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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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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斷)!
마르 9, 42-48
1. 이 죄악을 어떻게 할까!

전정권의 비리가 속속들이 폭로됨에 따라 온 국민은 치를 떨고 있다. 전씨 일가만이 아니라 그의 처가의 근친들마저 총동원하여 사람 둘의 재산을 마구 빼앗고 생명을 위협한 사실들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 마다 국민들의 눈은 점점 커졌다. 전두환 씨는 정신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고야 단임을 그렇게 코에 건 처지에 진시황을 뺨칠 정도로 천년만년 권좌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전국 곳곳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아방궁을 지었을까? 그렇게 욕심에 차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 발표한 정도의 축재로 만족했을 까닭이 없다.

신문을 통하거나 데모대의 함성을 통해 국민들의 목소리를 보고 들으면서도 이순자 씨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억울하다는 분노를 터뜨렸고, 전두환 씨는 측근의 말이라는 형식으로 분노를 넘어서 이 나라를 완전 괴멸시킬 폭탄이라도 안고 있는 사람처럼 온 국민을 대항해 싸울 듯한 기세마저 보이더니, 청문회가 열려 그 죄악상이 만천하에 속속 폭로되니까 마침내 자기가 피땀흘려 번 돈으로 장만한 자기 집이라고 고집하던 연회동 집을 떠나 지금 백담사인가 뭔가하는 절에 가서 칩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공개한다느니, 그 모두를 국가에 헌납한다느니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의 갑작스런 마음바꿈이 참회에서 온 것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다. 그토록 완강하게 버티다가 광주사건을 밝히는 청문회 개최 직전에 '대국민 사과'다, 뭐다 떠들썩했던 저의야 뻔하지 않는가? 분명히 그는 총칼로 권좌를 뺏고 이 땅에 마피아의 대부로 군림하여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 모든 마피아단들이 그렇듯 그 또한 이렇게 저렇게 죄악을 은폐해 놓고 할 말도 골라 놓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광주시민의 학살사건은 어떤 변명으로도 감출 수 없지 않는가?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원흉에 대한 저 많은 이들의 분노와 복수심을 어떻게 이겨 내겠는가? 그래서 그는 지금 같은 연극을 연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저지른 죄악은 그 일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계 각층에 만연되어 있다. 그 진상이 점점 더 파헤쳐지는 날이면 이 체제를 근본에서 뒤흔들 만한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너무나 분명하고도 끔찍한 사건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국민의 여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 하나는 전 정권하에서 생긴 모든 죄악을 철저히 파헤치고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전두환 씨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것만이 혼탁한 이 민족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일벌백계를 들고 나오는 견해가 있다. 말하자면 벌의 범위는 최대한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 씨와 그 일가에게 그만하면 큰 경고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은 전두환 씨 일가의 범죄에 관용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저히 척결하다보면 국기마저 흔들 리게 되어 더 무서운 혼란이 올 것이라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이 둘 중 어느 쪽이든 우리는 지금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 우리가 결단을 하고 척결하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혼미상태로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2. 예수의 두 모순된 발언

우리는 예수에게서 일면 모순되는 두 가지 발언을 본다. 먼저 예수의 한 비유를 보자. 어떤 사람이 밭에 밀을 뿌렸는데 거기에 가라지도 함께 나왔다. 그 둘은 그 밭에서 함께 나란히 자란 것이다. 이것을 본 그 집의 일꾼들이 가라지를 뽑아 버릴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물론 밀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가라지는 밀이 먹고 자라야 할 영양분을 가로챌 뿐 아니라 밀 자체에까지 악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가차없이 뽑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그 주인은 "가만 두어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한다. 그 이유는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태 13, 24 이하). 이것은 하루속히 불의한 것을 처단하되 철저히 해야 한다는 입장에 제동을 거는 말로 볼 수 있다.

