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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복종
—부정과 긍정
마태 21, 28
1. 껍질을 벗기고

예수는 '예' 하고 행하지 않는 자와 '아니' 했으나 후회하고 그 뜻대로 행한 자 중에서 누가 그 아버지의 뜻대로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물론 이 질문에는 '예!' 하고 행하지 않는 자보다 '아니'라고 하며 일단 저항했으나 사실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옳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 극히 단순한 몇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점이 보인다.

(1) 하느님은 인간의 외적인 태도에 매이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하느님은 사람의 외적 표현과 그 사람을 직선적으로 일치시키지 않는다.

(2) 하느님의 편에서 볼 때, 이른바 네 편, 내 편이 없다. '아니!' 한 자는 우선 내 편이 아니고, '예' 한 자가 내 편이다. 그러나 아니라고 했든지, 예라고 했든지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요는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둘째로 예수에게서 보자. 이 비유 다음에 나오는 '창기와 세리가 오히려 너희보다 앞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한 것은 예수의 판단이다. 여기서 '너희'란 우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한계를 깨고, 흑백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종교 세계, 비종교 세계, 계급, 죄인, 의인이라는 기존 질서에 의한 한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해서 말할수 있다.

(1) 이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국경이 없다. 선민이니 뭐니 하는 기득권은 없다. 하느님은 그런 인위적 한계에 매이지 않는다.

(2) 거룩한 영역, 세속의 영역이 없다. 그의 눈에는 세계는 전체로 하나요, 그 안의 인간은 그런 틀에서 풀어 놓고 본다.

그런데 이런 전제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그 시대에서 누구도 관심하지 않는 세리와 창기에세 시선을 돌리고, 그들을 재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오히려 새로운 미래의 인간상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회에는 이같은 예수의 뜻이 배제되어 왔다. 교회에 창기가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 교회의 주변에서 돌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작 『죄와 벌』에서 창기인 쏘냐를 암흑 속의 빛으로 내세웠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어둠과 방황의 시대적 상징이라면 쏘냐는 그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한줄기의 빛이다. 그녀는 라스꼴리니코프를 굴복시킴으로 그 시대의 암흑을 극복한다.

여기 놀라운 점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남을 사전에 외적인 관찰로 구분하고 애당초 눈을 감아 버리고, 희망을 걸 때에는 일정한 구획을 긋고 그 범위에서 희망을 찾는다. 또 내가 나 자신에게 희망을 두거나 또는 절망하는 경우도, 내게는 이런 점이 강해야 할텐데 바로 그런 것이 없다. 내게는 이러 이러한 약점이 있다하고 사전에 가치 기준을 정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서 볼 때는 내가 오히려 나에 대해서 슬퍼하는 그 취약점, 그 치명상이 오히려 참 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저장된 보고이다.

2. 결단은 얻고 잃는 행위

어떤 이들은 이 비유는 어느 것이 낫다고 최종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창기와 세리, 즉 처음에 아니라고 한 자도 완전치 못하다는 것이고 그저 비교적 낫다고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서를 볼 때 예수는 분명히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다.

우리는 우선 여기서 거부를 불복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부의 성실성을 쉽게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당신은 이래야 합니다'라고 할 때, 금방 응하는 자에게 두 가지 헛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그는 주체적이 아니다. 일단 그것을 내 것, 내 일로 받지 않고, 그저 당신 말이 옳다는 정도에 그친 것이 될 뿐이다. 그러나 참 복종이란 일단 네 명령, 네 뜻이 옳다고 해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내 일로 받으려면 그것을 저항하는 것이 책임적인 존재 양식이다. 둘째로 그는 이것을 정말 내가할 수 있는가를 생각치 않았다. 이것은 무책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정말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능력이 그것에 미칠 수 있는지, 그것이 실현가능성이 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책임적인 사람은 쉽게 '예' 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오히려 '아니'라고 한 자는 바로 이같은 주체의식과 그리고 책임의식이 있는 자이다. 못할 것인지,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자신을 놓고 재보아야지, 무조건 복종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복종해도 주체적으로, 책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역설적인 데가 있다. '아니'라고 한 그는 실은 그 일을 하려 했던 발길을 그가 언명한 바와는 다른 데로 돌렸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내가 결심한 일, 내정한 방향과는 다른 데로 가게 되는가?

우선은 내 판단에 의해서 그러지 않고, 다른 길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그러나 자기의 가려던 길보다 저 길이 옳다고 생각된다. 몸이 서로 가는데, 마음은 동으로만 향한다. 이럴 때 나는 내 정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여기서 그 내부에 싸움이 생긴다. 이 싸움은 극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싸움에서 그 길을 회전할 때는 자기 체면, 명예 따위는 내동댕이치게 되고 만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을 할 수밖에는 없다. 이것은 정말 눈물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내게 좋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내 취미에 맞지 않아도, 내 의무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정도(正道)인 한 나는 그 정도를 가야 한다. 이럴 때 순교의 결심이 생긴다.

이것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없을까가 문제될까? 설사 문제가 되어도 그 길로 회전할 때에는 거기에는 참 신앙밖에 없게 된다. 나는 할 능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또는 내가 비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라고 내맡기는 자세에 서게 된다.

이 비유에는 은연중 이러한 인간상을 옳다고 하는 판정이 내려져 있다.

3. 부정에서 긍정으로

(1) 하느님의 판정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의 부정 속에서, 우리의 저항 속에서 긍정과 복종을 읽는 하느님이다. 말하자면 어두움에 빛을 주시는 하느님이다.

(2) 예수의 판정은 한편에서 보면 혁명이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의 약속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이다.

정치계의 파벌 싸움은 그친 적이 있는가? 선과 정의로써 정치가 이루어진 적이 있는가? 한시라도 정치가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 미래의 희망이 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어찌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인관계에서의 편견이 우선하지 않는가? 내 편, 네 편 편 가르기의 현실 안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식이나 후진에 대한 선배의 협소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내 자신의 복제품으로 만들기를 꿈꾸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왜 저들이 나와 다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가?

예수의 경우는 패배, 고난, 모욕과 추함 속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결코 영광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그것이 운명처럼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담담히 인내하며 십자가를 졌다. 그것은 지는데서 이김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각가는 흙 속에 묻혀 있는 볼품없는 하나의 돌덩이에서 그것 안에 담겨있는 예술품의 환상을 본다. 음악가는 시장바닥에서 와글거리는 소리들을 뽑아내어 황홀한 멜로디를 만든다. 시인은 얽히고 설킨 무수하게 내버려지고 쌓여서 썩어가는 말들 속에서 만대(萬代)에 걸쳐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시 한 수를 찾아낸다.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타 언덕에서 우리의 삶을 긍정하게 하는 힘을 발견하는 일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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