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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요한 1, 35-39
1. 나면서 인간은 무엇을 찾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무엇인가 찾고 있다. 어린아이는 손과 발을 계속 움직이다가 '으앙' 울어버린다. 무엇인가 찾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찾는 것이 시간에 맞춰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지나면 기다리는 습관이 생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어린애는 곁에 있는 무엇이나 잡아 입에 가져 간다. 그러나 잡았던 것을 쉽게 버려 버린다. 그것은 찾던 것이 아님을 느끼고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다.

좀더 커서 무슨 장난감을 주면 가지고 놀다가 쉽게 내버려 버리거나 깨뜨려 버린다. 그는 그것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에는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에 집착한다. 가령, 밤낮 단 것만 먹어 보았으면, 날아 보았으면, 저 나는 나비를 잡아 보았으면, 저 새를 잡아 봤으면… 그러나 그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포기한다.

좀더 크면 돌이나 나무조각, 깨진 그릇조각 등을 방에 모아들이고 장난을 한다. 그는 그런 것들을 그대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범이다. 이것은 개다. 이것은 엄마다. 이것은 귀신이다. 이렇게 자기 방을 우주화하는 셈이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마저도 자신이 아닌 환상적인 것으로 바꾸어 어떤 역할을 한다. 가령 왕이라든지, 무서운 아버지라든지.

그는 나무나 돌이나 이러한 자연의 어느 부분들과 친하려고 한다. 그런 것들과 말을 주고 받는다. 그는 그런 것들을 산 것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인형 같은 것도 그 이름을 지어 살아 있는 대상으로 대화한다. 종이나 나무조각 같은 것으로 어떤 형태를 만들어 집이라 하고 자신은 아버지, 함께 노는 아아들은 아들 또는 부인이라 한다. 또는 막대기를 타고 놀면서 말이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왕도, 아버지도 아니고 조그마한 꼬마임을 발견할 때 또는 나무나 돌이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발견할 때, 자기가 타고 다니는 것이 말이 아니라 여전히 나무가지인 것을 인식했을 때 갑자기 싱거워져서 그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거나 내동댕이 쳐 버린다.

칠팔세가 되면 확대했던 세계를 좁힌다. 가령 시골 같은 데서는 볏단 같은 것을 빙 둘러쌓아 작은 공간을 만들거나, 광 같은 데서 어떤 기물들로 둘레를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을 오래오래 숨겨 보기도 한다. 그것은 자기를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열두세살 쯤이면 그런 좁은 세계에 지치고 다시 환상으로 그 세계를 넓힌다. 소녀는 자신이 공주라는 꿈을 꾼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벽에 부딪치고 푸대접받는 것을 느끼면, 소녀는 공주 대신 초라한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소년은 하루에 겨우 백원 정도 타 쓰는 하잘것없는 존재임을 의식할 때 세계 여행의 꿈은 사라진다.

사춘기에는 다시 홀로 있기를 싫어한다.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한다. 그의 마음을 그대로 열어 볼 수 있으며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소년은 어떤 한적한 들과 같은 조용한 데서 어떤 공주 같은 소녀가 자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거리를 나서면 모든 소녀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것만 같다. 그는 자신을 왕자나 기사처럼 행동으로 보일 기회를 상상한다. 소녀도 역시 어떤 조용한 데서나 또는 거리를 지나면서 어떤 중세기적 기사가 나타나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키스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환상을 갖는다. 이 때 저들은 환상의 애인을 가진다. 그 애인은 현실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한없이 미화된 환상적 존재다. 이 때에는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만 같다. 그 애인은 결코 성욕의 대상일 수 없다. 그들은 그 애인을 끝없이 소유하는 환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곧 '아니야 그렇게 되면 안돼' 하고 물러선다.