사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는 경우가 인간 역사에도 얼마든지 있어 왔다. 대체로 어떤 집단이 순수한 동기에 의해서건 정권 장악을 위한 수단에서건 과거를 청산하는 숙정을 하는 경우 예외없이 무고한 자들도 함께 다친다. 박정희정권도 전두환정권도 모두 정권장악과 더불어 숙정작업을 함께 펴나갔다. 거기에 순수한 동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부패한 세력을 도려내야 새 출발이 가능하며, 그것이 정권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시위하는 데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반대세력으로이미 노출됐거나 아니면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숙정의 대상으로 뽑아 냈으며 개중에는 본의 아니게 무고한 자들도 포함시키게 된 것이다. 올바른 의미에서의 혁명을 시도하는 경우에도 이같은 과오는 거의 불가피하다. 역사상의 많은 혁명, 사건에서 그같은 희생이 없었던 예가 없다.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숙정이란 불가능하며, 그러면 새 역사는 시작될 수 없다. 그러면 예수는 이대로가 좋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가?

그런가 하면 그와 정반대되는 예수의 추상같은 말들이 있다.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리라"(斷). 네 발이,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해도 찍어 버리고 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마르 9, 42 이하). 단(斷)! 칼날 같은 명령이다. 썩은 것은 조금도 남기지 말고 도려내라는 말 같다. 외과의사가 암부위를 수술하듯이, 조금이라도 그 부분이 남으면 도로 퍼질 테니까 철저히 끊어 내야 한다. 썩은 것은 철저히 도려내지 않으면 성한 부분을 계속 잠식해 들어간다. 이렇게 끊어 낼 때 어쩔 수 없이 성한 부분도 잘려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 밀밭 주인의 태도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밀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가라지를 뽑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말한 그가 어떻게 생살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는 것인가. 이것은 전정권의 죄악을 철저히 규명하고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예수는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비록 보잘것 없는 한 사람에게라도 죄를 짓게 하는 자는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이 표현을 직선적으로 말하면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것이다. 이 말을 전씨와 그 집단에게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비록 강도질을 했으나마 그래도 7년 이상 대권을 쥐고 호령하던 놈이면, 그만한 범죄가 국민에 의해 그렇게 지탄받게 된 이 마당에 더 무슨 쇼를 하며, 단칸방에서 비참하게 사는 양 칩거하는 방을 공개하는가 하면, 마치 출가하여 삭발한 왕이나 되듯 평생 생각지 않던 부처님 앞에 참회하면서까지 구차한 시늉을 하느냐! 할복을 해라, 할복을 너만이 아니라 너와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청문회에서까지 시위하던 놈들도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할복을 해라. 그럴 용기가 없으면 목에 무거운 돌이라도 달고 바다에 뛰어들어라. 단(斷)! 네 미련을 '단'하는 것이 사는 길이니라. 예수의 명령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적용하니까 예수의 상을 깨버리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발언한 말의 뜻이다.

그러면 위와 같이 상반된 내용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의 발언을 좀더 세밀히 봐야겠다. 우리가 그들을 세밀히 관찰하면 상반 속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밀밭 주인은 그렇다고 가라지를 그대로 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청산하는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추수 때다. 추수 때가 되면 먼저 가라지를 모조리 뽑아 단으로 묶어 불에 말끔히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에 거두어 들이라는 것이다. 이 주인은 가라지를 그대로 두거나 다른 데 사용하라고 하지 않는다. 완전히 태워 없애 버리라는 것이다. 단! 곡식과 가라지가 뒤섞인 현실을 언제나 감내하라는 것이 아니다. 밀은 곳간에, 가라지는 불에! 철저한 갈라놓음이다. 단! 이 추수의 때가 바로 심판의 때다. 이 심판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은 밀 자체를 희생시키지 않고 가라지만 없애 버릴 수 있는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다. 그때는 또한 밀이 가라지와 더불어 있지 않고 그 있을 자리(곳간)에 옮겨지는 새로운 마당이 열리는 때다.

이에 대해서 범죄하게 하는 요소를 사정없이 잘라 버리라고 한 다음 말들을 들어 보자. 그것은 썩은 발과 성한 발, 썩은 손과 성한 손, 썩은 눈과 성한 눈을 그대로 병존시키면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 썩은 하나를 도려냄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한다. 잘라 버리고 뽑아 버리는 단의 행위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행위다. 이 새 나라에서는 썩은 것이 병존할 수 없다. 단 없이 생명의 새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위의 이야기와 상통한다. 단지 위의 이야기에서는 단의 때를 기다리라는 데 대해서 여기서는 그런 명시가 없다. 그러나 '단'해야 한다는 데는 역시 차이가 없다.

