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부활 신앙
고전 13, 12
1. 인간무상

다른 초대교회의 신도와 같이 바울은 부활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바울은 특히 부활을 곧 그리스도인의 존재 근거로 알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라고 하고, 17절에서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것이고 여러분은 아직 죄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한다. 또 19절에서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인간들입니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희망이 중심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두 가지 면이 강조되어 있다. 첫째는 부활은 꼭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인간존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부활이 없다면 이 삶 자체는 모순덩어리며 허무 그 자체이다.

인간무상!

이것은 불교경전의 인용문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보고 느끼는 현실의 한 부분이다. 서구의 유명한 사원(寺院)들은 모두 무덤 노릇을 겸하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어릴 때부터 들어오던 위인들을 만났는데 특히 세익스피어, 롱펠로우, 워즈워드 같은 시인들의 무덤 앞에서 무상을 경험했다.

내가 재독(在獨) 중에 세계의 스타처럼 등장한 케네디가 함께 위기를 맞은 독일의 본래 수도인 베를린으로 왔다. 그 때 100여 만 시민이 환호했는데, 그가 베를린 광장의 단에서 한 말 가운데 "인간은 모두 왔다가 갑니다. 정치인도 그렇습니다. 케네디, 나도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베를린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귀에 쟁쟁했는데, 그것이 예언이 된 듯이 그는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국민의 환호 속에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 때 나는 정말 생의 무상을 되씹었다.

동양에서는 이 허무성을 노래한다. 소위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리고 위로한다는 것이 '범은 가죽을, 사람은 명예를 남긴다', '자손으로 영원히 산다', 또는 '귀신으로 영존한다'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철저한 새 가능성을 말한다.

2. 부활의 현실

그럼 바울은 부활을 역사적 사건, 즉 우리가 객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나? 그렇지 않다.

'살과 피로 된 존재로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으며,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이어 받지 못한다'(50절)고 단정한다. 그 대신 soma(몸)의 부활을 말한다. 그는 살(肉)과 몸(體)을 구별한다. 몸이란 한문으로도 인간의 본성이란 뜻이다. 그것은 이원론에서 말하는 영은 아니다. 그 설명은 어렵다. 단지 확실한 것은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은 희망이다. 그런데 그는 또한 부활의 현재성을 말한다.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부활했다"고 말하며, 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현실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부활의 현실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사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리 물어도 알 수 없다. '이러 하리라. 저러 하리라'는 추측은 끝까지 추측으로 머문다.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육체가 그대로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은 부정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부활이란 전혀 새 일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연장이 되며 그런 부활은 참 부활이 아니다.

지난 번 나는 이 자리에서 부활의 현실을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와 비교해서 사랑과 관련시켜 보았고 거기서 일치점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만일 12절의 '그 때에'가 부활의 때라고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렇게 보면 부활이란 영혼불멸설에서 보는 것처럼 귀신 같은 것으로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것 같은, 하느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그를 알게 되는 그런 현실이다. 즉 만나는 일이다. 너와 나 사이에 무엇이 가로 막혀서 마주하고 있으나 희미하고, 사실 통하지 못했던 그런 관계가 정말 가면을 벗기고 만나는 그런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럼 그 만나는 대상은 누구인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와 '내가 온전히 알게 되리라' 하는 점이다. 여기서 목적격, 즉 누구를 알게 될 것인가가 빠져 있다. 사실 그것은 이름지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만나야 할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만나고 싶은 그를 알게 될 것이다. 즉 참 너의 발견이다.

여기서 부활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mitmensch) 하는 일이다. 바울이 여기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공동운명체가 되는 그런 현실을 말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이 현실을 좀더 이해하고 싶어서 톨스토이의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부활의 이해를 보았다.

3. 톨스토이의 부활

이 소설의 주인공 네후류도프는 상류계급의 청년으로서 지식인이다. 그는 그 시대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으로 별다르지 않는 일상생활을 보냈다. 그는 하류층에 속하는 카츄샤라는 소녀를 범했다. 그 여인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집에서 쫓겨나서 마침내 창기가 되고 범죄자가 되어서 감옥에 갇힌다. 네후류도프는 당시 그 여인을 범하고는 물건값을 치르듯이 그 여인에게 돈을 집어 주고 할 일을 다 한 듯이 생각했다. 그는 그 외에 계속 많은 여인과의 관계를 당연한 일처럼 감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던 그는 어떤 계기에 자기가 그렇다면 썩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지금까지의 생에 의혹을 갖게 된다. 그 고민상이 1부 28편에 집약되어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그는 자유한 듯 하나 구속되어 시들어 가는 자기 앞에 떤다.

그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나를 속박하고, 나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허위를 없애야겠다. 모든 것을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올바른 일을 해야겠다.

그는 단호히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방랑자이니까 미이시와도 결혼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공연히 그녀를 불안스럽게 하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리고 마리아, 비시리, 에브나에게도 말하자. 그러나 그녀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녀의 남편에게 나는 추악한 자이며 그를 속이고 있다고 말하자. 또 그 여자 카츄샤에게 나는 악당이다. 그녀에게 죄를 졌으니, 그녀의 죄를 덜어주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하자. 그렇다. 그녀를 만나서 사과하자. 그렇다. 어린애가 하듯이 빌자. 필요하다면 결혼도 하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어렸을 때 하던 것처럼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눈을 위로 치뜨고 이렇게 말했다: "주여 저를 도와 주소서. 저를 가르쳐 주소서. 나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이렇게 비는 동안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 살고 있던 '신'은 그의 의식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자유와 용기와 삶의 기쁨만이 아니라, 선(善)의 위력을 느꼈다. 그는 이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모두 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취한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말하는 부활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인생론』에서 인간에게 동물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이 있는데, 그 동물적인 내가 지배할 때는 결국 죽게 되고 이성적인 내가 동물적인 나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하고 이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바로 갱생, 즉 부활이라고 진술한다.

