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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1

"모세가 빈 들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들려야 한다'고 함은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 왜 들려야만하는가? 우리는 바울의 십자가의 설명에 젖어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이 속죄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얼른 그렇게 이해해 버리기 쉽다. 정말 예수의 죽음을 속죄적으로 이해하는 길 밖에 없는가?

"모세가 든 뱀처럼 들려야 한다"는 말씀에 속죄적인 뜻이 반영되어 있나? 모세가 든 뱀이야기에 속죄적인 의미가 있는가? 구약 민수기 21장에 애굽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이 야훼를 반항했기 때문에 야훼는 뱀들을 보내서 물게 했다. 저들이 뱀의 독에 죽게 됐을 때 모세는 동으로 만든 뱀을 들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은 낫게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에 속죄적 죽음의 의미는 전혀없다. 단지 신이 보낸 뱀에 의해서 죽게 된 저들이 사람 모세가 만든 뱀에 의해서 살게 됐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전반에 속죄라는 사상은 없다. 공관복음서에는 속죄 사상이 짙은 마지막 만찬석상에서의 "너희를 위한 내 피와 살"의 이야기가 있으며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으로는 마르코 11장 45절에(마태 20, 28)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 주려 왔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요한은 최후 만찬기사에서 그런 내용을 제거하고 그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는 기사로 전하고 있다. 8장에 "내 피와 살을 먹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인간의 생명이라는 뜻이 있을 뿐이고 속죄의 죽음의 의미는 나타나 있지 않다.

대속 또는 속죄의 사상이 예수의 십자가 이해의 유일한 것이라는 고집에는 반성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편협된 관념이다. 그 배후에는 법-제사적 사고가 깔려있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법의 카테고리에서만 이해하려는 고집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자연법 질서로써 정말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하느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것에 해당하는 처벌을 꼭하고야 만다는 생각에서 십자가를 다 설명한 것으로 알면 그 신은 너무나 공포의 대상이다. 과거에 예수의 피의 속죄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서 전체를 그렇게 해석하는 억지를 범해 왔다. 가령 카인과 아벨이 함께 제물을 드렸는데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것만 받았다는 이야기를 아벨은 목자였으니까 양을 잡아 바친 탓이라고 해석하는 따위가 그 극치다. 그럼, 그 하느님은 피에 굶주린 하느님이라는 말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풀이하면 죄지은 사람의 피대신 한사코 예수의 피라도 강요한 하느님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된다.

이러한 사고의 전통이 유대교에 있었다. 저들은 하느님께 짐승(양 또는 비둘기)을 제물로 바쳤다. 자기 생명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통이 예수를 양이라는 표현으로 상징했다. 죄없이 희생됐다는 뜻으로 볼 때는 알맞는 비유이다. 그러나 그것에서 곧 그 대속성을 강조함은 위험한 결론에 이끌게 한다. 신과의 관계에서 피를 사용하는 것은 종교 전반의 현상이다. 그것은 원시종교에 갈수록 더욱 현저하다. 그 배후에는 피에 굶주린 잔인한 신관념이 있다. 제 생명 이 협박 받는다고 느낀 원시시대인들은 공포의 대상인 신에게 짐승의 피를 받친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사상은 성서의 특유성은 아니다.

2

창세기에 하느님을 반역하고 인간을 유혹한 것이 뱀이라는 설화는 뱀을 악의 상징으로 생각하게 했다. 신약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독사의 종자들이라고 한 데가 있는가 하면 계시록에서 반신적(反神的)인 세력들을 뱀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반면에 뱀을 숭앙하는 흐름이 일찍부터 유대교에 침투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방종교의 영향일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그것을 모세가 든 구리 뱀의 이야기와 결부시켜서 신격화했던 과거가 있다. 열왕기하 18장에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때까지 행하여 분향하는 것을 히스키야 왕이 쳐 부셨다"는 기록이나, 후기 유대 문헌에서 이 뱀의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바로 요한복음이 쓰여질 무렵 헬레니즘의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한 그리스도교종파의 주장이다. 저들은 스스로를 오피텐(ophiten), 즉 뱀이라고 했다. 저들은 뱀이 참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파라다이스에서 야훼에게 반발했다는 설화를 아훼에 대항하는 새로운 구원자의 상징으로 해석하므로 뱀을 신앙의 대상으로 상징화했다. 저들은 이 반(反)야훼의 계보로써 피에 굶주린 야훼를 반항한 가인 그리고 잔인한 야훼의 뱀에 대해서 구리뱀을 만들어 맞선 모세, 마침내 예수는 바로 이 뱀이 재수육(再受肉)된 존재며 그의 승리는 바로 그가 야훼신의 왕위를 양도받은 것임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써 저들은 예수를 피와 진노, 복수의 신을 항거한 새로운 신이라고 풀이했다. 이러한 풀이는 저스틴을 비롯한 초대 교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뱀을 로고스와의 관계에서 해명하려고 시도한 흔적이 있다. 오늘의 마르크시스트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러한 일련의 사고의 영역에서 예수를 평가한다. 그는 예수는 구약에 나타난 폭군적인 성격을 지닌 신에 반항하고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일어났다가 그 폭군적인 신의 철통에 얻어맞아 죽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인간을 이 폭군신에게서 해방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그는 예수를 제우스를 속여서 불을 훔쳐 다가 인간에게 준 죄로 바위에 비끄러 매인 채 매에게 간을 찢기어 사경에 빠졌다가 맷쿨러스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의 틀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신의 자리에 인간을 대치하기 위해 싸운 이가 예수라고 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아전인수이다. 우리는 예수가 구약의 하느님 자신에 반항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모세가 뱀을 든 것은 하나의 반항의 행위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그러면 뱀처럼 들리워야 한다 함은 무슨 뜻인가?

