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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1. 너무나 초라한 생

예수를 따르는 이들 또 복음서 기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 중에 하나는 예수의 전체 생활이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메시아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生)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평(評)을 종합해 보면 그들이 저 사람의 부모, 형제를 알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평민(平民)이고, 그의 주변에 모인 자는 미천한 사람들이고, 더우기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거리없이 사귀며, 이렇다할만하게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것을 실증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네가 무슨 권리로 죄를 사(赦)한다고 하느냐. 어떤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다. 심지어는 그 형제들까지도 출세하려거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가 하면, 미쳤다고도 한다.

그의 삶을 요약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만 전하며 극단적인 결단을 요구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죽고 말았다'할 수 있다. 물론 성서에 예수가 기사, 이적을 행한 기록이 많다. 그러나 예수는 객관성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겟세마네 기도나 십자가 상의 비명같은 것도 '기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가지고 느끼는 모습이다). 그래서 제자 중 하나는 실망해서 그를 배신했고, 예수가 체포되자 다른 제자도 뿔뿔히 헤어졌으며, 또 주목할 것은 그가 너무나 초라한 생을 마쳤기에 초대 그리스도인은 그를 메시아로 믿는데,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을 인용하여 설명한 사실이다. 즉, 예수는 분명히 메시아이지만 외모로는 죄지은 버림받은 사람같이 초라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는 확실히 유대인의 메시아상과 어울리는 데가 없다. 그 반면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참모습이 군데군데 솔 직하게 보도되어 있다. 하여간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생과 메시아됨 사이의 간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진 애를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예수를 이제 올 인자와 일치시키고, 그 사후 곧 그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을 보면, 예수에게는 일반이 말하는 기적 이상의 기적이 있은 것이 틀림없다.

2. 유혹에 비친 인간상

본문에 실린 예수의 시험 당한 기사는 마르코에 있는 자료와 다른 자료에서 온 것으로 누가에도 실려 있는 것인데, 그 시험의 내용과 예수의 대답의 내용이 대조적으로 되어 있다. 즉, 그 시험 내용은 메시아에게 요구할 수 있는 즉, 초인간적인 실증을 기대하는 것이고, 예수의 대답은 끝까지 너무나 인간적인 것 즉, 어느 인간이나할 수 있는 대답이다. 신약성서학자들은 이 예수의 대답은 어떤 각도로 보나 메시아적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적이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그런 물음을 피하고 이 이야기에서 단순하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배우려고 한다.

첫째, 예수가 40일을 금식했다. 이것은 모세에게도 있던 일이다. 광야와 40이라는 수가 맞물린 것은 출애굽한 히브리의 광야 40년 모세의 시내산의 40주야를 연상한다. 예수는 40일 금식 후 주리셨다고 기록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주리셨다, 목이 말랐다는 기록 등이 있다. 반면에 굶어도 태연했다거나 먹지 않고도 산다는 기록 따위는 없으며, 또 이곳 외에 예수가 금식했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금식을 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마르 2, 19).

주린 그에게 시험이 왔다. "저 돌을 떡이 되게 하라." 배곯은 자에게 '저 돌들이 떡이었으면' 하는 환상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기자의 알리고자 하는 것은 '그의 메시아성 또는 그 메시아로서의 할 일이 어느 것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를 당시의 메시아에게 기대한 것이라고 본다면, "당신이 우리를 구하려면 먼저 민생 문제부터 해결해 주오. 그것을 못하면 하느님 아들이 아니요. 모세도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지 않았소? 민중이 민생고의 도탄에 빠져있소." 이것을 예수의 고민이라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민중을 구하느냐? 먼저 먹을 걸 주어야 할 게 아닌가! 내가 저 많은 돌을 떡이 되게 한다면!" 하고 생각했을만 하다. 이런 시험은 5,000명 먹인 일과 관련해서 요한복음 6장 30절에 말한다.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무슨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당신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고 하면서 만나를 먹인 모세와 대조시키는 데 대해서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떡 자체'라고 말한다.

