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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1

한 포도원을 경영하는 주인이 일꾼을 고용하기 위해서 새벽에 거리로 나갔다. 그는 일꾼들에게 하루(해가 떠서 질 때까지)에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계약하고 고용했다. 그는 아침 9시쯤 다시 거리로 나갔다. 거기에는 일이 없어 서성거리는 실업자들이 있었다. 그는 저들에게 적당한 삯을 줄 것을 약속하고 고용했다. 이렇게 열두 시와 오후 3시에도 일꾼을 고용했다. 그런데 해질 무렵인 오후 다섯 시에 거리에 나갔더니 역시 일군의 실업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들은 일하려고 해도 고용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라는 말로 포도원에 불렀다. 해가 져서 주인이 삯을 지불할 때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불렀다. 이들과는 구체적인 계약은 없다. 그런데 하루의 삯인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이것을 본 먼저 온 사람들은 그 삯에 비례해서 자기들의 삯은 더 많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일률적으로 주었을 뿐이다. 이에 먼저 온 일꾼들은 항거했다. 저들은 "마지막에 온 일꾼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것만 당신은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 수고한 우리들과 꼭 같은 대우를 했습니다"라고 항의했다.

이들의 항의는 정당하지 않는가? 정말 이 주인의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정의에 모순되지 않는가? 이 비유는 사회문제를 취급한 한 드라마와도 같다. 여기 고용주를 대신한 관리인과 노동자의 대표(그들 중 한 사람)가 등장한다. 저들의 항의는 사회정의의 원칙인 노동과 분배의 불균형에 대한 투쟁이다. 이것은 오늘의 노동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이 항의를 깨끗이 거부한다. 주인은 그 대표에게 "나는 당신에게 불공평하지 않았소.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소? 당신의 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들에게 준 만큼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 삯을 치르는 것은 내 뜻이요, 내 돈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나의 착한 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라고 한다. 이러한 주인의 주장이 사회정의라는 관점에서 정당한가? 공산주의적 사회주의관에서 보면 노동자의 항의가 정당하다. 그 주인은 노동의 대가의 균등분배 원칙을 무시했다. 혹은 이러한 항의에 대해서 주인을 변호해서 비록 한 시간이라고 해도 하루 종일 일한 것만큼의 능률을 냈기 때문이라 할지도 모른다.

유대교 문헌에 이와 비슷한 비유가 있다. 한 왕이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는 그 현장에 나와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중 한 사람을 불러 내어 하루 종일 함께 산책하다가 돌아온다. 그런데 삯을 줄 때 그에게도 하루 종일 일한 다른 노동자와 꼭 같이 주므로 항의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왕은 너희들이 하루 종일 일했으나 이 사람은 짧은 시간에 너희만큼 일했기에 그 균형을 위해서 쉬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28세밖에 안된 한 라삐가 죽었을 때 그의 업적이 다른 사람의 백년의 업적에 해당한다는 찬사로써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포도원의 주인은 그런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주인은 내 돈으로 내 마음대로 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주인의 주장을 변호해서 소유권은 주권과 더불어 신성불가침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소유권 주장이 바로 사회정의의 암이다. 이 자본이 바로 인간의 노력을 착취하며 그 소유한 재산 자체가 바로 착취한 것이기에 본래 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이 주인의 노동과 상관없이 베푼 선의를 변호하며 그 선의는 먼저 온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서 보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사회사업과 같은 것으로서 노동자의 자주적 능력과 또 저항력을 마비시킴으로써 결국 자가 생명과 소유를 유지하려는 악의라고 맞설 것이다. 또는 실업자에게 일거리를 주되 강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여 계약하고, 그 계약을 이행한 것을 사회정의라고 변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그 계약 자체는 자본가와 실업자로 갈린, 노동의 기회가 불균등한 불합리한 사회를 전제한 계약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권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주권을 강매할 수밖에 없는 실업자의 약점을 이용한 하나의 착취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사회문제의 원칙을 찾고 거기서 사회정의론의 근거를 직접적으로 찾아 내려면 결국 딜레마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비유는 사회문제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기존사회의 질서나 또는 그것에 바탕을 둔 정의관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전혀 다른 질서, 새 질서를 말하고 있다.

