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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기독교인은 도적맞고 있다
루가 16, 1-8

예수께서 한 이상한 예화를 들었다. 한 부자가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한 청지기(지배인)를 두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그 주인을 배신하여 그 재물을 낭비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주인은 분개 해서 추방하기로 선언하고 그에게 결산하도록 명령했다. 당황해진 이 청지기는 이때부터 처참해질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캄캄하여 생각다 못해 마침내 간교한 꾀를 생각해 냈다. 대개 한 악은 두 악을 낳고 한 거짓을 가리우기 위해서는 보다 더 간교한 거짓이 필요하게 되는 것인데, 자기의 과오 때문에 오는 자기의 운명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이 청지기는 자기의 잘못을 감추려다가 보다 더 무서운 사기죄로 뛰어든 것이다.

그는 그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청하여 그들의 채무를 그 정도에 따라서 마치 자기 재산과도 같이 탕감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 같이 간교한 방법으로 저들을 사귐으로 해임 후에 저들의 보응을 받으리라는 간사한 목적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정말 전률할 만한 무서운 범죄이다. 약하거나 몰라서 지은 죄는 그래도 동정할 여지가 있으나 이같은 고의적인 범죄는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은 그 사실을 알고 오히려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드신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라고 주인의 칭찬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이것을 도덕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큰 문제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덕의 교과서로 사용할 수는 없다. 이것은 못된 실리주의를 그대로 시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좋고 목적이 좋은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본래 예수는 이런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말라"라는 것은 십계명에서 뚜렷이 선포된 것이요 남의 것을 탐내는 정도도 용인하지 않거니와 그는 언제나 목적과 수단은 다 함께 중요하여 일의 성과보다도 그 동기를 다른 무엇보다도 문제로 하신 것이다. 아나니아 부부는 오히려 좋은 목적으로 자기의 논밭을 팔아서 복음 운동에 바쳤는데 그들은 단지 그것을 통해서 약간의 명예를 사기하려다가 그만 저주를 받아서 즉사했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유명한 불상사로 잘 알려져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예수는 그의 사기적인 지혜를 칭찬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목적은 분명히 다른 데 있었다.

도대체 예수는 세상에 도덕을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도덕은 자명적인 것이다. 그런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을 일이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런 도덕이나 법률이 인류를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악마가 발악하는 세상에서 이기어 나아가기에는 도덕률은 너무나 무능한 것임을 그리스도는 물론 잘 아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도덕을 가르치는 책은 아니다. 칸트는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이 마음 안에 반짝이는 도덕률에 대해서 황홀한 찬사를 올리지만 성경은 도덕을 향해서, 도덕지상주의자를 향해서 오히려 "죄"라고 선포하고 도덕을 고집하면 할수록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항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 까닭은 도덕주의는 자기의 양심을 왕 위에 올려 놓고 거기에 지상의 권위를 줌으로 자기 생활 안에는 다른 아무것도 간섭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의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월권행위를 견제하는 역할을 겸비한 철학을 세 운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면에 인간이성의 한계를 그음으로써, 인간의 울타리를 쌓음으로 하느님의 간섭을 배격(보이콧트)한다는 무서운 교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예화를 도덕적인 교훈으로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칭찬하신 것은 무엇일까? 예수는 필시 이 불의한 사실에 관한 예화를 통해 도덕보다 높은 세계,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세계를 보여주려고 한다. 대체로 어떠한 악이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악은 악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언제나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악을 악으로 대하면 그 악이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히려 배가된다. 참 악을 정복하는 길은 악을 공격하고 비난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이 가지고 있는 선을 빼앗아야만한다. 즉 악에게 사로잡혀 있는 선을 해방시킴으로써 악은 스스로 정복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현실 안에 사로잡혀 있는 도덕 이상의 선한 것을 발견하신 것이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의 편모이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맨처음의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이었다. 하늘나라의 선포는 이 세상의 모든 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 하늘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을 화평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게할 것이다.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질서는 물질중심의 질서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물질로 울타리를 만들어서 서로의 한계를 짓고, 그 안에서 스스로 왕 노릇을 함으로써 사람이 받는 신성한 의무를 비웃는다. 하늘나라에는 이런 물질중심적인 질서가 용인될 수 없다.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세계에 네 것 내 것이라는 엄격한 한계가 용인될 수 없다.

하늘나라에서는 이 모든 물질의 질서가 보다 더 영광스러운 질서 앞에 복종되어야 한다.

