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1

습성이라는 것이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그중에도 재래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것이 많다. 가령 영웅주의가 그런 것이다. 과거에는 역사를 한 영웅이 만들어 낸다고 확신했다. 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할 때 실제로 싸운 것은 졸병들이요, 그들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인데, 그 전쟁을 유발한 한 영웅이 홀로 싸워 승리한 것 같은 표현과 역사 서술을 해왔다. 이게 바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받는다라는 말의 실질적 동의어가 아니겠는가? 이 버릇은 어떤 중심 인물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고 이른바 '주변'의 사람들이라든지 역사적 혹은 자연적 조건들은 아주 무시해 버리게 만들었다.

무슨 책을 읽거나 사물을 보는 데에 있어서도 바로 그런 연유로 인해 주변적인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버릇이 습성화되어 애당초에 그런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편견이 생겨 버린다. 나는 오랫동안 예수에게만 집중하고 그가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 그리고 여러 조건들은 모두 예수를 부각시키는 도구 정도로 무시해 왔다. 그러나 민중을 만나고부터는 복음서를 보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러면서 훨씬 더 구체적이며 입체적인 예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영웅주의 말고도 어떤 책에나 얘기에서도 그 큰 줄거리에만 관심하고 그 줄거리를 형성하는 주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실을 완전 무시하는 습성이 있다. 이것을 일종의 주제주의(主題主義)라고 할까? 그래서 가끔은 바로 이 주제에서 소외된 사실에 주목함으로 한 시대의 상황이나 혹은 한 인물의 본질적 문제들의 일단을 문제로 삼아보려고 한다.

2

마르코복음 6장 14절에서부터 16절까지를 읽어 보자.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헤로데 왕이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래서 그가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하고 더러는 "그는 엘리야다" 하고 말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한 예언자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극히 짧은 단락이다. 그런데 이 단락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주제가 무엇일까? 세례자 요한을 불법으로 죽인 안티파스의 불안과 공포가 그 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얘기 속에 그런 주제를 무수하게 알고 있다. 매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보다 다리를 뻗고 잔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비록 승리를 했다고 해도 상대방을 괴롭히고 불의한 방법을 사용한 이 승리자는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자기 한 일에 대한 자책에 고민하는 법이다. 그래서 자기가 가해한 그 상대방이나 자기가 한 일이 꿈에도 나타나고 허깨비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단락에는 그런 주제에서 밀려난 그 시대에 보편화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환생한다는 신념이다. 예수가 활동을 시작하니까 사람들은 단순하게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온 이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생각도 하기 전에, 안티파스가 자신이 저지른 불의를 시정할 생각은 않고 그를 공격한다고 처형한 세례자 요한이 환생한 것이라고 예수를 보았다. 아마도 예수가 안티파스에게 복수할 것을 바랐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한 이방 여인에게 놀아남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대상인 야훼 대신 바알종교를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나봇이라는 한 농부에 대한 그의 잔인성에서 보는 것처럼 사욕을 위해서는 국민 아니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학살하는 아합에게 대항해 싸우다 지쳐 버린(갑자기 사라져 버린)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신념도 상당히 퍼졌을 것 같다. 이 신념은 살인자 안티파스까지도 현실로 받아들여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환생을 믿은 것이었다. 이런 얘기는 필립보 가이사리아 도상에서 있은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마르 8, 27-30 공관).

루가복음 12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인자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하겠다."

이 구절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예수 자신의 말이라는 것을 비판적인 학자들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예수의 입을 통해 인자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나누어진다. 1인칭으로 된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흔히 보듯(가령 에제키엘) 단순한 의미의 나를 대신한 말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그것이 어떤 특수 존재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예수 자신이 자기에게 이 명칭을 쓰지만 제자들은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다. 그런데 3인칭의 경우에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나는 바로 메시아적 세계 심판주 같은 특수한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 경우를 엄격히 구별해 왔다. 그런데 루가복음 12장 8절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여기에서는 지금의 나와 장차 올 인자를 구분하면서도 그 연대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당시의 일반화된 신념을 바탕으로 이 뜻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환생한 엘리야라든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신념과 연계시켜 보면 바로 '나는 장차 인자로 내림할 것이다' 하는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잊어서 안될 것은 이런 인자를 말하는 예수 자신은 한계의 존재라는 것이다. 때리면 맞고 찌르면 죽는 그런 한계적 존재 말이다.

