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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성서를 한마디로 성격화한다면 구원론이라고 하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회관, 사크라멘트 등 많은 명제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피차 긴장된 관계를 갖고 있으나 결국 구원론에 귀착하는 명제들이다. 성서의 구원론은 결코 고리로써 표현된 것처럼 그렇게 몇 마디로 포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는 까닭은 성서는 사변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려는 교본이 아니라, 역사적인 증거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편의상 '성서의 구원론'이라고 부르나, 실은 성서는 '논'(論)도 '관'(觀)도 없고 오직 그때 그때의 역사적 상황에서 경험하고 믿고 결단한 것을 기록했다. 따라서 그 표현이나 강조점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해 사이에는 모순도 많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모순을 논리적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전체를 일원화 해버리려는 태도는 오히려 위험한 독단에 흐르기 쉽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구약, 처음 교회 신학 그리고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구원 관에서 성격적인 면만을 개관하고 우리 한국교회의 재래적인 구원에 대한 지식이 옳은 것인지를 그 결론에 의해서 물어 보려고 한다.

1. 구약의 구원관

구약에서 구원에 해당되는 말 가운데 신약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파다'(Pada)와 '가알'(Gaal)이 있다. 파다는 그 근원이 변법에서 왔다고 하는데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의 손에 넘어간 자기 물건을 어떤 다른 것을 줌으로써 도로 찾아올 수 있는 법이다. 구약은 이 용어를 구원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어떤 사정으로 어떤 다른 세력 밑에 소유처럼 억압된 이스라엘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 자유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 말로 이것을 '속량'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주로 신명기와 그 계열에 속한 문법에서 사용하고 있다(신명 7, 8. 민수 5, 3-5 등). 이에 대해서 가알은 가족법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어떤 궁지에 몰려서 남의 손에 들어간 특정한 가보나 또는 인질이 되어버린 가족의 일원을, 다른 것을 대신 지불함으로 도로 찾아올 의무와 권리를 표시하는 말이다. 구약은 이 개념을 야훼와의 관계에 적용함으로써 하느님은 그 자손인 이스라엘을 어떤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다른 세력에 구속된 상태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으로 사용했는데 이 용법은 주로 예루살렘 전통에서 사용하고 있다(레위 2, 24-25. 시편 78, 35 등). 그런데 파다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데 대해서 가알은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계약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어떤 희생을 대가로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구원한다는 필연적인 신념을 내포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두 가지 개념은 사변적인 구원관이 아니라 둘 다 함께 야훼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해석이라는 점이다(위에 예증한 구절들을 참조). 이 사실을 하나는 순수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고 보고 다른 하나는 계약에 의한 것임을 더 강조한 것이다. 저들은 애굽이라는 구체적인 세력에서 구출한 사실에서 구원의 의미를 성격화했다. 그러므로 미래적인 구원을 말할 때에도 이러한 구원, 즉 외적인 상황에서의 구원으로 이해했다. 애굽에서 구원한 것 같이 앞으로의 참 구원도 이렇게 억압하는 세력에서 구원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미래적인 구원을 강조한 것은 예언자들이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2이사야이다. 그는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반드시 구원할 것이라고 예언한다(51, 11). 이 예언자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야훼가 이 민족과의 계약에 의해서(예루살렘 전통) 반드시 구원할 것을 믿으며 그 구원은 이스라엘을 억압한 세력들을 도말함으로써 이 민족이 약속된 땅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43, 1 이하. 54, 10. 55, 4).

이상에서 본 구약의 구원관의 특징은 내적 즉 죄와 같은 것에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은 점과, 둘째는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민족,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구약에 개인이 어떤 고난에 있는데서의 구원을 말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은 결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대표 또는 포함한 개인이다).

