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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복종과 자유의 관계
갈라 4, 1-10
1

자유! 이 말처럼 자명적인 것은 없는듯 하면서도 또한 이처럼 모호한 것도 없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절규처럼 가슴으로 공명되는 것은 없으나 그것은 또한 쉽게 '자유'라는 죽음을 달라로 전락돼 버린다.

'자유'를 추상화 해 버리면 나 자신이 추상화된다. 자유! 그것만 철저화하면 나는 증발해 버린다. 자유는 '무엇에서'와 '무엇을 위해서'라는 분명한 한계를 알 때만 나(인간)의 것이 된다. 순수 자유! 자유를 위한 자유는 신에게서나 가능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유에의 길』이라는 방대한 소설을 썼다. 그 주인공 철학선생은 자유를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적 고독에 사로잡혀 한 소녀의 침실에 주1회씩 도둑 고양이처럼 숨어들어야 하는 노예가 된다. 그러다가 그만 임신을 시킨다. 다가올 의무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유산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그것에 필요한 돈을 구하는 일에 노예가 된다. 이처럼 그는 계속적으로 자유를 위해서 자유의 노예가 되어 비겁한 삶을 전전한다. 그는 종당에 단 한번 자유를 만끽한다. 그것은 쳐들어 오는 독일군을 피해 숨었다가 순간적으로 든 총을 난사함으로써 자기를 죽음에 내 맡겼을 때이다. 그는 참 자유는 죽음으로써만이란 결론을 내린 셈이다. 그것은 탈아(脫我)에서만 자유가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인간이 인간의 영역을 넘는 순간이다. 따라서 그런 자유는 인간의 자유는 아니다.

성서의 메시지의 중심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추상적인 자유가 아니다. 아니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다. 여기서 인간이라함은 한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바울은 종과 아들의 관계를 말한다. 그럼으로써 성서에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를 밝힌다.

2. 종과 아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성인된 아들이 됐는데 왜 종노릇하는 상태에 되돌아 가려고 하느냐고 준엄하게 책망한다. 너는 이 이상 종이 아니다. 지금은 성인된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자유하다. 그런데 왜 스스로 종의 멍에를 다시 메려느냐? 이것이 그의 절규이다.

종이나 아들은 관계적 존재이다. 홀로 종일수도 없으며 홀로 아들일수도 없다. 종의 부자유라는 것도 그 주인과의 관계 안에서의 현실이요, 아들의 자유라는 것도 그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만 주어지는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둘 다 조건적 존재며 부자유도 자유도 조건적이다. 성서에는 이 관계 안이라는 것을 떠난 자유라는 사상은 없다. 둘 다 그 앞에서의 존재라는 것은 같으나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로써 비록 같은 여건, 같은 일을 해도 질적으로 갈린다.

한 사람이 종과, 아들을 가졌다. 이 둘은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종은 어떤 명령을 받았을 때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 동기나 목적을 모르고 단지 명령 받은 일 자체에만 관련한다. 그러나 아들은 단순히 무엇이 명령되었으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가 무엇을 원해서 이런 명령을 하는지 묻거나, 앎으로써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뜻에 복종한다. 따라서 하나는 법적인 복종이요,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복종이다. 따라서 종의 복종은 굴종이며 아들의 복종은 참여가 된다.

따라서 종의 복종에는 반문이나 항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그 아버지가 이런 것을 원하는데 이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또는 저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제의나 항의가 가능하다. 그러므로써 하나는 맹목적인 복종이요, 다른 하나는 참 이해가 따른 복종이 된다.

종은 명령 받은 사건만 수행하면 된다.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는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은 그 일의 결과까지 문제하므로써 아버지 앞에 책임적인 주체가 된다. 따라서 종은 그 명령된 일 자체에 매여 있고 아들은 그 명령한 이의 뜻 자체에 매여 있다. 따라서 같은 복종이라도 하나는 피동이고 하나는 주동적이다. 종은 비록 명령된 일을 철저히 수행해도 그 일은 어디까지나 그 주인의 일이지 자기일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 아들은 비록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일이면서 곧 자기 일이다. 따라서 하나는 나와 그(삼인칭)와의 관계에 있다. 하나는 복종을 하면서도 너와 나를 유리시키고 다른 하나는 복종 속에서 나와 '너'가 하나의 공동운명체임을 인식한다. 그 까닭은 종은 주인을 어디까지나 종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마주서 있기 때문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그의 아들이라는 카테고리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로서 마주서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주인은 종을 하나의 기능으로 대하지 고유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데 대해서 아버지는 비록 많은 자식을 갖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각 자식의 이름이 다르듯이 각 아들과 독특한 관계를 가지지 자식이란 테두리 속에 페인트 칠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은 얼마든지 주인을 바꾸어 갈 수 있어도 아들은 아버지를 바꿀 수 없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존재다. 이것은 뒤집어 놓는 경우에도 같다.