예수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면서 거듭 자신은 죽었다가 살아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더군다나 수난의 도시 이제 십자가에 못박힐 예루살렘 도상에서 한 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는 무엇인가 목적이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을 겨루어 보기도 전에 죽을 것을 예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까? 만일 죽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예루살렘행은 그 이상 어리석은 행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살아날 능력이 있다면 죽을 필요가 있느냐고. 그것이 베드로의 입으로 행동으로 대변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어야 산다는 자세가 단호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의 길을 가로막는 제자에 대해서 사탄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점이 있다. 예수가 그 예언처럼 정말 살아난다는 것이 확실했는가? 그러나 이른바 수난사에는 그가 다시 살리라는 어떤 가날픈 기대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처절한 기도, 불법한 재판 과정에서의 철저한 침묵, 십자가에 처형되는 현장, 그 현장에서는 유신론자들이 이제라도 그 십자가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우리는 너를 믿겠노라고 기대와 조롱이 섞인 요구를 해왔으나, 예수는 한낱 나무에 달린 채 못과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그 마지막은 절규로 끝난다. 아무리 봐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념을 가진 자의 수난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같은 비통한 죽음으로 끝나는 스승을 바라보는 제자들일지라도 만일에 그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사실을 신념화했다면 끝까지 당당했을 것이고, 그같은 비열한 모습을 보이거나 도망해 버릴 까닭이 없다. 심지어 끝까지 예수의 죽음을 지켜 보고 최후의 증인으로 남은 여인들 마저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추호도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예수가 죽은 다음다음 날, 즉 안식일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갈 때에 그의 부활 따위를 기대한 흔적은 전혀 없다. 저들은 가는 길에 단지 죽은 시체를 가로막은 돌을 치울 걱정과 그들의 사랑의 표시로 그 시체에 향유를 발라 줄 생각만 했던 것이다. 수난사 전체에는 죽음이 끝이라는 것 이상 아무것도 다른 요소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의 서술법은 특이하다. 예수가 다시 살리라는 기대 따위는 가지지 않은 여인들이 무덤 안에서 예수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즉 빈무덤만을 본 것뿐이다. 이것을 사실로 전제하고 생각할 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특히 그를 사랑 하던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갔나? 아니면 가사상태에 있던 예수가 기력을 회복하여 어디로 피신했나? 아니면 죽었던 그가 정말 살아났나? 예수의 수난예고를 전제로 하면 그 여인들이 예수의 예언을 잊어버렸다거나 믿지 않았던 것을 참회하는 한두 마디의 말쯤은 있음직한데, 그러한 흔적도 없다. 단지 절망적인 허탈상태에 빠져 있는 그들 앞에 한 청년(천사가 아닙니다)이 "놀라지 말라.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고 했다. 그는 한 메신저 역할을 한 셈이다. 이 메시지에서 다음의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죽었던 예수가 정말 살아났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살아남이 결코 정신적이거나 영혼 따위 등 어느 부분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전체(whole Being)로서 살아났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런데 다시 살아난 그는 죽은 현장인 그 곳에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하던 갈릴래아에서만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끝으로 주목할 것은 이 청년이 그 여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점이다. 그것은 예수가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예수는 당연히 무덤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루가에는 이 말이 책망조로 강화된다.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런데 그 마르코복음 기자는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지 죽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루가의 표현도 같다. 한가지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말로 마르코복음 16장 6절의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희랍어 원문 자체에는 다시라는 말도 없고 "살아났다"는 말로 번역된 '에게이로'는 보통 일어난다는 뜻으로, 자다가 일어난다, 앉았다가 일어난다, 병들었다가 건강해진다, 심지어 전진한다는 의미로 쓰여진 말이다. 그러면 분명히 무덤을 탈출한 예수(죽음에서 일어난 예수)는 어디에서 어떻게 실재한다고 믿었는가?

마르코복음서 기자는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붓을 놓는다. 그는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예수가 현시하는 따위의 표현을 하지 않는다. 이 점은 물론 그 후에 기록된 마태오, 루가, 요한과 전혀 다른 것이다. 마르코는 그 복음서를 쓸 때에 갈릴래아나 혹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한 예수가 현시했다는 전언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그는 그런 얘기는 완전히 침묵해 버렸을까? 마르코와 그 집단은 예수의 다시 사심을 후에 다른 세 복음서에서 수록되었던 것같이 이해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정신적인 계승 따위를 말하려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몸을 뺀 어떤 부활을 생각지 않은 것으로 입증된다. 말하자면 전체로서의 일어남(살아남)을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다시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처음 동지를 규합했던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은 다시 만나자고 한 사실이다. 저들은 갈릴래아에서 어쩌면 다른 복음서들에서와 같이 부활한 예수의 환상 따위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가 보다. 요는 저들은 예수의 부활을 자기들의 일어남을 뺀 어떤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부활 경험을 한 다음에 저들은 변신하였다. 저들은 어제의 베드로도, 요한도, 안드레아도 아니었다.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를 배신하고 도망쳐 버린 그들은 물론 더욱 아니었다. 저들은 불사조와도 같은 신념을 갖고 과감히 일어났다. 마치 제2, 제3의 예수인 듯, 저들은 우리 안에 예수가 환생했다는 신념에서 도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