그럼 이 비유는 지금 우리의 삶과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 이 비유는 바로 이 역사, 이 사회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문제에 대한 직선적인 대답이 아니라, 사회의 기존질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자명적이라고 믿는 정의관 같은 것에 맞선 물음이다. 그런 뜻에서 이 비유는 사회 문제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에게 진지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2

그럼 이 비유에 나타난 새 질서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가톨릭과 루터파의 일부에서는 이 비유를 '하느님의 포도원에 부른다'는 것 자체에 초점을 두고 늦게 온 사람이 먼저 보수를 받는 반면에 먼저 부름 받은 사람이 오히려 나중이 될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했다. 그래서 저들은 이 텍스트를 저들의 '회개주간'의 첫 설교에 사용했으며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의 바울의 말씀 중에 특히 "내가 남에게 선교하고 나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두렵다"는 뜻과 관련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이 비유 뒤의 "이와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를 이 비유의 결론으로 잘못안 데서 온 그릇된 이해였다. 이 16절은 마르코 10장 31절, 루가 13장 30절 그리고 마태오 19장 30절에서도 보는 대로 원래 이 비유에 속한 것이 아닌 독립된 격언과 같은 것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결코 나중에 온 노동자에게 삯을 먼저 지불한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처음 온 노동자의 항의에 대한 주인의 대답에 있다(예레미아스). 이 주인은 처음 온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삯을 지불한다고 해서 그 삯을 적게 준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단지 일을 적게 한 사람들에게 그 노동과 상관없이 그들의 하루의 생활비(한 데나리온은 당시의 하루의 생활비)를 준 데 있다. 이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고 주인의 일방적인 선한 행위, 즉 공로나 업적의식과 상관없는 관계의 질서이다. 이것은 의무와 권리를 근거로 하는 일반 사회질서를 초월한 새로운 현실이다.

이것은 어떤 보편율이 지배하는 질서가 아니다. 받았으니 주어야 하고, 했으니 받아야하고, 기능에 따라 분배되고 가치관이라는 제3적인 기준이 나와 너 사이에 끼어서 심판하므로 계급이 생기고 이해관계에서 싸움이 생기고 이기느냐 지느냐, 손해냐 이익이냐,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따위의 긴장관계의 현실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어떤 제3적인 관념이나 기준이 개입되지 않고, 인격과 인격이 신뢰와 사랑으로 만나는 현실이다. 이 만남에는 주는 자유, 사랑의 자유만이 지배하는 현실이다(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남을 위해 자기의 것을 주는 자유).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의 사신(使信)에는 이러한 새로운 현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 나라는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퍼하는 자, 미움받는 자의 것이다(루가 6, 20이하). 말하자면 이 사회질서에의 소외된 무능한자의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려는 자가 오히려 나중이 되고 능력있는 성인보다 오히려 어린애같은 인간이 높임을 받는 나라(마르코 9, 33-37), 그 나라는 어떤 조건, 어떤 과거, 어떤 가치도 묻지 않고 오직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시오" 하는 현실이며(루가 14, 15-24), 마침내 자기의 공로의식은 없고 오히려 자기에서는 무와 같이 잊혀진 하잘것없는 것이 인정받는 그런 세계다(마태 25장).

이러한 기본적인 새 질서가 노동과 분배, 의무와 권리라는 교환 시장의 현실세계에 제시된 것이다. 바울은 이 현실을 노동의 대가로서 보수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질서에 대해서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은혜"의 현실이라고 했다(로마 4, 4-5).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질서이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고(업적) 못지키는 데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율법의 질서에서 새 현실에 뛰어드는 결단을 한 사람이다. 이 질서는 기존질서에서 볼 때 "미련"한, 그리고 '스칸달론'의 현실이다. 그러나 미련해도 나는 그 안에서 살고 그것을 전하겠다고 자기를 내댄 이가 바로 바울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업적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바울이 말한 은혜의 질서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에서 한 걸음 나가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새 질서가 기존질서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떤 문제를 유발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주인은 소위 사회개혁자나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기존질서나 그 가치관을 새로운 질서에 의해서 파괴하거나 또는 기존 질서의 의무에서 도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주인은 기존질서 안에서 이루어진 개개인과의 계약 의무를 유린하지 않고 그대로 이행한다. 이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저 사람들도 너희들처럼 처자를 가진 몸이니 하루의 생활비가 필요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가 약간씩 희생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설복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혹은 설복해서) 없는 자에게 주려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이 사회질서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전제하고 그 한복판에서 그와 상반된 현실을 실현한다. 여기서 두 질서의 긴장 관계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저항을 받게된다. 여기 자기 것을 갖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와 자기 것이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기존질서의 저항과 제약이 생긴다. 여기서 사회문제가 야기되며 인간 현존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현존은 일원화된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질서의 긴장 속에서 있음이 드러난다.

