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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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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1. 고린도 교회의 문제

고린도교회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로 대립되었다. 고린도의 일부 영지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지식층은 '우상은 없다. 그러니 우상의 제물은 없다. 그러므로 먹어도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한분 만이 우리의 신이고 그 외의 신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다'고하는 입장에 섰다. 저들은 자기들의 주장은 절대화하고 그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은 자들은 무지한 자들로 단정하고 저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위했었다. 8장은 바로 이러한 무리들에게 향한 말씀이다.

1절에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상이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창조자이신 하느님 뿐임을 안다는 뜻이다. 바울은 저들의 앎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 인식을 그대로 시인한다. 그러나 '정말 다 아는가?'라고 반문한다.

2절에서 바울은 "만일 누가 '나는 다 안다'고 생각하면 그는 실은 참 알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지적으로 하느님은 창조자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라고 안다고 해도 정말 그가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참 알아야하는 일에서 차단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스스로 안다고 하는 저들이 무엇을 몰랐는가? 저들은 자기들의 지적인 것을 근거로 자유를 구가할 경우 그것에 동의 못하는 이웃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자유할 수 있다는 데서 오히려 교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위치에 서게 될 때 그의 앎은 '너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가장 중요한 사랑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배제하고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예수를 알 수 있는가? 사랑을 모른다면 그의 교리적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울은 교리적 지식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은 사람을 현실 아닌 허상을 안고 자기가 적당하다는 교만에 빠지게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함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알아주십니다."라고 한다. 이 말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 현실인지를 알리는 중요한 열쇠다.

2. 자명적인 대답—허상적 삶

기독교는 오랫동안 교리문답적인 것을 앞세워 교육을 실시해 왔다. '하느님은 …이다. 그리스도는 …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교육의 대표적인 유형이고, 사도신경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대중을 이끄는 데 좋은 방법중의 하나일 수 있다. 우리 대중을 동원하는데는 단순할수록 효과가 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그러한 교리적인 지식으로 기본적인 것은 다 알았다고 자부할 때, 그 내용을 자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가령 아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하자. '아버지, 어머니가 없었다면, 너는 없다. 너는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통해서 낳았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때가 온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그 아이가 아버지, 어머니를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그가 불손할 경우에 '부모에게 그럴 수 있느냐! 너는 우리가 낳고 기른 부모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더 이상의 설교는 필요없어요. 물론 나는 당신들을 통해서 세상에 나왔어요.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부모가 그에게 자명적이라면, '그러나 그것은 내가 원 해서가 아니고 두 분의 결합의 결과일 뿐이예요!'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모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분이 많을 것이다. 아니, 그런 초보적인 물음은 질문받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고 생각할 분도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자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 중에는 설교는 이미 필요 없으며 성서를 탐구하거나 간구하는 일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묵은 술이 더 좋아야하는데, 오랜 크리스챤일수록 오히려 무감각해진다. 왜냐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그가 안 것은 그 머리에 그리고 있는 관념이지 하느님 자신은 아니다. 그는 안다고 안심하고 있으나, 그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 참 상대방을 아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안다. 그런데 참 사랑함으로 아는 지식은 '나는 다 안다'고 하지 않고, '정점 알 수 없다'는 한탄에 빠진다.

3.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가?

불트만은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느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계시하며 또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을 말하려면 사람을 말해야 할 터인데 사람을 모르니할 수 없다. 거꾸로 사람을 알려고 하면 하느님을 알아야하는데 그를 모른다. 그래서 결국 그에 대해 말할 길이 없다고 한다. 결국 하느님을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귀착한다.

여기 지식의 한계가 드러난다. 말하려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지식의 한계가 드러났다. 이것은 신학이 자연과학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느님이 그를 인정하십니다'를 믿는 입장이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은 다 안다고 자처하고 저들이 아는 바를 모르는 계급의 사람들을 멸시했다.