3

환생이라는 말은 기독교권 내에서는 아주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이 말에 익숙하지 않다. 나는 여기서 교리화하는 노력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로를 통해서 이런 시각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4, 11).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예수의 고난은 이미 과거사지만 지금 그를 따르는 사람의 고난 속에 현재적 사건으로 환생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까닭은 그의 고난을 자기 몸에 현재화 함으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다. 그 예수의 생명은 일반적인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사인데 그 생명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몸에 환생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6장은 이런 얘기로 가득 차 있다. 4절이 그와 거의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단지 차이는 세례를 받는 것이 그 구체적인 관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을 따름이다. 즉 세례받음으로 그의 죽음에 참여하고 나아가서는 그와 함께 묻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난 예수의 생명 가운데 우리도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의 죽음과 그가 말한 생명이 부활사건을 뜻한다면 이미 과거사지만 세례를 받음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현재화 즉 환생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다음과 같은 좀더 구체적인 말이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자기 삶 안에 환생시킴으로 그와 더불어 죽은 것만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이미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하고 그것을 더 강조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결연한 신념을 토로한다. 바울은 거듭 이미 나는 죽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런 의미의 말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로가 말하는 그 자신의 삶을 자기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환생이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하는 데 별로 무리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죽었다(과거)는 예수와 오늘의 자신의 생명(현재)의 연대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를 엄격히 질적으로 구분하려는 과거의 서구의 신학적 수고는 타당성이 없다. 아니,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삶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바울은 주저없이 예수를 죽음을 이긴 삶의 첫 열매라고 하고 그를 따르는 우리를 그 다음의 열매라고 했다(고전 15, 20-21). 이것은 부활 문제를 논하는 데서 언급된 것인데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까 당연히 우리도 부활한다는 신념으로 꽉 차 있다. 또는 그는 그리스도가 상속자이듯, 우리도 똑같은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는 선언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주장 속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처럼 우리도 그의 자녀라는 그리스도와의 동등의식이 내포돼 있다(로마 8, 17).

그런데 이러한 연대성, 바꾸어 말하면 환생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대전제가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까지 반복된다.

다음에는 요한복음서에서 이런 사고의 틀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요한 5, 24)고 선언한다. 11장 25절에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고 한다. 죽음은 이제는 더 없다는 선언이다. 죽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생명은 영구하다는 선언으로서 바울로와 꼭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쉽게 한 구절로 대치한다면 "나는 생명이요" 하는 것처럼 그가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상 요한복음은 의례적으로(공관복음서와 달리) 예수를 생명으로 표시한 데가 많다. '생명의 샘', '생명의 떡', '생명의 나무'(포도나무), 그리고 특히 죽은 라자로를 살려 일으키는 얘기와 더불어 그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임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이 생명의 환생의 길을 성령의 내림과 직결시키고 있다.

