이 온다. 그것이 주인이 오는 날이다. 그때는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했다는 설명이나 핑계는 소용이 없다. 지금 손에 잡은 그대로의 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그 날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은 현재의 삶에 상반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을 염세주의나 체념에로 빠뜨리므로 적극적인 의미로나 소극적인 의미에서 현재를 무위하게 보내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루가복음 기자는 이 비유를 말씀한 까닭을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주를 달았다. 사실상 이 비유는 그 날 앞에 선 존재로서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는 현재의 삶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 날을 언제나 예견하는 사람 중에는 바로 그 날이 오겠기에 오늘의 역경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그 일 자체는 <버리는 일>이며 모험스러운 일이나 추수의 기쁨을 앞당겨 씨 뿌리는 현재의 행위를 알찬 것으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꼭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먼 길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로서 그가 돌아올 것만을 기다려 현재의 삶을 등한히 하고 그저 그를 기다려 그가 떠난 그 길만을 바라보면서 애달파만 할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 바로 그가 없기에 그의 할일까지 제 의무로 알고 그가 원하는 일을 꾸역꾸역 하되 그가 있을 때보다 더 정열적일 수도 있다. 까닭은 그가 온 날의 그의 기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옳은 삶의 자세인가?

3. 추방당한 종

이 비유의 시간적인 초점은 그 주인이 돌아온 날이다. 그러나 내실적 초점은 바로 그 주인이 없는 동안(현재)의 삶의 자세이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두 삶의 태도가 폭로된다. 그런데 이 비유는 바로 1달란트 받은 자의 삶의 자세를 비판하는 데 집중한다.

이 사람의 사람됨은 그의 대답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주인이여, 나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무서운 분임을 알고 두려워서 그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관찰자다. 그는 그 주인을 관찰해서 그 성격을 제나름대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그 관찰은 한계를 넘었다. 그 주인이 무서운 사람임을 알았다는 것은 바로 주인이 냉혹할 정도로 시비를 가리고야 만다는 뜻에서 바로 보았다. 그것은 바로 심판성이다. 그런데 그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자"라는 것은 비판이요, 추측이다. 이것은 공산주의자가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것과 흡사하다. 까닭은 노력하지 않고 남의 능력만 착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이 그렇다는 흔적은 없다. 각 사람이 그들의 능력만큼 '심고' '뿌렸다.' 또 그 주인은 위의 두 사람을 칭찬하면서 더 큰 일을 맡기겠다고 한다. 결국 이 비판은 자기의무를 외면한 게으른 자의 핑계에 그 동기가 있다. 둘째로 보다 뚜렷한 것은 이 사람은 그 주인과 자신의 일을 뚜렷이 구별하므로 그 주인과 자기 사이를 대립시키고 있다. 공동체 관계가 깨지고 있다. 그러므로 네 일이 내 일이라는 것은 고사하고 주인을 객관화할 뿐 아니라 더 나가서 한계를 넘은 추측으로 그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므로 증오 속에서 의무도 몰각하게 됐다. 셋째, 그러나 그는 그렇게 판단된 주인의 돈을 뺏고 그 권리를 주장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받은 돈을 땅에 묻어둠으로 결국 주인이 없는 동안(현재)에 자기의 삶도 땅에 묻어 둔 사람이 됐다.

만일 이것이 노사관계를 다룬 얘기라면 이 사람에게 보다 철저한 저항을 권고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요, 하느님 나라는 바로 미래적이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미지의 그리고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 공유의 현실이다. 여기 주인은 바로 미래이며 받은 것은 현재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이 사람의 잘못은 현재를 다음같이 산 것이 된다. 그는 미래 폐쇄적이다. 미래가 무섭다. 무엇이 올지 모르는 미래! 그런데 이는 과거의 경험에서 받은 부조리에 지쳐 체념한 수난자처럼 암담한 미래를 단정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함께 보다 나은 미래창조의 의욕도 없으며 미래의 주인이 될 의사도 없다. 그러므로 그의 현재의 삶은 묻어두는 삶, 그런 뜻에서 동헌한 삶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단 하나 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받은 것을 간직해 둔다는 보수성이다. 미래지향적이 아니고 미래차단적인 삶은 결국 두려움을 낳고 그것은 보수적이 되고 만다.