교회에서 회개하라,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는 바로 이러한 뜻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윤리적인 죄를 청산함으로 윤리적인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성서에서 말하는 회개인가?

4. 도스토옙스키의 "부활"

이에 대해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와 쏘냐를 보자. 그는 8년 징역으로 시베리아 정배를 가야만 했다. 그에게 자수를 권한 쏘냐도 그리로 가서 그림자처럼 그를 돌보았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심히 앓고 난 다음 그의 고민을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대상도 없고 목적도 없는 불안, 미래에서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끊임없는 희생, 이것이 이 세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이다. 또 새 생활을 출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나!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이미 감옥 속에 있으면서도 내적인 자유인이 된 그는 자기 과거의 행위를 다시 한번 속속들이 음미하고 숙고해 보았으나, "나의 양심은 태연하다. 물론 형법상의 범죄는 저질렀다. 그러면 법률 조항에 비추어 보아서 내 목을 자르면 청산될 게 아닌가!" 오히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는 바로 자수했다는 그 점 하나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그는 부활절 기간에 꿈을 꾸었다. 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휩쓰는 전염병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파고드는 일종의 새 미생물이었다. 그런데 그 미생물은 이성과 의지의 소유자이다. 그 병에 걸리기만 하면 모두 절대자로 자부하게 되고 결국 서로 물고 뜯어서 죽인다. 여기서 라스꼴리니코프는 인간의 교만이 결국 어디로 갈 것인지, 이성이라는 인간의 운명이 어디로 갈 것인지, 자기를 포함한 인간 절대주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내다 보았다. 양심의 소리, 윤리적인 갱생, 초인적인 명상, 그런 것들에서 그는 새 희망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부활의 경험을 한다. 그는 맑게 개인 어느 날 새벽, 통나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광막한 넓은 강을 바라 보았다. 높은 강가로부터 주위의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먼 저쪽 강으로부터 노래 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거기에는 활짝 햇빛이 퍼붓는 끝없는 초원 위에 유목민의 천막이 아득히 보이는 점(點)을 이루며 까맣게 보였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는 판이한 전혀 다른 인간이 생활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세상이 아닌 저쪽에 한 새 세계를 본다. 그는 이 세계를 표현해서 '거기서는 시간조차 걸음을 멈추고 흡사 아브라함과 그의 가축 무리의 시대가 아직 사라지지 않을 성 싶었다'고 말한다.

그 때 쏘냐가 와서 말없이 곁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처음 굳게 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말할 수 없는 감격!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들은 둘이 다 창백하고 수척했다. 그러나 이 병든 창백한 얼굴에는 새 삶을 향하는, 다가오는 미래의 다시 남, 완전한 부활의 서광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킨 것이다!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삶의 끊임없는 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자, 참자'고 다짐했다. 그들에게는 아직 7년의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얼마나 어려운 고통과 한없는 행복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부활했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부활을 톨스토이와 전혀 다르게 경험한 것으로 본다. 톨스토이는 부활이란 내 윤리적 죄를 청산하고 희생적인 삶에 들어가는 이성적 윤리 생활을 하는 '본래의 나'로서의 회귀라고 본 데 대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은 절대로 내게서 내 가능성의 실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저 피안의 마을, 시간이 정지된 참 자유한, 이쪽의 생과는 전혀 다른 저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부활은 막혔던 너와의 담, 내 얼음장 같은 마음이 녹고 사이에 막힌 것이 툭 트여서 너와 내가 일치를 경험하는, 죽은 관계가 열림으로써 오는 새 삶! 이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다! 부활! 그것은 이 지평선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타협함으로써가 아니라, 너와 내가 지평선 넘어 저쪽 한 점에서 다시 만날 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그 저쪽에 다시 만나는 그 지점,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 상태를 그는 설명해서 '7년이 7일로, 기다림이 곧 기쁨으로' 되는 현실이라고 한다. 그는 일찌기 쏘냐가 주었으나 눈여겨보지도 않던 성서를 처음으로 손에 들었다. 그때 그의 머리에 '이젠 이미 그녀의 확신은 동시에 나의 확신이 아니냐? 적어도 그녀의 강점, 그녀의 의욕이 곧 내 확신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여기에 그는 사랑, 사랑 안에서의 부활을 경험한다. 그것은 너와 나, 주관과 객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로 통일되는 그런 것이었다. 진실로 바울이 말한 '그 때에는 서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이 희미했으나, 또는 부분적으로밖에 몰랐으나, 그러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 같다'고 한 바로 그 현실이다.

우리의 부활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신비에 싸여 있다. 그것은 물어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부활 그것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이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부활을 앞두고 한 대화가 나오고 있다.

예수: 신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오.

마르다: 마지막 날 부활 때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압니다.

예수: 아니, 아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오. 당신은 이것을 믿소?

이 '나'를 '사랑'으로 바꾸어 보자. 마지막 날 부활하는 것 말고, 지금 사랑하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육체가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에는 죽음이 없다는 말이다. 부활은 사랑에서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도스토옙스키는 새 출발하면 무얼하나? 라고 의문을 던지다가 이 의문을 확대해서 내가 혼자 무슨 영광의 몸을 입고 부활하면 무얼 하나?라고 물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왕 관을 씌우고 무한한 영토를 주면서 '당신이 여기서 영원히 왕이 되시요' 하고 없어졌다고 하자. 나는 홀로다. 그럼 그 왕위가, 그리고 그 영원이, 그리고 그 넓은 땅이 무슨 소용이냐? 아니 정말 참 부활은 '더불어' 영원히 살아야 한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