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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빌리 그래함의 집회를 경청한 한 불신자가 그의 감상을 이야기하고 나서 질문을 던졌다. "빌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하고 그 구원에 대한 정의로 '영적 구원'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어냐는 것이다. 그는 첨부해서 흔히 소개된 대로 예수를 믿으면 사후의 영생을 말하는 것이냐고 했다.

성서에는 영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는 육체에 대한 영, 즉 육체는 다 썩어 없어지나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혼불멸설은 없다. 성서에서 영은 결국 삶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말이고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이란 생명 자체인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 있는 삶을 뜻하며 육적이라면 이 하느님과 상관 없이 그와 차단된 삶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는 나의 문제이다. 따라서 오늘의 삶의 구원 없이 사후의 구원은 따로 없다.

그러므로 오늘의 세계 그리스도교 대회의 주제는 어제 내일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이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매일처럼 '악한 것에서 구원해 주십시요'라고 하나 놀랄만한 것은 악한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하지 않는다. 그것을 기억해도 대체로 종교적으로 추상화해서 죄라고 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악한 것이란 리얼한 현실이다.

악한 것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장(context)이다. 그것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즉 그것은 명사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형용사적이다. 악은 따로 없고 악한 자, 악한 힘, 악한 조직, 악한 의지만이 있다. 그것을 크게 성격화하면 나를 본래대로 못 살도록 참 삶과 차단하고 나를 예속시키고, 마비시키고, 감금하는 힘이다. 그런데 그것의 구체성은 각 사람, 각 단체, 각 민족, 각 시대마다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병일 수도 있고 어떤 개인일 수도 있고, 어떤 지적 관념일 수도 있고, 어떤 정치적, 사회적 조직일 수 있고, 종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원하면서도 내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고 어떻게 잘못돼 있는지를 모르고는 그 기도는 무당의 주문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다음 구원해 달라는 뜻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치료해 달라는 뜻이 있다. 내게 고장이 있다. 이상이 있다. 이것을 다시 제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게 구원이다. 오늘 영어의 Salvation은 라틴어의 salvus에서 온 것인데 그것은 먼저 치유의 뜻도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뜻이 있다(이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구출한다는 뜻이다.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 외적에게 체포되어 억류된 것을 구출하는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에 세가지 병이 있다. 하나는 그저 병을 고쳐 주는 일이다. 생리적으로 고장난 것을 예수가 고쳐준다. 이것도 구원의 한 차원이다. 하나는 그 병을 고치기 전에 죄를 사해 주었다라는 말씀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내적으로 속박된 것에서 풀어 놓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또 하나는 "사탄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으로 그를 속박한 밖의 힘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있다.

병에서 신음하는 자에게 병을 낫게 하는 것도 구원의 한 차원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치유된 자들은 다 죽었다. 그러면 병 낫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한계가 있는 구원을 말하는 게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적 병이다. 양심의 고통, 어떤 컴플렉스, 이지러진 마음, 공연한 불안과 남을 향한 증오심 이런 것들은 나를 스스로 조정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한 그에게 구원이 없다.

성서는 이런 것을 통틀어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죄에서 놓임을 받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이상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국한한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병들게 하는(육체적, 정신적으로) 나를 속박하고 나에게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을 성서는 사탄이라고 하는데 현대 말로 하면 나의 컨텍스트이다. 즉 이 사회 전체에 구조적으로 된 힘으로써 나를 완전히 예속시킨 것이다. 구조적으로 부정한 사회에서 나 홀로 깨끗할 수 없다. 전체 공기가 탁한데 나 홀로 맑은 호흡을 할 수 없다. 이런 것을 통털어 성서는 이 세계, 이 세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 문제, 내 책임만이 아니라, 이 세대의 죄의 공범자이다. 그러므로 이 세대, 이 세계, 이 역사의 구원 없이 개인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궁극적 구원은 이 세계, 이 역사, 이 세대의 구원, 말하자면 전체의 구원과 결부돼 있다.

우리가 "나를 구출해 주십시요"라고 할 때는 "이 악한 것이 지배하는 이 세계를 구해 주십시요"라는 뜻이 포함돼야 한다.

결국 이 세 가지는 유리되지 않는다. 성서는 그 사실을 귀신들린 자에게 보여준다. 가라사 땅의 한 청년이 귀신이 들렸다. 악령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로써 자립정신을 상실했다. 제 정신을 잃으므로 제 몸에 계속 상처를 입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굵은 밧줄로 비끌어 맨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이같은 자에게 먼저할 일은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래야 제 정신이 되고 그럴 때 건전한 육체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 사람에게 사탄을 내어쫓는 일을 한다.

구원이란 어느 부분의 치유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 본래의 삶이 되게 하는 길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는 '악한 것들'에게서 구출될 때 가능하다고 보였기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럼 우리에게 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나? 많은 사람들은 오늘의 과학기술의 발달로써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다. 즉 과학기술로 구원 될 수 있다고 호언해 왔었다. 여기에는 사실이 있다. 의학의 발달로서 사실상 인류가 얼마나 많은 병을 물리쳤는가? 전염병의 횡포,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 들었다. 불치의 병의 범위가 좁아졌다. 의학의 발달이 인간 구원의 한 차원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의시들은 구원의 역사의 일익을 담당하는 셈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시간, 공간의 숙명성을 넘어서 삶의 가능성을 많이 넓히고 있다. 분명히 보다 잘 살게 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그런 뜻에서 과학자는 구원역사의 일익을 담당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다음 세 가지 사실에 의해서 오히려 인간구원을 제외하고 있다.