4. 받은 것을 땅에 묻은 자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둔 사람! 그게 누군가! 예수는 이것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을 상징했을 수 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배우고 그 안에서 길든 율법이란 기존질서를 지킴으로써 미래에 대비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이다. 지도자들은 이미 받은 것을 깨뜨리지 말고 사수하면 구원은 자동적으로 보장됐다고 가르쳤고 다스려왔다. 그래서 새 일, 새것은 싫다. 그것은 모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위험한 분자로 보고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들은 결국 여전히 배타적이고 세계에서 고립됐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유에서 아직도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듣고 배운 예수에 대한 부분적인 것을 보수하려는 일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했을 수 있다. 저들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중의 테두리 안에서 받은 바를 고수하려고 하므로 이방인에의 선교까지 반대했다. 저들은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둔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언제 어떻게 제손에 들어온 것, 좋게 말하면 조상에게 받은 '전통적'인 교리에 안주하려고 하므로 세계의 변천과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 따위를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저들은 이미 받은 것만 사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싸움인데, 신앙은 모험인데, 그것을 땅에 묻어두는 것을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그것이 삶에 관한 것이라면—결코 저장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에는 저축이 불가능하다.

신앙은 곧 삶의 자세이다. 신앙이란 특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이다. 삶을 어떻게 땅에 묻어 둘 수 있나?

성서는 삶을 불교나 희랍사상의 주류처럼 내가 간직하고 지키고 그것을 염마하므로 수호된다고 보지 않는다. 삶은 저장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결단적 행동으로써 창조되는 것이다.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그 자체로만 고립될 때 그것은 무와 같다. 그것이 맞부딪힐 때 전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우리가 맡은 것고 현실과 맞부딪혀서 양자택일의 처지에서 결행할 때 생동한다. 삶은 결단에서 튕기는 '스파크'로 점철되는 것이지 지키거나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중립적인 삶, 무위정적인 삶을 모른다. 가령 선이라는 것도 어떤 기존의 실체가 아니고 현실 속에서 선택하므로 한쪽을 잃으면서(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도 악고 아닌, 이익도 손해도 없는, 지는 일도 이기는 일도 아닌,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중립적, 불간여의 무관심의 상태는 사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이미 가졌다는 사람들에게서 본다. 신앙의 측면에서는 독선적인 자들, 일반적으로는 소위 지식인들이 삶을 묻어 두는 위험성이 가장 많다. 지식인은 지식의 완충대지를 만들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을 관망, 사색, 회의함으로 구경꾼, 냉소자가 되기 일쑤다. 과거에 의한 미래분석 관측 등을 하는 동안 현재에서는 초연한 듯 하나 현실은 진행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위치도 밖으로부터 결정되어 가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선택하지 않고 가만히 관망하는 동안 책임도 없고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고 제3의 지대에 있다고 자처하며 그 어느 때고 보다 큰 일을 할듯이 생각하나 그런 자는 이미 자기의 맡은 달란트를 땅에 묻고 있으므로 자기를 상실하고 있음을 모른다.

다섯과 열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투자함으로 활용했다. 투자한다는 것은 송두리 채 받은 것을 내놓는 행위다. 그것은 모험이다. 아주 떼이든지 아니면 더 벌어들이든지 판가름하는 위험 속에 내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안주지대에 (은행에 맡기듯) 예치하는 것과는 다른 행위이다. 신앙의 행위가 그렇고 삶이 그렇다. 그것은 예치했다가 도로 찾거나 땅에 묻어 두었다가 도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 끝말

우리는 민족적으로 중대한 위기를 거듭 겪어왔으며 현재도 그렇다. 우리가 정착한 이 땅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우리는 국민으로 각기의 능력에 따른 달란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민권이다. 민주사회에서는 투표권이 바로 받은 한 달란트와 같다. 그런데 위기를 결정하는 마당에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현재도 우리는 모두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달란트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땅에 묻고 미래를 관망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민권의 행사는 모험일 수 있다. 그로써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땅에 묻어두면 결국 심판을 받는 날이 온다. 그것은 바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며 받은 것까지 뺏기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실이다. 혹은 내 따위야, 한 달란트쯤이야,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큰 일에 참여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에게 큰 일이 와도 거기 참여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