그러면 썩은 지체를 '단'해야 할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그 부분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마침내 전체를 썩게 하여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한 때다. 심판의 때란 바로 이런 때인 것이다. 상처난 부분이 도저히 소생하지 못하고 썩어 갈 때, 그것이 전체를 죽일 때 바로 그것이 단(斷)해야 할 찬(滿) 때다.

3. 단(斷)의 역사

민중과 더불어 에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목적지 가나안을 향해 대행군을 했다. 사십 년의 오랜 기간을 그 도상인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글자 그대로 피나는 행군이었다. 마침내 이 대행진의 종점에 이르렀다. 그 앞에 요르단 강이 흐른다. 그 강만 건너면 바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이다. 모세는 바로 이날을 위해서 사십여 년을 고투한 것이다. 감격에 벅차 그는 그의 민중과 함께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그는 그들을 아래에 두고 홀로 요르단 강 이쪽 모압평지에서 해발 800m의 아바람 산에 오르고 또 올라 느보 산 서쪽 봉우리인 비스가 절정까지 올랐다. 그의 시야에는 서해, 지중해까지 들어왔고 사해 남쪽의 소알 평지까지 들어왔으리라. 꿈에도 그리던 목적지가 이제 그의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다.

야훼는 그에게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신명 34, 4)고 말한다. 약속된 땅, 그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역대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이 바로 그의 눈앞에 전개되는 바로 저곳이라는 것이다. 마치 "내 약속은 헛되지 않았다. 네 눈으로 확인하라"는 듯이! 그런데 뜻밖의 단서가 붙는다. "너의 눈으로 보게는 해준다마는, 너는 저리로 건너가지 못한다."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인가. 그보다 먼저 이 장면에 대한 약간 다른 기록이 있다. 거기에는 "너는 예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람 산맥을 타고 느보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 차지하게할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하고 "그 산에서 죽어라"(신명 32, 48-50)고 야훼가 지시한다. 이것은 하느님이 그에게 신천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선고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랬을까? 그가 늙어서 기력이 쇠진했기 때문인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토록 수고한 이 선구자를 사람들이 들것에 메어서라도 건너가도록 해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기력이 다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기력은 떨어지지 않았었다"(34, 7)고 함으로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음을 가리킨다. 그게 무엇인가? 위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말한다. "너는 씬 광야에 있는 카데스의 므리바 샘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둘러선 가운데 나를 배신하였다. 내가 하느님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드러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32, 51).

그런데 그 사건은 모세가 책임져야 할 사건이 아니었다. 광야 배회 중 르비딤에 진을 쳤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마실 것이 없어 소동을 일으켰으며, 에집트에서 끌어내어 자기들과 아이들까지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모세에게 대들었다. 그래서 이 사정을 하느님께 알리며 애걸했더니 호렙의 바위를 그가 가진 지팡이로 때려 생수를 나게 함으로 저들의 불만을 해소했다. 모세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실은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반항한 것이다. 저들은 해방의 대행진의 뜻을 망각한 반역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 책임을 지운다. 본문에서도 모세 개인이 아니라 '너희'라는 복수를 씀으로써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을 그가 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전에 그가 여호수아라는 후계자를 내세워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세우면서 "내 나이 백 스무 살이 지나 다시는 일선에 나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야훼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는 말과 함께 여호수아를 향해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야훼께서 이 백성의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이 백성을 이끌고 들어갈 사람은 바로 너다"(신명 31, 1 이하)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보면 모세 자신의 자각과 야훼의 뜻이 병행되어 있다. 이것은 야훼의 뜻이 곧 모세 자신의 결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에게는 비록 장엄한 행군이었으나 광야생활 40년 동안 오염되고 범죄한 과거를 '단'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새 세대인 여호수아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바로 광야 40년의 종점인 이쪽에서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낡은 역사를 묻어 버리려는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단(斷)의 현장인 느보 산 봉우리에서 죽었다. 얼마나 장엄한 최후인가!