자기 것을 남에게 그저 주는 자유가 저항을 받는 세계! 남을 무조건 사랑한다는 일도 사회정의라는 관념에 의해서 제한 받아야하는 현실! 사랑과 의, 법과 은혜가 맞서는 현실, 이러한 두 질서는 내 안에, 내 밖에 팽팽한 관계를 이루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서 굴복되거나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관철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지나가는 거지를 볼 때 내 주머니에서 돈 한푼이라도 주고 싶어 진다. 그때 내 안에 다른 질서가 항의한다. 그것은 의무와 권리의 세계를 파괴함과 동시에 그에게 공짜를 바라는 의존심만 길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질서의 대립관계는 역사 안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엄연한 현실이며 그것이 어느 하나에로 흡수되면 실존은 와해되고 만다. 성서는 이 두 가지 질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의의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 신약성서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율법과 복음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엄연한 현실을 전제하고, 어떻게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3

그러면 우리는 현존 사회질서 속에서 어떻게할 것인가? 우리는 이 세로운 질서를 하나의 상층적 차원의 질서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새 질서에 의해서 기존질서를 파괴해 버리거나 아니면 거기서 도피할 것인가, 아니면 두 질서는 무관한 것으로 평행시킬 것인가? 아니! 이 주인은 다른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조화 또는 평행적일 수 없는 것은 벌써 그 행위가 문제를 제기한 데서 볼 수 있다. 이 두 질서는 물론 연속선일 수 없다. 그것은 마주서 있다. 마주 대치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내 존재성 그리고 내 행위는 언제나 도전을 받게 되며 그로써 책임적인 존재가 되며 그 행위는 결단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 새 질서, 무조건적인 은혜의 현실은 기존질서에 안주하려는 사람을 그대로 놔 두지 않는다. 이 질서는 기존질서, 그 안에서 의무와 권리라는 연쇄적인 틀 속에서 형성한 정의관을 자명적인 것처럼 절대화하여 자기를 내맡기고 기계처럼 살면서 한편 자유니 인권이니를 구가하려는 인간들에게 "정말 네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이 된다.

이 저항의 노동자는 지금 이 주인을 통해서 두 질서를 보았다. 의무와 권리의 질서, 또 하나는 은혜와 사랑의 질서이다. 그는 이 두 질서 앞에서 의무와 권리의 질서를 선택하므로 그 다른 질서에 도전한다. 이에 대해서 그 주인은 정말 너는 의무와 권리의 세계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선택했느냐? 그렇다면 너는 네 주장에 너를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네 권리나 찾아가면 될 것이 아니냐 "내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선언한다. 이 주인의 물음은 결국 심판이 되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는 선언은 그 항의자의 선 자리를 규탄한다. 이 항의자의 불공평은 정의를 표방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기점으로 한 나의 욕심의 발로이다. 그의 항의는 절대적인 정의에 선듯 하나 실상은 자기 중심적인 욕망에서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만일 이 항의자가 자기에게 돌아올 정당한 권리만을 생각했다면 계약된 삯을 받으면 만족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정당한 권리의식은 남과 비교함으로써 흔들려 버렸다. 그가 만일 단독직으로 주인에게서 약속된 삯을 받고 나갔더라면 그에게 항의의 근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후에 온 사람이 덤으로 받는 것과 비교할 때 그 만족은 붕괴되고 불평과 원망으로 전락됐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심정과 같은 것의 발로이다.

이러한 심정에 근거한 항의는 곧 자기에게 적용될 것이다. 많은 실업자 중에 그들만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일할 기회를 갖지못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너 보다도 먼저부터 일자리를 구했는데 왜 너만이 일할 기회를 가졌느냐?"는 항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아마도 그 책임을 그 주인에게 전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같은 불공평을 정의로 내세우려면 주인이 일꾼을 부를 때 자기보다 먼저부터 기다리고 있는 실업자부터 고용하라는 운동을 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자기의 권리를 찾고도 남의 권리마저 침범해서 더 뺏으려는 모습만 보인다.

