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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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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 16-20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과정을 보면 특수한 예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그럭저럭하다가 된 것이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집안이 그리스도인이니까 그 분위기에 따라서 된 것이다. 그런 이들 중에는 그저 물에 물탄 듯, 특별한 자기 것으로서 결단없이 만성적인 습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부모의 그것에서 연유했으나 어떤 계기에 신(神) 체험으로 자각적인 새 기원을 얻어 재출발한 이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어떤 이는 여러 동기에서 아는 사람과의 인연으로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다가 그럭저럭 크리스천이 된 이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도 그저 습성화된 이와 어떤 전기를 경험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셋째로, 어떤 이는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이 된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선교 방법으로 학교를 세우므로 하나의 선교의 거점화한 예가 많은데, 한국도 그 중의 하나다.

넷째로, 어떤 이는 특수한 계기가 있어 처음부터 비상한 경험을 하고 입교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령 부흥회 같은 데서 또는 어떤 위기에 직면했을 때, 말로만 듣던 교회에 무슨 해결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거나 기대함으로써 교회를 찾은 것이다.

다섯째로, 어떤 이는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리스도교 안에 자기의 어떤 목적을 실현하는데 알맞는 조건이 있다고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한다. 가령 외로우니까 사회의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교회를 선택했거나 또는 그리스도교를 문화의 한 형태로 보고 그런 문화권에 참예하기 위해서, 또는 윤리적으로 긍정되는 면이 있으니까, 그리고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나라가 망하고 시민사회도 없는 판에 교회가 민족운동 내지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도 많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나가는 이들도 많다.

오랫동안 집안의 가정적 전통이 되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자명화된 것에 저항하고 그것에 독자(獨自)의 길을 가기 위해서, 소속의식이 그리워서 회원이 되었다가 그들에게 실망해서, 그리스도교계 학교를 끝냄과 동시에 의무화되었던 그 분위기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리고 처음 어떤 큰 환상을 얻었으나 파고 들어와 보니 그런 것이 연속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 의식적(儀式的)인 만성화가 지속하는 것을 보고, 혹은 이차적인 것을 기대했는데 그런 것이 없거나 반드시 그리스도교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등등이 그리스도교를 버리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회의 일원으로 그대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남아 있는가? 개중에는 이제는 그것이 완전히 제2의 천성(天性)처럼 되어서 교회에 안 나오면 어쩐지 허전하고 클클해서 그대로 나온다. 그렇게 살다보니 친구도 거기 있고, 내 습성에 의해서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거기 있으면 별 소외감도 없고 해서, 거기서 무료함을 달래며 위로도 받는 재미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강직한 성격에서 또는 주변머리가 없어서 한번 결정한 것이니 특별한 소신은 없어도 그대로 지켜서 나아가야 한다는 경우, 어떤 이들은 그래도 교회에 가면 들을 것이 있고, 정신 위생상에도 좋고, 내 생활에 보탬은 되어도 손해는 없다고 보아 그대로 머문다. 어떤 이는 계속 그 안에서 새로운 감격을 하고, 그 안에서 소명을 느끼고 나아가서 그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 그 길을 지킨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머무는 것은 이상의 또는 그 외의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심각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

우리가 반성해야 할 중요한 이유로는, 크리스천 생활은 우리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많으며, 또한 바로 교회인이기 때문에 사회의 분위기에서 보면 어딘지 말과 행동에 괴리가 있고, 어딘지 옹졸한 인상을 풍긴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를 들자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어떤 계층에서는 자동적으로 소외된다. 악착한 생활경쟁에서 경쟁하는 속과 말투가 달라지는 데서 오는 혐오감이 강화될 수 있다. 생존경쟁의 장에서 시간적, 경제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모르는 동안 세뇌되어 그 생활 양식 그리고 나아가서는 취향이 편협해진다. 무엇보다 자연히 젊음, 정열 등이 밖의 사람들이 전제한 틀에 갇혀 제한을 받아 내 소질을 제대로 발휘 못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의식하면서 어느 단계에 가서는 자기를 교회인으로 드러낼 경우와 그래서는 자신이 손해 볼 경우로 스스로를 구별한다. 이렇게 됨으로 그 자신은 서서히 인격적 기형아가 된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게 '크리스천이 된다'는 뜻의 단면을 배우기로 하자. '첫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따르게 됐나' 하는 이야기부터 해 보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은 예수의 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저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는 어부들이다. '어부'라고 하면, 오늘 우리나라에서 조각배를 타고 하루 종일 바다에 나가서 고기잡는 어부처럼 계층적으로 볼 때, 그리고 지적 수준으로나 경제적으로 보나 기층민중(基層民衆)이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는 어부를 특히 천한 직업으로 보아 천시했다. 이유는 도덕적 해석때문이다. 즉, 그것은 그물이거나 낚시거나 간에 물고기를 속여서 잡기 때문이다.