이 무렵 이들은 극히 제한된 그룹을 만들어 시를 읊고 함께 노래를 하면서 우리만의 세계는 영원하리라고 맹세한다. 그러나 그런 환상도 속속 배신을 당한다. 그 애인도, 그 친구들도 무한히 아름다운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님을 발견한다. 이 때 그는 갑자기 세상이 좁다고 느낀다. 방은 숨이 막힌다. 부모가 형성한 분위기는 질식할 것만 같고 어디로 멀리멀리 떠나가고 싶다. 그래서 찬란한 승리자가 되어 돌아오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소원과 꿈은 현실의 조건들에 의해서 사정없이 꺾인다. 자기를 포위하는 것은 각박한 현실뿐이다.

고등학교에서부터 점수 인간이 된다. 꿈도 낭만도 허락되지 않는 경쟁만이 있다. 그 과정을 거쳐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 어느 정도의 기대를 걸어 본다. 그러나 대학이 주는 것은 내가 찾는 것과 전혀 맞지 않는다. 배우면 배울수록 현실적이 되라는 거듭된 독촉만 늘어 간다. 보이는 세계의 껍질을 계속 벗긴다. 여고 때 그리던 선생은 맥없는 월급쟁이, 사랑하고 싶던 xx는 돈 없는 집 자식, 그처럼 멋있게 보이던 xx는 삼류대학에서도 쩔쩔매, 고등학교 시절에 TV를 통해 그리던 가수는 스캔들만 계속 일으키는 창기와 질적으로 차이가 없어! 그처럼 순결하게 보이던 수녀들도 매일 밥을 먹고 이를 쑤시고 하루에 한 번씩은 변소에 가지! 멀리서 존경하던 학자도, 정치가도 만나 보니 별것 없더라. 현실적이어라! 현실적인 것이란 실리적인 것이다. 아름다움보다는 권력, 아니 돈, 그러나 내 불안은 해결되지 않는다.

성인이 된다. 불안은 계속된다. 그는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피안적인 것에서 차안적인 것으로 자신을 그것에 국한시키면서 그것의 포로가 된다. '보다 더, 보다 더'라는 채찍이 그를 뒤쫓는 삶.

장년을 넘어 노년기에 들어서면 전의 꿈과 현재의 자기 꼴이 너무나 대조적임을 느낀다. 너무도 초라한 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무엇 때문에 살아 왔는지 모른다. 전에는 그래도 앞에 무엇인가 오르려니 했었는데 이제는 과거를 거머쥐려고 하면 '그랬으면 좋았을 걸…'만 남는다. 왜 살았나? 무얼 찾았나? 이제 무엇이 기다리나? 죽음?

이상은 맑시스트 블로흐(E. Bloch)가 『희망의 원리』의 첫 부분에 서술한 것을 내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인간의 삶의 행로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른바 소시민, 소위 말하는 쁘띠-부르주아의 그것이다.

2. 우리는 무엇을 찾는가?

여러분은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여러분은 이미 현실에 의해서 지녔던 꿈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렸는가? 여러분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이미 체념하고 있는가? 체념은 절망인데! 절망을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는데! 오늘 여러분에게 작은 그룹의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이 그룹을 형성한 성원들은 여러분들처럼 고등학교도 대학도 가본 일이 없는 밑바닥 계층이다.