이 주인은 "네 권리나 찾아 가라!"는 선언 다음에 마지막 질문을 주어 보낸다. "나의 착한 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왜 이 사람에게는 분배의 불공평만 보이고 일한 것과 관계없이 그 날의 생활비를 받게 된 저 사람의 경우를 기뻐할 심정은 없을까? 그것은 물론 나 중심적인 욕심이 남이 살게 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 항의자의 자기 중심적인 불평 같은 것을 선동해서 그것을 무기로 삼아 가진 자의 것을 뺏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를 많이 봐 왔다. 인도의 '비노바'는 감옥에 갇혀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너희는 한 미친 엄마와도 같다. 너희는 대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망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미친 엄마는 제자식마저 망하게 하는 결말을 가져올 것이다.'너희는 한 혁명을 꿈꾼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이 증오와 유혈 없이는 안 된다고 본다. 너희는 도대체 혁명가들이 아니다. 힘 있는 지들의 자리에 불행한 자와 무력한 자들을 대치하려는 데 불과하다. 난 이런 것을 혁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공산혁명은 가진 자의 것을 폭력으로 뺏는 혁명임을 단정하는 대신에 그가 전개하는 토지희사(Bhoodan) 운동은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의 것을 뺏는 운동이 아니라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주는 운동이었다. 그는 없는 자에게 뺏을 것을 선동하는 혁명에 대해서 가진 자에게 줄 것을 호소하는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비유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위의 두 가지 '혁명'에서 어느 쪽에 속한 것이냐고 묻는 다면 "주는 혁명"의 질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 인이 사회참여를 한다면 없는 자에게 뺏을 것을 선동하는 길이 아니고 가진 자에게 줄 수 있도록 호소하고 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노바'에게 공산당은 '어떻게 지주에게 자살행위를 기대할 수 있는가? 누구도 스스로 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심리원리에 모순된다'고 했다. 이 말은 인간의 일면을 확실히 파악한 말인지 모른다. 사실상 인간사회의 문제는 '가지자-뺏자'라는 욕구가 팽팽한 긴장을 이룬 데 있다. 공산주의도 뺏음으로 균형을 찾자고하고 자본주의도 보다 더 갖자 뺏자의 테두리 안에서 성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비합법적인 것과 합법적인 차이뿐이랄까. 민주주의라는 것도 이점에는 결국 합법적으로 재간껏 뺏을 수 있는 무대 이상의 의미가 없다.

무조건 주는 것으로 성격화된 이 비유의 하느님의 나라는 현존한 어떤 사회 체제나 이데올로기와 결부시킬 수 없다.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사회질서의 대립이라는 것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심리원리에서 볼 때 비현실적인 환상과도 같다.

비노바는 그의 운동의 근거를 인간의 선과 본성에 두고 있다. 즉 인간의 선한 마음을 개발하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심리원리'에 거점을 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미래적인, 오고 있는 새 질서, 이제 주어질 질서이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현재의 어떤 인간을 대표한 선심이 아니다. 아니! 그는 새 질서를 가져올 주인공이다. 이 새 질서는 현재의 모든 질서의 종말을 가져올 사건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저들은 이 오고 있는 새 질서를 앞당겨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의무와 권리의 질서 한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노동하고 의무를 다한다. 그러면서도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권리로 생각지 않고 주어진 것, 즉 은혜의 선물로 받는다. 그렇게 받은 것도 권리화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은 이 받은 것을 권리로 생각지 않고 이것도 남에게 값없이 주어야 할 것으로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의 관계에서 계약관계의 의무만 이행하므로 자기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는 끝없이 주어야 하는 사랑의 의무에서 빚진 자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현존적인 생존권과의 충돌을 가져온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기존사회질서가 절대화하는 것과 싸우면서 이제 올 새 질서를 증거하고 그것을 앞당겨 실현할 의무를 소명으로 한다. 저들은 가짐으로써 산다는 현실에서 줌으로써만 산다는 주장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참여는 기존질서의 "정당한 이유"의 저항을 받을 것이며 오히려 이방인 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종당에 그 나라가 오고야 말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 위에 선 이 싸움을 포기한다면 그순간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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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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