2. 신약의 구원관
1. 바울

신약에서 구원론을 가장 핵심적으로 전개한 것은 바울이다. 그의 그리스도론도 실은 구원론이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서 유대교를 떠났으며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서 그리스도교에 전향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구원론은 그의 신앙론과 직결돼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로 믿고 그의 죽음을 우리를 '위해서'(로마 2, 6-8. 8, 32.14.15) '대신해서'(고후 5, 21. 갈라 3, 17) '(죄)값으로'(고전 6, 20. 7, 23, 갈라 3, 3. 4, 5) 바쳐진 제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제사-율법적(kutisch-juristisch)인 카테고리에 속한 것들인데 이것은 바울이 창작한 표현이 아니라, 이미 팔레스틴 교회에서 채용된 것으로 구약-유대교의 사고를 이어받은 것이다. 바울은 그 구원관에서 하느님과의 계약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과의 계약은 지양되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과의 계약이 체결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계약사상에서 권리 의식으로 발전한 유대교의 공로사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자유한 은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구약과 비교할 때 바울의 구원관의 특징은 실존적으로 파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죄, 율법 그리고 죽음에서의 자유가 직결되어 있다(갈라 3, 10-4, 11). 이러한 것들은 바울에 있어서는 우주적인 힘이다. 각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써, 이러한 힘들의 노예상태에 있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사람은 먼저 이 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노력(율법적)으로 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하느님의 일방적인 구원 행위의 사건이며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각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 린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이 그의 의인론(갈라 3-4. 로마 1-8)과 화해론(고후 5, 14-6, 2)에서 여러 각도로 논술되어 있다. 그에게는 인간존재 전체로서의 구원이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인간에 대한 이원론적인 용어(영과 육)를 쓰면서도 영도 아니요, 육도 아닌 몸 구원을 강조한다(로마 6, 12. 고전 15, 35 이하 참조). '몸'이란 전체로서의 인간존재를 말한다. 불트만은 바울이 말한 몸을 분석함으로써 "사람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곧 몸이다"라고 했다. 사실상 그는 '나'와 '몸'을 일치시키는 경우가 많다(고전 13, 3. 9, 27. 필립 1, 20). 이것으로 그는 개인의 구원이란 영이 육에서 해방된다거나 또는 육 자체가 부활한다는 사고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의 구원관은 결코 소위 개체의 구령(救靈)을 뜻하지 않는다. 그의 구원관은 철저히 '구속사'적인 구조에서 전개되어 있다. 그는 먼저 유대인 다음에 이방인이라는 구약—유대적 원칙을 그대로 전제하고 유대인이 불복종으로 먼저 이방인에게 구원의 손이 뻗쳤다고 해석하며 종당에는 유대인까지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인류 전체의 구원을 눈앞에 보고 있다. 비록 그가 개인의 구원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전체 속의 한 지체로서의 개인이다. 구약과 다른 점은 이 개인은 한 민족이 단위가 아니고 전 인류에 직결되었다는 점이다.

바울이 이 세상(세계)을 말할 때에는 악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세계를 말할 때에는 우주론적인 세계를 뜻하지 않고 원칙적으로 인간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의 구원론을 우주적인 사건으로 확대한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이 이 세계에서 탈출하는 구원을 말하지 않고 그 구원은 이 세계의 운명을 포괄하는 사건으로 본다. 그런 뜻에서 "모든 피조물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 19)라고 한다. 이 말에서 주목되는 것은 피조물 자체가 구원을 지니고 있다거나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들'말하자면 인간의 완성 또는 새로운 인간존재의 탄생을 위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우주적인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인간 구원에 그 초점을 둔다.

바울은 이러한 구원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인의 참예를 통해서 진행된다고 보며(로마 10, 14 이하. 고후 5, 19. 6, 2) 인간은 이 사건에 참예함으로써 구원될 것을 믿는다(고전 12, 12-13. 로마 5, 12 이하). 그러나 궁극적인 구원은 미래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건이 참예하는 현실은 오고 있는 새 가능성[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영광의 몸이 되게 하는(필립 3, 21)]에 자기를 개방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뜻에서 "그는 구원을 희망 안에서 얻었다"(로마 8, 24. 5, 10)라고 한다.

2. 요한

예수의 십자가 속죄의 사건이라는 주장이 후퇴되어 있다. 즉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과거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현존의 그리스도가 곧 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육'의 뜻을 강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1, 14). 이 고백에서 보는 대로 그가 역사적인 존재로 됐다는 사실이 벌써 은혜와 진리를 의미하며 그 은혜와 진리가 구원의 길을 결정했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은 이 세상을 어두움, 거짓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빛이요, 진리라고 한다. 그것은 우선 그리스도가 세상의 자명성의 정체를 폭로하고 심판한다는 뜻에서 빛이요 진리이다. '나는 본다' '나는 자유하다' '나는 하느님을 안다' 하는 바로 그것이 거짓이요, 그렇기 때문에 죄라는 사실을 밝힌다(9, 41. 9, 39. 5, 37. 8, 19. 15, 21). 인간들은, 허무한 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보장을 구하고 있음이, 즉 하느님대신 피조물에 의지하고 있음이 그로 말미암아 폭로 됐다. 이와 동시에 그가 온 것은 참 빛(1, 9), (참)진리(18, 37)를 알게 함으로써 사람을 어두움 속에 있지 않고 생명을 얻게 한다(10, 10). 그것은 그가 인간의 참 근원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함으로 이다. 그것은 바로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을 알고 또 그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17, 3)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구원(soter tou kosmou)이다(4, 42). 이로써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상황에 놓였다(1, 1-18). 즉 인간은 두 가능성앞에 서게 됐다. 하느님께서 주는가능성이냐, 피조적인 세계가 제공하는가능성이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곧 어떤 것에 속하느냐(einai ek)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진리에서 난 자(18, 37) 또는 하느님께 난 자(7, 17)에 대해서 세상에서 난 자(8, 23) 땅에서 난 자(3, 31) 아래서 난 자(8, 23) 또는 악마에게 난 자(8, 44)를 대립시킨다. 세상에서 난 자(그것에 속한 자)는 죄 안에서 그대로 죽게 될 것이다(8, 21-23).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조건은 이 세계에서 자유하는 일이다. 이 자유는 진리를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8, 30). 구원과 저주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능성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고 거기에 참예(믿음)하느냐로서 결정된다. 이런 뜻에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3, 18) 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으며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5, 24)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구원은 하느님에 의한 것임을 전제하면서도 구원이냐, 아니냐의 열쇠는 사람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르고 그것에 대해서 자기를 폐쇄하면 스스로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12, 47). 말과 더불어 믿지 않는 경우는 본래 상태대로 '머문다'(menei)라는 표현들로 일관한 것은(3, 36. 9, 41)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다.