3

요한처럼 유대교를 비판한 책은 없다. 그는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을 바로 반신적인 세계의 대표로서 비판한다. "너희는 너희의 아바인 악마에게 났으며 또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려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며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8, 44).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의 모습을 본 일도 없다"(5, 37)—이것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단절의 선언과도 같다. 그는 유대교의 중심이요 자랑인 모세를 아주 새롭게 규정한다. "너희를 걸어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다"(5, 45)—이것은 사실을 밝힌 것이기도 하지만 모세와 그 율법에 대해서 이보다 더한 평가절하도 없을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유대 전통이나 모세의 권위를 업고 등장한 이가 아니다. 아니, 그는 새로운 신앙의 기원을 이룩할 전권자로 왔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셨다"(3, 36)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서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14, 9)고 할 수 있다.

이 전권을 이양받은 새로운 신(!)은 바로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다. 그는 생활 필수품과 직결되는 물(생수)이요 떡이며, 포도에 대해서 포도나무요, 양에 대해서 목자이며, 빛의 아들에 대해서 빛 자체이다. 그의 대선언은 세상을 고소하렴도 아니요(5, 45) 세상을 심판하렴도 아니(3, 17)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 인간에게 자유를 선포한다(8, 31). 무엇보다도 모든 고소자에게서의 자유이다. 그러기에 그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놓아주며 인간의 불행은 죄 때문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일축한다(9, 31).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요 기쁨이다. 이런 것들을 주기 위해 그는 왔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인간들에게 그와 동등한 반열에 합격시킴을 최후의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에 "내게 주신 영광을 저들에게 주었다"(18, 22)고 하며 그가 거룩한 것처럼 저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한다(17, 19). 그럼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과 그가 하나된 듯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고 한다(17, 23).

이것은 분명히 인간 역사의 신기원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출현자체는 곧 세계에 대한 심판이다. 삶 아니면 죽음, 자유 아니면 노예, 진노의 대상 아니면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은 갈린다. 이것은 그에게 향한 결단 여하에서 결정된다. 그를 믿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이미 진노와 죽음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런 심판은 그러나 새롭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상태 그대로에 머문 상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머물러 있음"(menei)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에 대해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마저도 없게 된다(11, 25-26).

4

그런데 그는 모세가 든 뱀처럼 들려야 한다고 한다. 들려야 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뜻이며(12, 32) 또 하나는 높임을 받는다는 뜻이다(12, 23). 요한복음에서는 수난당한다는 일과 높임을 받는다는 일이 두 가지 일이 아니고 하나다. 수난을 당함 없이 높임받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림 없이 그의 뜻의 완성은 불가능하다. 그는 꼭 세상을 떠나가야 한다고 반복한다. 가야만 비로소 모든 것이 밝아지리라고 한다. 그가 감으로써 성령의 시대가 온다. 그 성령이 비로소 인간들에게 참 죄가 무엇이며 정의, 또는 심판에 대해서 밝혀 줄 것이라고 한다(16, 7 이하). 왜?

모세가 들었던 뱀은 진노의 신이 보낸 뱀들에 저항해서 그 독아(毒牙)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구출했다. 그런데 독사에게 물리게 한 것도 야훼며 이에 맞서 모세에게 구리뱀(銅蛇)라를 들게 한 것도 같은 야훼이다. 이것은 구약에 표현된 야훼이다. 그는 사랑의 하느님이며 동시에 질투의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일직선을 긋지 못하고 분노에 의해서 포물선을 그린다. 인간의 죄에 분노하였던 야훼는 모세의 간곡한 희원을 들어서 그 분노를 후퇴시킨다. 그렇다면 모세의 뱀처럼 들리워야 한다는 것은 두 얼굴 중 하나는 영원이 제거하고 살리는 하느님만으로 일직선을 그은 사건이란 뜻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폭군신에 대한 죽음의 저항을 뜻함과 동시에 완전무결한 사랑의 하느님을 새롭게 계시했다는 뜻이 된다.

사실상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느님은 그 이상 분노의 하느님은 아니고 철저히 사랑으로 일관하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그가 하느님을 저항하기 위해 들려야 한다는 말은 없다. 그대신 그가 들려야 할 이유를 다음 같이 말한다. "너희가 인자를 높이 든 후에야 내가 그이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8, 28). 이것은 예수를 드는 것(죽이는 것)도 인간이며 또 들리워야 할 이유도 바로 그 인간들 때문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저들이 그를 든 후에야 비로소 그가 참 누구임을 알게 될 것이고 또 그의 가르침이 참 하느님의 모습과 뜻을 나타낸 것임을 비로소 알겠기 때문이다.