팔레스틴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세상에 일대 심판이 올 것을 예고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절규했다. 그는 광야에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두 제자와 함께 서 있다가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증거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35절의 말인데, 29절에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되어 있다. "보라"(ide)라는 말은 '경험한다, 목격한다, 본다, 깨닫는다, 의식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요한문서에 있어서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말인데 그것도 '깨닫는다', '인식한다', '느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을", "알라, 저가 하느님의 어린 양인 것을", "인식하라. 그 하느님의 양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처럼 반복된다. '보라'—이말은 하잘것없는 사람들을 결집시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나간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보라'고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두 제자들은 그의 스승의 말을 듣고 미지의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는 바로 예수다. 그들을 본 예수는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서 그들은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들에게 예수는 "와서 보라"고 한다. 보게 되리라.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 한마디 말이 고리가 되어 저들은 빨려가듯 예수를 따라가서 예수의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그중의 한 사람이 저 유명한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아였다. 안드레아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찾고 곧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나는 보았다"라고 한다. 그것이 고리가 되어 베드로는 예수를 찾아왔다. 예수는 그를 보고 제자로 맞아들인다.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예수는 필립보라는 사람을 만나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예수의 그룹의 일원이 된 필립보는 베드로 형제와 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다. 아마 베드로가 "와서 보라"고 했겠지. 필립보는 곧바로 자기 친구인 나타나엘이란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가 만난 이에 대한 감격과 고백을 털어놓으면서 그를 이 그룹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아직도 주저하는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와서 보라"는 한마디로 그를 예수에게 연결하는 고리로 삼았다. 자신에 찬 기대. 나타나엘을 본 예수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이다"라는 말로 그와 결속하게 된다. 나타나엘은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아니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 베드로, 필립보도 신천지를 여는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저들은 각기 제 길에서 헤맸다. 그런데 '보라'라는 말이 고리가 되어 예수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하나의 운동체적 공동체의 핵심이 된 것이다. 요한이라는 기자는 예수의 동지규합의 과정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승한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이 예수가 유하는 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그러나 저들이 곧 자기들의 친구나 형제를 그에게로 집결시킨 것은 행동으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고백한 것이다. 저들은 만난 것이다!

만남! 만남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내 스케줄에 따라서 오전은 이 사람을 만나고, 오후에는 저 사람을 만나는 그런 만남 혹은 이웃간에 또는 직장동료 사이의 일상적인 만남, 그러므로 내 삶의 계획에 아무런 변동도 주지 않는 만남이다. 여기에 대해서 또 하나의 만남은 내 일상성을 깨고 내 계획을 바꾸는 사건을 일으키는 만남이 있다. 철학에서도 독일어 treffen과 begegnen을 구별한다. treffen은 일상적인 만남인데 대하여 begegnen은 사건을 가져 오는 만남이다. 영어의 meeting, encounting도 그런 구별이 있다. 우리말로는 만남에 대하여 해후가 우연성을 내포한 말로서 번역한다면 만남은 begegnen, encounting에 해당할 것이다.

Begegnen! 그것은 내가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나 자신을 과감히 열어 놓게 한다. 평소에는 사람을 만날 때 누구나 무장을 하고 만난다. 상대방에게 어떤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상대방을 잘 모르면서 무장해제 즉 자기를 개방하는 것은 적진에 뛰어드는 것 같은 모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이 없이 사람에게는 참 만남이 불가능하고, 이런 참 만남이 없이는 위에서 스케치한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보라"라는 한마디 말에 의해서 예수를 따라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나를 따르라는 한마디 말에 예수를 만난 이나 그 만남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만남에서 얻는 경험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어떤 빈 궁전의 문을 하나씩 하나씩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계속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상상도 못하던 새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참 만남은 마침내 나와 너가 없어지고 새로운 자아 즉 '우리'가 탄생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러한 만남은 일생에 한번밖에 없다. 여러분은 누구를 이렇게 만났는가?

이 젊은 민중들은 예수를 만났다. 그러므로 저들의 삶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고 그 만남의 결과가 발화점이 되어 마침내 로마제국을 휩쓸고 전세계를 변혁하는 결과를 가져 오리라는 것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3. 이 사람을 보라

세례자 요한이 보라고 하던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또 한번 이와 같은 말을 만난다(요한 19, 6). 그것은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다. 'Ecce home!' 'Behold the man!' 그가 어떤 사람인가? 이방총독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과 같은 현장에 선 이, 로마 졸병들이 가시면류관을 엮어서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고 침을 뱉기도 하고, 절을 하는가 하면서 때리기도 하는데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능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선 이 사람을 보란다.