바울은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다. 이것은 성서 또는 바울이 발견한 고유한 말은 아니다. 유다교에도 그런 표현과 사상이 있으며 동서의 고전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말이다. 희랍사상에서는 본질상 신들과 인간의 차이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울이 인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함은 본질론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또는 사변적인 데서 얻은 결론도 아니다. 아니! 그는 한 여갓적 사건이 인간을 어떤 상태로 만들었으며 어떤 권리를 주었는가를 말하려고 한다.

3. 어린이와 성인

바울은 어린이와 종을 비교한다. 어린이는 종은 아니다.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아들도 아니다. 그는 종은 아니나, 종과 같은 상태에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12세까지의 어린이를 부모의 예속물로 생각한다. 그때까지는 완전히 부모의 권한에 예속되며 어린이는 그 부모가 지정한 "직이"(paidagogos)나 후견인의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그에게는 아들이 갖는 자유란 없고, 있다면 복종밖에 없다. 그러나 12세를 지나면 하느님께 바치는 예전(禮典)을 행한다. 그때부터 어린이는 내적으로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 된다. 로마나 희랍에서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성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말하자면 성장과정을 통해서 어느 시기에 비로소 자유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을 이러한 관습법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부모에게 직속되어 후견인의 보호 밑에 있었다. 그것은 종의 상태와 같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타율적 제재가 필요했다. 그것이 유다인에게는 율법이며 다른 민족에게는 종교적 권위를 지닌 자연법이거나 관습이었다. 그러나 한 역사적 계기를 통해서 인간은 성인이 됐다. 말하자면 성인된 아들이 된 것이다. 그 역사적 계기란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바로 어린이가 성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아버지 앞에 아들의 자유를 얻게 됐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들이 됨으로써 모든 율법이나 모든 자연 또는 관습법이라는 후견인이 필요없이 됐다. 이것은 동시에 그 아버지의 뜻에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전에는 아버지의 뜻이 직접적이었으며 그는 그 뜻에 종이 복종하듯이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서 있는 상황에 던져지며, 아들은 자기의 결단을 통해서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객체와 주체가 유리되지 않게 됐다. 타율과 자율이 하나가 됐다. 전에는 아버지가 "이렇게 해라" 하면 그대로 "예"라고 복종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버지는 나는 네가 바로 하기를 원한다. 잘 알아서 하라고 하며 아들은 "예, 아버지의 아들답게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고 복종하게 됐다는 것이다. 바로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버지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 아들이 알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법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는 그 아들 자신이 자기 상황에서 찾아 내야 할 것이다.

불트만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느님의 뜻과 상황 그리고 결단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성립된다고 했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함이다. 하느님의 뜻은 처음부터 인정된 율법같은 것이 아니다. 이 뜻은 상황과 더불어 즉 일정한 상황에 있는 인간에게 그 상황을 통해서 양자택일의 위치에 선다. 그는 거기서 주체적 결단을 함으로써 행위한다. 딴 말로 하면 인간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위를 결단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자유하게 됐다. 이 이상 율법과 보편율도 그를 구속할 수 없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자기의 분깃을 상속 받았다. 그는 이 받은 상속권을 자기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 처리할 수 있다.

그는 그런 주권을 그 아버지에게 받았다. 따라서 아버지가 준 아버지가 인정한 자기의 권한을 누구도 침해할 수는 없다. 반면에 그는 책임적인 존재가 됐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이 특권을 아버지의 뜻에 맞게 주체적으로 살려고 책임적으로 행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권리, 그 자유는 아버지 앞에 선 아들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탕자의 방종, 즉 무엇에서의 자유는 알고 무엇 앞에서의 자유, 또는 무엇을 위한 자유를 모르는 고아의 자유와는 전적으로 다른 자유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주어진 아들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또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로 되돌아 가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통탄해 하는 것이다.

믿기 전 여러분이 하느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본질상 하느님이 아닌 신들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이 하느님을 알 뿐 아니라 하느님이 아시는 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또다시 그 무력하고 유치한 원시종교로 돌아가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 노릇을 하려고 합니까?

원시종교로 번역된 stoicheia tou kosmou는 '세계의 구성요소'란 뜻이다. 이것은 자연현상 자연법으로부터 천체(天體) 또는 성좌(星座)의 근원적인 힘까지 포함한 것을 관념화한 것을 말한다. 바울은 골로사이서에서 또 한번 이 뜻을 풀이한다.