예수가 폭군신에 항거하여 죽었나? 그러나 그 폭군신은 실재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관념 속에 도사려 있는 유령이다. 그러면 예수가 뱀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함은 인간의 폭군적인 종교관념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며 또한 저들의 그런 관념의 신을 영영 제거하기 위해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란 말이 된다. 예수를 죽인 것은 유대인들이 한 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저들의 종교관념의 신이 예수를 죽인 것이다. 이 종교관념은 법질서로서 파악한 신관념이다. 그것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용서 없는 인과적인 터 전 위에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거기는 죄에 따른 벌에 대한 협상으로서의 피의 제사가 절대적인 것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종교세계에서는 증오와 저주, 복수와 심판이 정의처럼 휘둘러지게 마련이다. 이런 관념은 밖으로 남에게서 죄를 찾고 안으로 언제나 공포의식에 노예가 되게 한다. 바로 저들의 낡은 종교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모세의 손에 들린 뱀처럼 예수를 든 것이 아니다. 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단 모양은 모세가 나무에 뱀을 매단 것과 흡사하나 그것은 살리는 뱀으로서가 아니라 파라다이스에 나타났던 뱀을 저주하 듯 나무에 단 것이다.

예수는 폭군신에게 사살됐다. 유대 종교관념에 자리한 폭군신에게! 예수는 이 폭군신에게 사살돼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럼으로써 그런 신을 인간의 머리에서, 역사상에서 영원히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저들은 그를 사살한 후에야만 비로소 그의 참 뜻, 그리고 그가 계시한 하느님이 참임을 비로소 알겠기 때문에 그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은 진노의 하느님, 피를 즐기는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임을 알게 되겠기 때문에, 그때에야 비로소 율법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소'하여 정죄만 일삼는 것임을 알게 되겠기 때문에!

우리는 식인종들에게 선교하다가 저들의 손에 스스로 자기를 내맡겨 죽었다는 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안다. 그 식인종들은 그 선교사를 존경하면서도 사람을 죽여 먹는 것을 왜 금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저들은 그에게 한 사람만 더 잡는 것을 허락해주기를 간청했다. 이 선교사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찌기 붉은 옷을 입고 가는 사람을 잡도록 허락하고 자기가 몸소 붉은 옷을 입고 나서서 저들의 제물이 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저들의 악습을 정당하다고 인정해서 자기를 내맡긴 것이 아니라 저들의 습성에 희생됨으로써 바로 그 습성의 잘못을 알게 함으로 그것을 영원히 없애자는 목적이었다. 낡은 버릇을 매장하고 새로 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죽음이다. 그는 하느님께 바친 제물이 아니라 무지에 바쳐진 제물이다. 뱀처럼 들리워야하는 예수도 바로 낡은 종교관념의 무지에 바쳐진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나무에 단 예수는 최후로 "다 이루었다"고 했다. 까닭은 그 나무에 달림으로써 인간의 관념에 정좌한 피에 굶주린 저주의 신은 제거됐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림으로써 사랑의 하느님 살리는 신이 전권을 이양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써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제사를 드리는 대신에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속죄적인 이해는 양을 잡아 바침으로 써만 하느님께 갈 수 있다고 믿은 유대인들에게나, 또 희랍의 신비종교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죄책감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설명은 과거에서 해방됐다는 기쁨을 안겨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러한 소득에 못지않게 큰 피해를 가져왔다. 그것은 이러한 이해가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마술적인 것으로 바꾸워 버림으로써 십자가의 사건과 내 삶을 완전히 유리시키므로 무책임한 인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짓을 하고도 십자가만 쳐다보면 십자가가 화학적 작용이라도 일으켜 "붉은 죄를 눈과 같이 씻어 준다"고 생각케했다. 그러므로써 십자가를 속죄적으로 설명한 바울이 몸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며 날마다 죽는다는 능동적인 삶도, 나를 따르려면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도 까맣게 잊어버리게 한다. 이러한 상태는 아직도 진노의 신에게 그대로 예속돼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종교생활에는 환희가 없고 언제나 울음 뿐이다. 진노의 신 아래 예속돼 있기 때문에 자기 역시 남에게 대해 용서가 없다.

요한복음이 써진지 2천년이 된 오늘날에 한국의 교회는 여전히 진노의 신 아래 예속돼 있다. 그러기에 교회의 강단은 언제나 협박이요, 공갈이다. 따라서 언제나 남을 규탄하고 정죄하는 것을 권리처럼 휘두른다. 입으로는 복음주의를 말하면서 실상으로는 복음에의 화음을 강요한다.

진노의 하느님은 십자가와 더불어 영원히 없어지고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그 외아들을 보낸" 하느님만이 계시됐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 회귀적인 영원한 반복의 줄을 끊고 새 세계로 향하게 했다. 거기에는 영원한 삶만이 있으며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가 하느님과 하나 된 것처럼 하나가 되는 길만이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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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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