'떡과 말씀! 어느 것이 참 내할 일인가! 어느 것이 민중에게 근본적인 것인가? 또는 어느 것이 메시아의할 일인가?' 이러한 심리적인 추측은 추측에 그칠 뿐이고, 다만 확실한 것은 떡이냐 말씀이냐의 양자택일에서 어느 하나를 결단해야 할 위치에 선 예수는 양자택일의 입장에 서지 않고 굶주린자가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다른 면에 비중을 주며 그것에 역점을 둔다. 즉 굶주린 자에게 떡이 필요하지, 그러나 그것이면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다음에는 시험자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올려 놓고 거기서 떨어지라고 하며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떨어져 보라. 그래도 죽지 않으면 하느님 아들인 증거이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유신론자들의 요구와 같다. 이것을 예수의 내적인 문제로 돌린다면, '나는 하느님이 내 편에 있다'는 실증을 얻고 싶다. 그렇게 '내가 하느님의 보장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내 운명을 무조건 하느님께 맡길 것인가 즉 어떠한 손에 잡히는 실증없이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나를 내맡길 것인가? 즉, 무조건 복종이냐? 또는 실증을 얻어 보장을 받느냐?' 양자택일 앞에 자신을 세웠다. 실증을 구하면 그의 뜻에 나를 무조건 내맡기는 것이 못되고, 무조건 내맡기면 허구에서 헤멜지 모른다. 이 두 가지 가능성에서 예수는 '나는 비록 망하더라도 하느님을 시험할 수는 없다'고 결단한다. 결국 무조건 자기를 내맡기는 데로 결단한 것이 된다. 이 시험은 성질상 앞의 시험의 경우와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직접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말한다.

셋째는 예수를 높은 산 위에 올려 놓고 온 천하의 화려한 영화와 주권을 한 눈에 보게 한다. 그리고 시험자는 "내게 절하라. 내게 굴복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네게 주리라"라고 한다. 이것은 처음의 시험과 공통된 것이다. 다른 것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란 것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예수는 근본적 양자택일의 위치에 있다! '어느 것이 참 민중을 위한 것이냐? 하느님 외에 어떤 권력자와 손을 잡음으로 구체적인 권력을 잡는 일이냐?' 예수는 기로에서 있다. '전혀 아무런 보장도 없는 하느님에게만 무조건 복종하는 일이냐? 악마와 손을 잡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을 추구할 것이냐?' '오직 하느님에게만 순수히 복종할 것이냐?' 목적을 위해서 수 단을 가리지 말 것이냐? 목적이 비록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선한 수단을 택하느냐? '실리냐? 진실이냐? 타협이냐 충성이냐?' 이 기로에 서서 결국 예수는 오직 하느님께 무조건 자기를 투신하는 길을 갈 것을 결정한다. 즉, 물질, 종교의 힘, 또는 타협이냐 이러한 하느님의 뜻이냐에서 결국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다.

3. 믿음의 참모습

그렇다면 주권, 기적, 물질, 박수갈채 같은 구체적인 것으로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을 거부하면 결국 남은 게 뭔가? 딴말로 말한다면, 주권도, 기적도, 의식주에서 어떤 보장도 구하지 않고도 산다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러나 본문의 예수의 결단을 한마디로 하면, 오직 하느님만 믿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만이 목적이며 그것을 위해 살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시험을 요약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이여,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소서!' 여기서 이 운명을 피하는 길은 하느님이 기적을 베풀어 유대종교 지도자와 로마를 쳐부순다든지, 베드로의 생각대로 권력 저들에게 정면대항해서 저들과 싸워 이기는 일이다. 즉, '당신이 지금 날 돕는다는 실증을 보여주거나 또 내가 내 힘으로 이 운명을 피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살아가는 길 뿐이다.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여기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대로 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 보장이 없다. 그 앞은 온전히 가리워진 미래만이 움크리고 있다. 주검처럼 침묵하는 미래다. 그 미래에 날 맡긴다. 즉, 내가 내 손으로 내 미래의 보장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의 손에 자기 미래를 내맡긴다. 그 미래는 캄캄하다. 그러한 표현이 십자가 위에서 즉,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의 입을 통하여 나은 외마디 비명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가 그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 그리고 악마의 유혹을 거부하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믿음'의 가닥을 만날 수 있다. 즉, 하느님께 전적으로 내맡긴다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모험이다. 이 예수의 시험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 자신의 결단만 표시되었는데, 예수는 자기결단에서 하느님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또 하느님도 어떤 형태로나 개입하고 있지 않는다. 즉, 예수의 결단에서 하느님은 끝까지 침묵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상 예수의 생애다. 사람들이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아무런 보장도 없이 무얼 믿고 저러나! 그 믿는 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하느님만을 위해!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모험인가!' 이다.