'낚는다'란 속일 수가 있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유대 그리고 희랍어에서도 나쁜 뜻을 연상한다. 그것은 우리 말에서도 같다. 가령 재판석에서 검사가 유죄판결을 내기 위해 피고의 진술에서 낚어 채어 언질을 찾는 경우, 그리고 전쟁에서 어떤 부대를 유인하며 낚어 채는 작전, 혹은 탕아들이 감언이설로 상대방을 함정에 몰아넣을 경우 등도 '낚는다'고 한다. 이런 뜻에서 어부를 도덕적으로 천시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에도 남아 있어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놓고 '낚시꾼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어부'라는 직업은 직업적 특성상 계속하여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직업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에,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천민(賤民)이 되기 일쑤다. 그 눈에는 돈이 될 물고기 낚는 일만으로 가득차게 마련이다. 이 점은 오늘의 취미로 하는 낚시꾼과는 다르다. 따라서 어부는 철저히 물질주의자라고 한다.

이같은 저들의 작업의 현장에 예수가 나타나서, 그들에게 지금의 말로 하면 크리스천이 되기를 종용한다. 그 종용하는 말씀은 두 가지다. 그것을 중심해서 생각하자.

3. "나를 따르라"

"내 뒤를 따르라."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제자가 되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제자'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오늘날의 제자란 순전히 스승에게서 지식만을 배운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라는 것은 삶 전체로 그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본 훼퍼는 제자라는 말 대신 'Nachfolge'라고 했다. 이렇게 '그를 따른다'는 것은 '생의 전환'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삶의 결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서에는 이것이 얼마나 분명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이가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하는 간청에 대해서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다(루가 9, 57 이하). 다른 한 장면은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상대자가 "선생님, 우선 가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해 주십시오" 하는 데 대해서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라고 함으로써 역시 단호히 단절한다. 어떤 이는 '따르겠다' 하면서 "우선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는 데 대해서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보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고 하시면서 역시 그의 여유있는 자세를 잘라 버린다.

이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그를 따른다'는 것은 양자택일을 뜻함이 나타난다. 그것은 '지금까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느냐'아니면 '나를 버리느냐'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된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윤리적 의무의 세계와도 일단 결별함을 뜻한다.

이같은 요구대로라면 위에서 예를 든 크리스천된 동기 또는 교회에 머문 대부분의 이유는 대부분 잘못된 것임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자면 '크리스천 된다'는 것은 "이것도 … 저것도"가 아니다. 내 가진 것에 좀 더 보태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부자 청년의 입장이다.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은 그물, 배를, 아니 아버지까지 버리고 그를 따랐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직장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라는 말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여기 사도들은 특수한 사명을 띠었다. 그것을 누구에게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적어도 필요하다면 언제나 모든 것을 버릴만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억지가 아닌가? 아니다! 우리는 병역의무 앞에서는 일상생활도 끊는다. 그리고 공산사회에서는 혁명을 위해 사(私)를 버리는 것을 상식으로 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듯이.

바울로는 이같은 각오와 준비태세를 "hos … me"(~이 아닌 것처럼)라고 한다. 무엇이면서 무엇 아닌 자처럼, 가난해도 부한 것처럼, 배부르고도 굶주린 자처럼. 이 '처럼'은 외식(外飾)이 아니다. 즉, 나는 언제나 내 선 자리에서 "hos … me"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언제나 버릴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즉, 이 말은 내 선 그 자리, 내가 가진 것에 궁극적 보장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나는 한 관리인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다음의 말씀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즉,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모르고 그저 '나를 따르라'를 '버리라'와 일치시켜서 집을 뛰쳐나온 자는 그 다음 말씀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단순하게 전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다 버리고 전도자로 나서거나 신학교에 가서 성서 공부해서 목사되라는 말이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첫째로 생각한 것은 '고기를 낚는다'는 일에서 '인간을 낚는 일에로!'의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좁은 골목길에서 세노폰이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지팡이로 그 길을 막고, "여기 어떤 물건 만드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그 곳이 어딘지를 말했다. 다음 여기 사람을 바로 만드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날 따라와 보라"고 했다.

여기 중요한 풍자가 있다. 즉, 물질에 대한 관심은 커서 그것에 대해서 상세한 인간들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등한한 것을 폭로한다. 키에르케고르도 이같은 풍자로서 "사람들은 양말 한 켤레 따위를 잃은 것은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상실을 모르는 인간상을 비꼬았다.

그런데 이게 바로 오늘의 인간 그리고 현대화의 추세가 아닌가? 고기잡이도, 장사도, 의업(醫業)도, 과학기술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인간을 위하는 것인데, 오늘의 우리는 수단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나? 소크라테스는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고, "너를 알라!"고 말한다. 그리고 석가는 "나를 배우지 말고 내 말한 진리(法)를 배우라!"고 한다. 또 공자는 "정(正)으로서의 정(政)을, 학(學)으로써 배워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다리가 긴 어른이 깊고 넓은 골짜기를 뛰어 넘으면서 다리 짧은 아이에게 이렇게 뛰라고 앞에서 시범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의 명령(Imperative)에는 그럴 수 있는 힘(Indicative)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는 단순히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싸움의 전선에 섰다. 예수는 작전을 배워준 게 아니라 앞장서서 그의 뒤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운명체가 되자!'는 권고이기도 하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확실한 신념의 토로이기도 하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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