이것은 체념적이며 비극적인 장면이 아니다. 그 봉우리는 이제 한 발만 내딛으면 도달할 수 있는 신천지를 목전에 둔 봉우리다. 신천지, 새 시대를 눈앞에 둔 사실이 모세의 최후를 그처럼 장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을 왜 자기가 져야하는가라는 항의도, 40년을 기다린 저 땅을 밟아 보기만이라도 하겠다는 애원도 하지 않는다. 새로운 큰 역사, 새 삶을 위한 '단'! 그것이 모세의 죽음이다. 그러나 성서기자는 결코 이것으로 모세의 위대함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세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단' 즉 심판이라고 한다. 하느님은 역사를 이끌어 가면서, 최후의 궁극적인 때에 '단', 즉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신념이다.

이같은 모세의 상 앞에 오늘 이 땅의 지도자로 자처했던 그리고 자처하는 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이 민족의 죄악을 다 책임 지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민족에게 진 죄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인데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저들의 모습은 얼마나 비열한가! 비록 자신이 사복(私腹)을 채운 일이 없다고 해도 자신이 전체를 책임지고 있을 때 자신과 그 처가의 일가 친척이 달라붙어 부정을 한 사실이 드러났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할 게 아닌가. 그보다도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광주학살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양심들을 짓밟은 사실이다. 그 사건들에 대해 그 자신이나 그의 졸개들이, 그가 직접 관여했느니 안했느니 또는 수가 많다느니 적다느니 따지는 데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일본장교의 부하였으면 못된 버릇만 배우지 말고 모든 책임을 지는 사죄의 행위로서 할복은 못하더라도 그 용기 정도라도 흉내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또 하나 문제는 현정권의 역사에 대한 몰지각한 작태다. 전 정권의 죄악이 저들에게 얼마나 짐이 되고 있나. 그런데 그것을 '단'하지 않고 구렁이 담넘듯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 정권 비리나 광주사건 청문회에서 저들은 하나같이 과거를 은폐하려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들은 전정권과 자신들을 일치시켜 보게 되는데도 말이다. 결국 과거가 단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로서 그들 자신에게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를 용서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역사는 찬(滿) 때, 곧 '단'의 때다. 단 없이는 절대로 이 고비를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사는 길은 글자 그대로 "네 손이 범죄했거든 찍어 버리라"를 그대로 실행하는 길뿐이다. 그래야 비록 한손만 남더라도 살 수 있다. 죽는 과정 없이 살아날 길은 없다.

끝으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의 민중은 예수의 십자가처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자. 저들은, 예수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었는데 하느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그를 처형했다고 해석한다. 하느님이 결국 예수를 죽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하느님은 '단'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신념이다. 예수시대의 이른바 묵시문학사상에서는 하느님은 이 오염된 역사를, 이 세계 전체를 멸망시킴으로써 '단'할 것이라는 환상을 보았고 또 그것을 전했다. 그런데 예수의 민중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묵시문학이 말하는 우주적인 종말 즉 '단'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묵시문학은 우주적 심판으로 모든 것의 종말을 말한다. 이에 대해 예수의 민중은 하느님이 인류의 죄의 역사를 '단'하기 위해 예수를 '단'함으로써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건은 심판으로서의 단이면서 동시에 해방과 구원의 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측면에서 그린 복음서에서는 이 이야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다. 복음서의 예수는 그가 수난을 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죽음의 지점이 될 예루살렘을 최후의 목적지로 삼는다. 그러나 그 예수는 고뇌한다. 게쎄마니 동산의 이야기는 이 장면을 잘 서술한다. 꼭 이 길을 걷어야 하나? 왜 내가 이 죽음의 잔을 들어야 하는가! 이러한 번뇌는 결국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단(決斷)이다. 새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심판이 앞서야하는가! 그것 없이 새 세계는 올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단' 없이 새 역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경륜이다. 이 사실을 재확인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재판과 잔인무도한 형벌 앞에 아무런 말 없이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적인 미련을 '단'한다. 이 엄숙하고도 필연적인 단의 역사 앞에 예수라는 한 개인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자기 파멸의 비명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민중은 이 죽음에서 낡은 역사의 단, 죄의 역사의 '단'을 본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기점으로 새 역사의 시작을 경험함과 동시에 해방을 경험한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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