3. 그밖의 편지들

약간씩 해석의 차이들이 있으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확증이 주어졌다는 입장은 같으며 요한이나 바울과 비교할 때 그 구원의 완성은 미래적이라는 면이 더 강조돼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허무한 것에서 구해냈다(에페 2, 1 이하. 딤후 4, 18. 벧전 1, 5). 그러나 '영광'의 구원은 '장차'(에베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디모데) '영원한 도시를 찾을 때'(히브리)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것은 아직 온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과거의 그리스도의 속죄적 구원의 사건과 장차올 구원은 긴장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뚜렷이 구분해서 예수의 고난은 구원의 첫 단계로서 과거(죄)에서의 해방을 가져 왔고 둘째 단계는 죄(과거)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구원이 따로 있다고 한다(9, 20). 그것은 미래적이다. 그는 이 미래적 구원에 초점을 둠으로써 믿음에 어떤 규정 없이 순수 미래를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한다(11, 1). 묵시록은,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에 속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구원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소유격을 씀으로써(7, 10. 19, 1)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역시 미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써 그 끝을 맺는다.

4. 공관복음서

구원관은 철저히 종말적이다. 이 구원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제 목숨을 구원 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마르 8, 35 병행). 그것은 하느님만이할 수 있는 일이다(마르 10, 26 병행).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어 나갈 것을 권한다(마르 13, 13 병행). 예수는 잃은 자를 구원하려고 왔다(루가 19, 10). 사실상 예수는 과감하게 당시의 죄인들, 소외된 자들과 사귐으로써 당시 종교사회의 계급적인 담을 헐어버렸다—마치 구원의 사실이 이미 현재화한 듯이. 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현재적인 선언도 전해지고 있다(루가 5, 34 병행. 마르 10, 52 병행. 루가 7, 50. 17, 19). 그러나 참 구원은 개인을 그 고통이나 죄에서 구출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이제 올 새 세계(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에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고 있는 구원이다. 이것은 인간 전체에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구원 자체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오직 가난한 마음으로 미래로 향한 개방된 태세를 요구할 뿐이다. 회개하라는 것은 윤리적인 청산을 뜻하지 않는다. 오고 있는 구원(하느님의 나라)에로 전향하라는 것이다(닷드가 회개의 외침을 오잔치 초대의 비유의 '모든 것이 준비 됐다'와 같다고 한 것은 옳다). 그럼 공관복음서에는 구원이 전제된 속죄 사상이 있는가? 예수의 말씀으로 두 곳에 전해져 있다(마르 10, 45; 14, 24 병행). 그러나 루가에는(22, 27) 그런 사상이 전혀 없으며 그 밖에는 공관복음서 전반을 통해서 이런 사상이 전혀 전제돼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팔레스틴의 전승으로서 처음 교회의 케리그마에 속한 것이지 예수에게 돌릴 수 없다는 학자들의 결론은 타당하다.

3. 결론

이상에서 퍽 다양한 성서의 구원관을 개관했다. 이것을 어떤 교리로서 일원화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 기본적인 특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본다면,

(1) 구원은 하느님에게 속한 문제이다. 이 말은, 인간 자체 안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주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도, 종교적인 노력도 구원의 보장은 못된다. 이것은 공관복음서, 바울, 요한에서 분명하다.

(2) 구원은 어디까지나 미래적인 것이다: 이 말은 기존적인 어떤 것도 구원의 보장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는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죄)에서 해방되어 미래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는 뜻에서 구원의 의미가 있지, 그것은 결코 회고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구원 자체는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3)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믿음이란 이 오고 있는(미래) 새 가능을 믿는 것이다. 딴 말로 하면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 말고 자기를 개방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기존적인 교회, 또는 교리 따위가 구원을 보장하는 믿음의 대상일 수 없다.

(4) 구원은 전체적인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어느 부분(가령 영의 구원)의 구원이거나 또는 개개인의 구원 또는 이 세계에서의 탈출 따위를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 새 땅' '새 인간'의 출현을 의미한다. 구원은 결코 개인의 인간 세계에서의 도피이거나 인간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뜻하지 않는다. 아니 바로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질 구원이다. 그러한 구원관을 우리는 구약과 그리고 바울에게서 지적했거니와 이 세계에서의 자유를 가장 강조한 요한도 그것은 이 세계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이 세계에 있으면서 이 세계의 노예가 되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서, 인간들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저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17, 15). 성서 전체는 하느님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역사 속에 임하기를 간구하고 있지, 이 세계에서 어떤 다른 피안의 세계로의 이동이나 도피를 말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도피적인 구원관은 천로역정적인 '피에티즘'이 가져다 준 선물이지, 성서적인 구원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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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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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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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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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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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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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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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더불어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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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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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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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운동과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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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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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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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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