첫째는 기술만능을 호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정신을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을 박탈해 버렸다. 약이 잘 듣는다는 과신에서 제몸을 가꿀 생각을 포기 함으로써 완전히 날로 더 그것에 의존하게 해 버렸다.

둘째, 이와 관련해서 이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일부층이 그 기술을 독점하게 돼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기술 세계는 우리에게 신화의 세계 만큼 애당초 모르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셋째, 이보다 더 중요한 것 그리고 기본적인 것은 이 선할 수 있는 기술이 악한 힘에게 점유당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독점 자본, 독점 권력이다. 의학은 발달했으나 세계인구의 몇 퍼센트밖에 그 혜택을 입을 수 없다. 그것은 자본에 그 기술이 매수되어서 돈 없는 사람에게는 공중누각이다. 가령 세브란스병원이 기독교 정신으로 된 것인데 거기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되나? 누가 이 본래 정신을 뺏어갔나? 또 오늘의 약은 자본가들의 손에서 얼마나 메 스미디어를 타고 사람을 기만하나? 이 약도, 저 약도 만병통치, 그래서 그저 그 값싸다는 약들에 완전히 인간의 생리는 변질되어 이제는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자체로 돼가며 이른바 약의 신화적 시대로 돌입했다. 그래서 한 약은 병을 주고 그 다음 약은 그 치료를 호언하게 됐다. 오늘의 과학기술이 대부분 누구의 손에 무엇을 위해 사용되고 있나? 이제 이 인류, 이 세계를 한 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단추가 누구의 손에 쥐어졌는가? 왜 기계의 수명은 짧아지나? 왜 여자의 나이론 양말은 한 주에 몇차례 갈아 신게 됐나? 기술이 모자라서? 아니다. 말하자면 이 선할 수 있는 것이 악한 힘에 노예화된 한 그것은 부분적 구원에 참여하나 동시에 그것을 저해하는 힘으로 여전히 등장한다. 이것은 정치에서도 그렇다. 정치기술이 발달해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열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기술이 어떻게 도용되고 있는가? 하여간 우리는 이같이 보이는, 보이지 않는 악한 힘에 노예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내 선한 의지도 그대로 관철할 수 없게 됐다. 그러므로 '악한 것에서 구원해 달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것에서 놓이기 전에는 구원, 개인의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뜻을 보자. 예수의 설교의 중심은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주기도에서 '나라가 임하게 하라'고 한 것이 구원보다 앞선 것은 이 악한 세대가 없어질 때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죄를 용서해 주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을 누가 하나? 이 세계의 구원은 세계 자체는 불가능하다. 갇힌 자의 구원은 그밖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는 세계가 있기 이전에 있던 이로 이 세계에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죄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안에 갇히지 않은 자, 그것에 매이지 않은 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참 옳은 신앙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하는 것은 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마술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이다. 이른바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한 모습을 갖추면 된다는 것인데—특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기울이는데—그것은 대체로 기도를, 내 열심을 무당종교의 주문이나 정성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구원 역사에 있어서의 나의 책임의식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구원 받겠다고만 생각하고 '악한 것에서'를 쏙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사가 능해도 환자가 그 병에서 낫겠다는 의지와 노력 이 있을 때 치병이 가능하다. 당뇨병에 걸린 환자가 당분을, 간장병에 걸린 사람이 술을 못끊으면 그 치료는 불가능하다. 감금된 사람이 바로 감금됐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서 뛰쳐 나올 의사가 없는 한 그 구출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구원 구원하면서 내 삶—하느님과의 관계—을 잠식하고 나를 하느님과 차단하는 것을 한손으로 점점 걸머 쥐고 늘어지면서 그 성취를 어떻게 바라겠는가? 이 세계는 분명히 악한 것에 의해 노예화되어 있는데, 그런 것을 타파하려는 싸움 속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악한 것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가 진정일 수 있겠는가?

정말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자는 이미 내가 감금된 악한 것의 감옥의 문은 열렸다고 믿는 자다. 따라서 그에게는 구원이 무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의 길에 나서므로 구원받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자리에서나 내 가진 기술로 능력으로—청소부에서 의사,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이 병든 세계를 치유하는 구원의 역군의 의식으로 그릇된 것을 나만은 바르게 하여 고치고 그리고 참 삶을 저해하는 악한 노력과 싸워서 그 벽을 무너뜨리는 역군의 사명 의식에서 구원의 역사에 투신 함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악에서 구해주십시요 라는 기도가 거짓말이 아니며 또한 그것은 이기적인 소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가 임하소서 - 악한 것에서 구원해 주옵소서'

이 기도는 이 세계, 질병이 있고 인간의 고뇌가 있고, 악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한 역사와 인류의 궁극적 기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하나의 소원으로 간직한 자가 아니라 여기 참여한 자를 일컫는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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