4. 이웃 사랑—하나님을 아는 길

여기 두 아들이 있다. 맏아들은 효자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둘째는 부모를 반역하고 방탕하다. 이 맏형은 그 동생을 한없이 구박하고 멸시한다. 그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기에 저런 것은 죽여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심정을 모르고 있다. 즉, 그 잘난 맏아들은 그 못난 자식도 역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못되면 못될수록 그 마음을 더 쓰는 그 마음을 모른다. 결국 그 부모를 모른다.

왜 교회 안의 사람들이 싸움을 잘하고 원수를 많이 만들고 독선적인가? 그것은 다 분명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하느님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반역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저런 사람은 교회에 손해다.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 저런 사람은 희망이 없다. 결국 저런 사람은 제거해야 된다. 그런 사람의 말은 들을게 없다'고 쉽게 말한다. 이렇게 되어 버린 까닭은 그동안의 짧은 지식을 통하여 절대화의 올무에 알게 모르게 굳혀진 자신들이 있어서 그렇다.

교회에서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 마이동풍이다. 마치 자기들이 이미 다 알고 있으므로 더이상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가 정말 하느님을 아는가? 한국의 효(孝)가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독을 봐서 쥐를 못친다'는 말이 있다. 부모 앞에서는 제 밑의 사람 욕을 해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하물며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가 형제를 함 부로 규정, 정죄해서야 되겠는가?

바울은 내 이론 상에서는 아무리 옳더라도 그 행위로서 다른 약한 형제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면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부모 앞에서 부모의 참 뜻을 헤아리는 맏아들의 권고다. 그래서 그는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이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고 말한다. 정말 독을 보아 쥐를 못치는 심정이다. 동생을 보고 그 부모의 마음을 동시에 읽지 못하면 그는 부모를 모른다. 내 형제를 대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그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생활 전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본다. 일을 당할 때마다, 어떤 결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적마다 그 이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고 물어서 결단을 내린다. 꽃 한송이를 보아도, 손에 돈을 쥐어도 그와 더불어 생각하게 마련이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자기 나름으로는 이게 옳다고 생각되었다가도 사랑하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떠오르면 그 자명성이 그대로 무너진다. 즉, 자기의 자명성이 흔들린다. 하물며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명적인 것이 견고할 수 있을까? 약한 사람을 보고 의분을 느낀 바울은 약한 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고 태도가 변한다. 그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5. 끝말

우리는 너무 실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사고에 이게 효율적이냐하는 전제가 신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실용주의이라하는 우상이 등장했다. 이것이 근대 사회를 형성하는 절대 불가결의 것으로 생각한다. 근대 사회라는 관념이 우상이 되었다. 이것은 원칙에 벗어 난다고 딱 버티고, 금 긋고, 끄떡하지 않는다. 원칙이라는 우상이다. 그러나 그 원칙, 그 근대사회, 그 효율성은 사회질서를 위함이 아니다. 결국 자기보존, 자기 방위의 방패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가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넘어서는 안 될 사전 원칙이 어디 있는가? 그 원칙은 자기 자식이나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에는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원칙이니 눈 감고 야옹하는 격이다.

어떤 아들이 술먹고 대문에 들어서다가 몽둥이를 들고 맞서는 아버지에게 땅에 금을 긋고 '요기를 넘어서는 사람은 내 자식이다' 했다는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금을 잘 긋는다. 맞을 일이 있으면 맞아야 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을 위해서도 맞는 것쯤 때문에 방향을 바꿀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분노, 매, 강요에 쫓기는 희열을 모르면 사랑하는 관계에 접근해 보지 못한 증거다.

새해에 또다시 360여일을 살려는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바로 그런 우리는 이해에는 우선 자명적인 것을 다 털어버리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 그것은 관념에서 되는 게 아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말 그분이 무얼 원하실까?' 하는 손길, 그 마음을 그에게서 읽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할 때만이 후회없이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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