여러분은 어떤 자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포로가 되지 마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유전을 따라 오는 것이며 원시종교를 따른 것이요. 그리스도에게 온 것이 아닙니다(2, 8).

즉 이것은 당시의 점성술적인 세계관이요 철학이다. 바울은 저들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킨다'는 사실을 책망한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예속하는 것은 희랍 사상에도 있고 율법에도 있다. 이런 것들의 종은 일종의 숙명론자들이다. 저들의 운명이 이러한 성좌나 천체의 운행에 매여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것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것들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서 무서워서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준 자유를 외면한 행위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5, 1)라고 새로운 언조로 간곡히 전한다.

4. 우리의 노예성과 자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정말 자유한 것인가? 우리는 정말 자유한가? 우리는 이 이상 어떤 것의 노예가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무슨 일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도 사주를 보고 관상을 보는 수가 많다는 것은 논외로 하자. 일요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데 구원의 열쇠라도 있는 듯이 떨고 있는 사람들도 논외로 하자. 예수 이전의 구약의 율법의 조항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논외로 하자. 문제는 그리스도의 이름 밑에서 노예가 되고 있는 상태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윤리적인 삶에서 공포에 사로잡히고 현실에서 비겁해지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결과인가?

그것은 성서(신약)에 나타난 말씀들을 또다시 직접적으로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불안을 가져다 줌으로써 다시 불안의 노예가 된다.

가령 산상설교에 "왼 뺨을 치면 오른 뺨을 돌려대라"고 했고 "가진 것은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 아무리 성서를 축자적으로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대로 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의식 무의식 속에서 불안에 사로잡힌다. 따라서 자유한 기상은 없고 비겁하게만 된다. 남에게는 성서구절을 법의 조문처럼 적용해서 공격해도 자기는 그대로 못하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신용 못한다. 이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흐릿하다.

이것은 성서의 주의 말씀을 다시 율법화하여 직접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오는 것이요, 그러므로써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정말 예수는 어떤 행위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법적으로 지시했는가? 그랬다면 바울이 말하는 어린이직이(paidagogos)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제시하지 않은 무수한 경우와 상황에 부닥치면 행동을 정지해야만하는가? 하지 말라 또는 하라는 말씀은 극히 한정돼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범위만 지키면 된다는 말인가? 이처럼 성서를 이해하는 것이 톨스토이며 니체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금욕주의의 노예가 되어 고민했고,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했다.

"하지 말라!" "하라"에 대해서 그대로 직선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종이요, 어린이이다. 그러나 자유한 아들은 하라는 말씀에서 "하지 말라"를 읽고 "하지 말라"에서 "하라"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은 추상적인 인간에게 한 것도 아니며 노예에게 한 명령도 아니다. 아니!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안에 있는 인간에게 한 말이다. 그것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아들된 자의 이해에 호소한 말씀이다. 인간의 상황은 자꾸 변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내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에서, 말하자면 삶 한복판에서 들어야 한다. 즉 이 말씀과 내 상황을 유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이 상황과 말씀은 내게 하나의 물음이 된다. 나는 그 물음 앞에서 결단한다. 딴 말로 하면 이 말씀은 우리를 책임적인 존재이게 한다. 우리는 그 말씀들을 내 상황에서 책임적으로 결단함으로써 듣고 또 대답해야 한다. 이것이 성인된 아들의 복종이다.

말씀과 내 상황을 유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웃 사랑의 명령에서 보자.

예수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그런데 그 뜻은 이웃이라는 것과 결부돼 있다. 이웃은 내 상황이다. 내 앞에 선 이웃은 언제나 다른 상황에서 내게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럴 때 이 이웃의 요구를 들음으로써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다음 "네 몸같이"라는 말씀이 있다. 내 몸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게 속한 것이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달라야 한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길은 내게서 찾아내야 한다. 나는 나로서 이웃의 구체적인 소리에 대해서 어떤 행위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듣는다. 따라서 행위의 주체, 행위의 방법의 선택의 자유는 내게 있다. 만일 내 상황(이웃의 구체적인 요구)과 나의 결단(내 몸 사랑하는 것)이 고려되지 않으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만일 이 명령에서 '이웃'과 '네 몸'이라는 것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사랑하라는 것만이 남는다. 이것은 그의 뜻이다. 그러나 이 뜻은 내게 있어서 내 존재와 유리되어 있지 않는 자명적인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그는 사랑을 이미 알거나 아니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이다(불트만).

그런데 우리가 만일 이웃에 대해서 사랑의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에 나는 이러고 싶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명령이니 한다고 하는 경우에는, 즉 아들의 자유에서가 아니라 노예적인 복종에서 하는 경우에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을 유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복종의 경우는 사실상 이웃을 산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사랑하라는 명령만 상대하기 때문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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