폴(Jean Paul)은 예수의 모험적 최후를 극대화하여 이런 이야기를 쓴다. 예수가 하느님만 믿고 처형된 다음 그의 재림을 기다려 사람들은 교회에 모였고 또 죽은 사람의 시체도 교회의 뜰에 묻었다. 그것은 그 예수가 재림하면 교회를 먼저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어린 아이들의 무덤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정말 죽었던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때 모든 시체들이 무덤을 헤치고 일어났다. 어린 아이들도 그랬다. 그중에 한 어린 시체가 관에서 일어나서 그 하느님이 어떤 모양으로 계시더냐고 묻는다. 그때 다시 온 예수는 창백한 얼굴로 비명같은 고백을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 태양계와 은하수를 넘나들며 하늘의 광야도 헤맸으나 신은 없었고 아래로 심연을 향해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라고 소리쳐도 영원한 카오스가 동공(洞空)처럼 보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 시체들은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오'라고 통곡을 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니체 이전에 이미 무신 세계를 내다본 것이다. 그러나 폴은 '그게 꿈이기에 다행이었다'는 여운을 남긴다. 이 꿈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의 현장을 잘 묘사하고 있다.

4. 결단

우리는 언제나 보이는 것과(일반적으로 구체적인 것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일반적으로 추상적, 정신적이다라고 한다) 중에서, 보이는 것에 늘 쉽게 끌리나 동시에 거기서 탈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보이는 것을 수시로 내게서 끊어 놓지 않으면 나는 그것에 결박당해 죽는다. 그래서 자유니, 반항이니한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반항이다. 그런데 그것을 반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거점이 '보이는 것 밖'에 있어야 한다. 혹은 파토스로 이런 구속을 탈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파토스도 역시 이 보이는 것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역사의 미래를 말한다. 그러나 그 역사도 하나의 법칙으로 보는 한, 역시 보이는 것의 영역 속에 있다.

우선 '하느님 만'을 할 때는 이 보이는 것에 결박된 내게서 탈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내게는 보이는 출혈이 크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유혹을 받는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할 때는 보이는 영역에서는 실패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보이는 세계에서는 실패다. 그렇게 '보면 보이는 것에 국한하자. 신앙이고 무어고 없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면 나의 새 미래란 없고 보이는 것에 매어 시들어 죽는다. 이렇게 되면 자유니 새 가능성은 다 헛 잠꼬대이다.

'자유냐 죽음이냐?' 이 구호를 사람들은 상식처럼 외친다. 그런데 자유하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현대인에게 '자유냐? 실리냐?'가 알맞는 결단의 실체일 것이다.

'시험'은 어느 하나로의 결단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다른 하나를 희생하는 것이다. 결단은 어느 하나를 버리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은 무가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어느 것이 더 중요해서 버리는 것이다. 결단해야 한다는 것은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인간관이 내포되어 있다.

'말씀으로!' 이것은 떡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에 있어서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이쪽도 일리(一理)가 있고 저쪽에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결국 결단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예수의 길은 보이지 않는 편으로 결단하므로 보이는 것에서 탈출하려는 것이다. 떡! 이것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불의한 떡은 안 먹겠다'고 할 때, '무얼 믿고?'라는 반문에 대답할 게 없으면 결국 먹게 된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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