이 비유 중에서 주인을 기쁘게 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 그 안에 내포된 하늘나라의 편모일 것이다. 친구를 사귀기 위하여 네 것이니 내 것이니 하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는 물질에는 지배 받지 않는 것처럼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 같이 마음대로 이용하여 저 빈궁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제했던 것이다. 그 청지기는 물론 악 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최소한 이와 같은 선을 이루기 위한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같은 사실이 그 불의한 청지기의 손에서 불순 한 목적과 사기적인 수단으로 되지 않고 빛의 아들들의 손에 의해서 의로운 목적으로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승리로써 이룩되었다면 얼마나 선할까? 주인을 속여서가 아니라 주인을 사랑으로 정복함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으로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게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물론 불의한 지배인의 행위가 그대로 천국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그 죄는 끝까지 악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구부러진 선, 더럽혀진 선인 것이다. 주인은 그 청지기의 지혜를 칭찬한 것이지 그를 의인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그 주인의 칭찬, 그 비유를 들은 그리스도의 뜻은 그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칭찬한다는 소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비유 다음에 "이 세상의 아들들은 빛의 아들들보다 지혜가 있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나는 그속에 담긴 주인의 뜻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참 저 놈은 죽일 놈이라도 그하는 일은 참 잘하는 일이다. 아! 어쩌다가 저같은 좋은 일이 저런 악한 놈의 불의한 목적에 농락을 당하고 있나!" 이 칭찬 중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 저놈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선한 일을 빛의 아들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라는 적극적인 요청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선한 사명을 지니고 소망도 갖고 있지만 몸이 허약하여 병석에 누워있는 자식을 가진 아버지가 거리에서 용감하게 불의를 행하는 불한당의 건강을 칭찬하는 심정과도 같다. "아, 참 건강하다. 저놈의 건강이 내 아들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은 악이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악을 정복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악한 조류에 휘감겨서 쓸려가고 있다. 소위 '사회악'을 문제로 한다는 것이 오히려 악을 조장하는 결과를 내고 있다. 정치계로 나가는 기독교인은 대개는 이런 것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길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자마자 그 악에 합류되지 않으면 공연히 맹목적인 발악으로 도전해서 마침내 그 악을 배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실의 여러 악 중에서 대표인 예로 공산주의를 들어 보자. 공산주의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악의 대표적 예이다. 이것에 대한 빛의 아들들의 태도들은 어떤가? 그것은 거의 일관되게 반발적인 반항과 도전이었다. 저들은 공산당이라면 이를 가는 것으로 애국심을 표하였다. 저들의 최대의 슬로건은 저 악당들을 때려 부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고집한 결과 무슨 소득이 있었든가? 공산주의는 오늘날 전인류를 불안하게할 강한 매력을 가지고 확장되고 있다. 매력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선한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의 비젼은 선한 것이다. 저들의 혁명은 확실히 통쾌한 선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저들은 자본주의의 인권 유린과 착취 그리고 이기주의와 거기에 따르는 향락주의를 타파하고 공동체적 삶을 꾀했다는 것은 분명 선한 것이다. 물론 저들은 불의한 청지기와 꼭 같은 사기꾼들이다. 공산주의란 평소에 자기의 임무를 게을리하다가 필경 이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으니 최후로 생각해 낸 것이 "세계 무산대중을 위하여"라는 깃발을 들고 남의 토지와 재산을 마치 자기의 것인듯이 마음 대로 분배한 것인데, 그 동기는 결국 자기 구출에 있었던 것이다. 저들의 악행은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 속에 갇혀 있는 선한 것을 함께 증오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저 주인과 같이 저들의 한 일을 칭찬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저들과 싸워야 한다. 그 힘들을 멸하여야 한다. 멸한다는 것은 그들의 힘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선을 그 악한 것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 선을 해방하는 길은 저들의 선보다 나은 선을 이루는 것외에 다른 길은 없다.

만일 오늘날의 빛의 아들들이 저 세상의 아들들만큼 지혜가 있다면, 만일 오늘의 저 투지와 저 헌신과 저 목표와 저 실적이 무자비와 사기와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빛의 아들들의 손으로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승리로써,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아!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실천을 도적 맞고 있다. 저들이 잠자고 있는 동안 저 불의의 청지기는 그리스도교에서 아름다운 이상을 빼앗아 자기네의 구호로, 깃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하늘나라의 비젼이 유린당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이, 자유가, 평등이, 저 악당들에게 사로잡혀서 저들의 삶의 터를 닦는 데 이용되고 있다. 저들은 저 도적한 선한 것을 미끼로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불쌍한 민중들을 낚고 있다. 저들은 온 세계를 무대로 마음대로 사기치고 있다. 공산주의를 이렇게 한 책임은 그리스도교에 있다. 대체로 참 선생이 없을 때는 거짓 선생이 나타나고, 참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거짓 선지가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에서 다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던 그 아름다운 것을 버리고 권력과 야합하여 특권층으로 안주했고 자본주의에 아첨하여 이기주의로 떨어졌다. 세상에는 공산당이 배양되었고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군정청(軍政廳)에, 정부에, 모리배에게 웃음을 파는 동안 공산당은 사회의 혼란과 빈궁을 미끼로 그리스도교의 슬로건을 내 걸었다. 노동자에게 주권을, 농민에게 토지를, 마치 자기 물건 같이 내어 준 다고 약속했다. 우익 지도층이나 목사가 자기의 이해득실에 따라 도시로 도시로 몰려 드는 동안 공산당은 대학을 나와서 시골로 시골로 가서 주인 없는 곳에서 왕노릇했다. 분명히 저들은 용감했다. 자기의 주의(主義)에 대해서 충실했다. 비록 자기류(自己流)나마 정의감이 불붙었다. 사회악에 대해서 통열한 수술칼을 가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주인이 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할 것이 염려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들이여! 이제라도 일어나서 잃었던 제 것을 도루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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