이 사람을 보라! 한때는 갈릴래아 지역에서 민중들과 더불어 애환을 나누면서 하느님의 나라 도래를 선포하더니, 그러다가 권력과의 야합에 부패한 예루살렘에 돌진하더니, 이 때에 그의 제자들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으로 믿고 자리다툼까지 벌이게 했더니! 지금은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여기 홀로, 오직 홀로 수욕을 당하는 패배자,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Ecce home!) 한 유대인으로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 속에 뛰어들어 마치 하느님인 양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던 사람! 그러나 지금은 바로 자기 민족에게 고소를 당하고 이방인의 법정에 서서 거짓증언에 의해서 처형을 재촉하는 순간까지 아무런 변명도 못하는 이 사람을 보라!

저는 하느님의 새로운 뜻을 전매특허나 받은 듯이 선포하며 오랜 유대 전통에 항거하던 이, 그의 유일한 무기라면 '오직 하느님만'이었는데 지금 그 하느님은 무자체(無自體)인 양 침묵하고 이같은 한스러운 현장에 어떤 형태로도 간섭하지 않는다.

이 사람을 보라!

승리자를 보라 함이 아니다. 패배자를 보라 함이다. 힘 있는 자를 보라 함이 아니다. 무능한 자를 보라 함이다. 그가 만일 로마정권에 유죄판결을 받을 만큼 저항운동을 폈더라면 비극적 영웅이라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말대로 로마의 법에 비추어서는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는 이 사람. 그러나 이 장면을 주목하라. 이 사람을 보라고 하는 빌라도의 역할에 주목해 보자. 그는 이 사람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롱과 조소의 왕관과 왕 복을 입혀 사람들 앞에 세우고 이 사람을 보라고 한다. 이 말은 결국 아무런 죄 없이 수모와 고난을 당하는—그것도 자기 손에 의해서—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꼭두각시 같은 증인노릇을 한다. 그의 증언은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것이 되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 어린 양이란 무죄함을 상징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속죄물로 제단에 바쳐지는 것이다. 바로 순결하기 때문에 남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과 같은 것이 예수라고 요한은 증거했다.

빌라도는 왜 이 사람이 이러한 억울한 처지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또 왜 자기가 이같은 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사건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지금 꼭두각시처럼 죄 없이 고초당하는 이 사람을 보라고 한다. 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주인공 이 사람을 그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자기 홀로는 이 사건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그가 평소에 멸시하는 유대 군중들에게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의 판단을 구한다. 이 사람의 운명은 그에게 수수께끼였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사람의 사건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도, 그가 대표하고 있는 로마의 법으로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로마제국의 권력에 의해 죽으면서 로마제국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또한 심판한다.

4. 나는 이 사람에게서 민중을 만났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남으로 나의 삶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일생 이분과의 만남을 심화하는 작업에서 동화에 나오는 빈 궁전의 겹겹이 있는 문을 하나하나 열며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황홀함을 경험하고 있다. 여러분도 그분을 만나기를 바라며, 만났다고 생각되면 그 관계를 일생 동안 심화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그를 만날까? 그것은 바로 죄 없이 죄를 뒤집어 쓰고 고난의 길을 가는 현장이다. 권력의 손에 잡혀 힘이 없기 때문에 성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수치와 그 죽음이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제물이 되어 가고 있는 현장에서 그를 만난다. 나라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싸웠는데 권력의 손에 체포되어 이른바 법관들이 스스로 자기 양심을 비웃으면서 아니 자기의 존재의 근거인 법을 무시하면서 정죄함으로 정죄를 받으면서, 정죄하는 권력을 심판하는 현장에서 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사람은 바로 이 한국 땅에 현존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고 외친다. 그 소리가 이 고막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저들이 당하는 고문이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 비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리가 되고 말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분신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 때문에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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