예수의 처참한 죽음에 극도로 실망한 제자들, 체념 속에서 마침내 에제키엘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같이 된 제지들에게 생명인(산) 예수는 성령(pneuma)을 불어넣음으로 그들에게 하지 못한 과제를 인계해 준 것으로 되어 있다(20, 22). 성령을 불넣었다는 것은 창세기 2장 22절에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불어넣은 것, 에제키엘이 환상으로 본 마른 시체들이 다시 제모습을 찾아 핏줄이 이어지고 살이 차 오르고 가죽이 생긴 다음에 "숨아!"라고 하면서 그것을 산 것으로, 즉 생명체로 바꾸는 것을 보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이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남은 것은 이 프뉴마를 받은 제자들뿐이다.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영원히 살고 있나? 저들은 한결같이 그는 그의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집단 속에 환생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바울로도 거의 예외없이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부활의 환생을 말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계보(정신)를 이은 사도행전에 비로소 이것이 극적으로 표면화된다. 이미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를 처형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일, 그것도 유대 사람들이 운집한 오순절에 모여든 자체가 그들이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들은 그 모임에서 결정적인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의 날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것은 적대자의 상징 같은 예루살렘에 뿌리를 박는 계기이기도 하며, 이스라엘 아니 예루살렘, 아니 성전에 감금됐던 하느님을 해방시켜 온 세계를 위한 하느님으로 환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수난사에서 당한 예수의 고난이나 그의 무능과 대조하면 더 큰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인데 가시적으로는 패배 이상의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것과 소위 오순절 성령 사건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런데 바로 이 오순절 사건은 환생한 예수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올라간 목적이 죽음이라는 쓰디쓴 과정을 거쳐 민중 속에 환생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예루살렘을 예수 없이 저희끼리만 진격함으로 오순절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예수의 민중들의 신념이 아니었겠는가? 그것을 단순하게 성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예수는 그 민중 속에 환생함으로 그는 죽지 않고 그의 목적을 실현시켜 나가는 한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우리는 이상에서 그것이 부활이라거나 다시 산다거나 또는 환생이라고 부르거나 간에 이런 신념을 관철시키는 데는 다음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역사는 반드시 정의로운 목적을 향해 간다는 목적론적 사관을 가진 민족이나 집단에게 가능하다. 둘째는 역사발전에 인간이 주역으로 참여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확신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가야 할 방향대로 가지 않고 불의한 자들의 횡포의 장으로 변하므로 그 목적이 불투명해진다. 그와 더불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그 희망이 한(恨)으로 변한다. 그러나 비록 자기의 힘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목적의식을 포기하지 않거나 자기의 해야 할 일을 소명처럼 받는 사람이 어떤 형태로나 그 염원이 계승되어 완성되는 그날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령 부모가 자기 생에서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이 좌절되었을 때, 그 자식이 대를 이어 그 일을 완성하기를 요구하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후계자를 양성함으로 그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그런데 그런 의지가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것이 환생이라는 신념이다. 그것은 혈연적인 전승이나 또는 정신적인 계승과 같은 어느 부분을 인계해 주는 것 같은 양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목적 또는 한을 풀지 못한 그 역사에 어떤 형태로든 변신하여 다시 나서 그 일을 계속하겠다는 신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활사상도 한의 역사를 무시하고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한은 물론 힘 없는 자의 한이다. 어떤 가진 것으로 문제를 척결할 수 없는 자의 집요한 투쟁의지의 반영이다.

민주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한국 민족만큼 자기 정부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억울한 죽음을 그토록 많이 당한 경우도 쉽지 않다. 특히 4.19 이래로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에서 싸우다가 희생되어 가거나 아니면 불의한 구조적인 악에 대항할 어떤 것도 갖지 못했기에 자기 몸을 불살라 민족제단의 제물로 삼는 일이 속출한 민족사를 나는 다른 데서 듣지 못했다. 노동자들도 그 뒤를 이었다. 저들이 오죽 한에 맺혀 있으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그어 댔을까. 그러나 그런 자기 희생을 단순히 자학적인 행위라고 규정해 버리면 저들의 뜻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니 저들이야말로 반드시 옳은 민족 사회가 이루어지고 만다는 신념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4.19 이후, 70년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수많은 수난사 가운데 광주학살사건이나 또는 분신자살하여 민중봉기를 유발한 때가 돌아오면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날을 기억하여 어떤 형식으로나 행사를 치룬다. 지난 5월은 광주학살사건 10주년으로서 다른 때보다 특별한 의미를 두고 긴장 속에서 행사를 치뤘다. 그런데 그런 류의 행사에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얻는가. 크게 나눈다면 진혼제 같은 제사 형식을 취하거나 그때의 상황을 얘기로 되살려 사람들의 희미해진 기억을 되찾게 하고 죽은 자들의 정신을 이어 받겠다는 노력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환생이나 부활이라는 신념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태일이나, 광주사건의 박관현이나 송광영이나 김세진 등의 죽음을 단순히 추모하거나 정신적으로 그들의 절규를 이어받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전태일, 박관현, 김세진, 송광영이는 반드시 살아나서 그들이 절규하던 내용을 성취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존재로 변형하여 환생함으로 그 싸움을,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승할 것이라는 신념이 우리의 것이 된다면, 우리의 역사의 모습은 급속도로 변동될 것이다. 칼을 가진 자가 법까지 무시하면서 자기의 적대자를 죽여 버리면 일은 끝난다고 안심해도 되는 사회라면 누가 그 횡포를 막을 수 있을까?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행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기가 불의한 동기로 처형한 세례자 요한이 환생했다고 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신념 앞에 떨 수밖에 없는 그런 풍토가 우리에게 있다면, 가령 광주의 대학살 사건의 10년이 되는 오늘까지 그 가해자들이 계속 거짓말로 이 민족을 기만하는 것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나 전설에서는(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생을 무술을 닦고 그 원수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했다는 얘기는 많다. 그래도 이스라엘 민중들이 믿었던 것과 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거나 처형된 이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환생해서라도 그 일을 이루리라는 그런 집요한 기대와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투쟁에 있어서 체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소수라는 고립의식에서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횡포의 역사는 그만큼 빨리 단축될 것이다.

TAG •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