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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사도 3, 1-10
1. 부활의 4월

봄이 왔다. 지금은 4월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4월, 4월은 부활의 달이다. 서구인들은 계란으로 4월의 부활절을 상징한다. 생명의 상징이다. 저들은 4월 부활절을 편지 쓰는 계절로 한다. 1년 내내 연락없던 친척 친구들 사이에 희미하고 시들어가던 정과 우의를 다시 소생, 부활시키려는 뜻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한마디가 우리에게 깊은 인상으로 숨어들고 있다. 까닭은 4월이 우리에게 4.19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사실 4월은 소생의 달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잔인한 달이다. 그처럼 앙상히 굳은 목피(木皮)를 뚫고 비쭉이 내미는 그 연하다 못해 액체같은 순 끝을 보면 그것은 잔인한 투쟁과 저항의 상징처럼 보인다. 땅위 오솔길을 거닐면 마구 짓밟혀 돌처럼 굳어진 대지를 뚫고 돋아나는 풀의 순끝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위를 사람들은 사정없이 밟고 또 짓밟고 지나간다. 그래도 그런 잔인성에 지츨어 지면서도 그래도 계속 솟아난다. 가끔 굳은 흙덩이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면 그 밑에 액체처럼 연한 무수한 순들이 함께 그 흙덩이를 저항하여 버티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어떤 압력이 있어도 태양을 향해 솟아나야 된다는 절대절명 앞에 선 무서운 의지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을 보면 2천년 전 팔레스틴의 어떤 무덤을 연상한다. 그 무덤은 우주의 새 생명을 죽여 가두고, 큰 돌로 영원히 폐쇄하려는 듯이 매장했다. 그러나 그 무덤은 그 생명을 영원히 가두지 못했다. 그 생명은 그 돌을 떠밀고 일어났다. 그것이 4월에 기념하는 부활사건이다. 그것은 체념과 절망을 영원히 추방하고 그 어떤 상태에서나 재기할 수 있는 새 생명의 탄생의 순간이었다.

2. 무엇이 구원이냐?

본문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그를 매일 성전문 어구에 메어다 거기를 드나드는 이들에게 구걸해서 연명하도록 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구걸하는 그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함과 동시에 그는 제 발로 걷고 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그 특징은 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려면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성전 입구에, 말하자면 성전에 들어가는 문턱에 앉았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의 상징이라면 그는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 문턱에서 그것을 이용이나 하려는 위치에 앉아 있는 셈이다.

그의 불행은 그에게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그의 최대의 목적이라면 그날 그날의 구복(口腹)을 채워 연명하는 일이다. 그에게 이제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손, 아니 사람의 손바닥에 놓여진 돈만이 보인다. 즉 그는 사람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한 푼 한 푼의 돈푼과만 관계된 인간이 되었다.

그에겐들 한때 자기 운명에 저항하고 원망하는 몸부림이 없었으랴! 그러나 그는 언젠가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체념하고 이제는 그렇게 그날 그날을 사는 것에 익숙해지고 또 그런 삶이 자명적인 것이 됐으리라!

이 사람은 이젠 숙명론자가 됐다. 그래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며 또 그런 약속이나 충동 따위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 어떤 균형의 자리를 설정한 것이다. 이를 구해 준다는 일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이제 이 앉은뱅이 이야기의 배후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 매일 같이 이 앉은뱅이를 성전 문턱에 메어다 놓고 가는 사람들! 그들은 가난한 친척들일 수도 있고 어떤 선량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들의 동기를 순수히 돕고 싶은 선심이라고 보면 얼마나 갸륵한가! 그러나 이런 도움이 반드시 갸륵하기만 할까? 그것은 어쩌면 그를 도와야 할 책임을 도피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우선 그것이 그를 돕는 행위라고 할 때에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앉은뱅이에 대한 체념이 전제돼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그 이상의 어떤 희망도 걸지 않는다. 따라서 저들은 그렇게라도 그를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강요 당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더욱이 그런 식의 도움으로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만 다하면 된다는 입장일 뿐 실은 그를 인간으로 포기하고 있다. 이들의 경우를 그 성전을 드나들면서 그에게 돈푼이나 쥐어주면서 자기들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종교적으로 계명(戒命)된 이웃 사랑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경우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자! 성전에 들어가서 경건한 기도를 드리고 신 앞에 충성을 맹세하고 나오면서 쓰다 남은 돈 한푼을 그 내민 손에 던져주고 제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성도들'! 저들은 그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자기들의 의무의 대상으로 돈푼을 떨어뜨려 주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 앞에 이르렀다. 이 거지는 물론 돈 한 푼을 기대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를 보라"고 한다. 지금 그 앞에 선 '우리'를 보란다. '우리'? 그에게 돈푼을 던져주는 '적선'의 손이 아니라 '우리'를 보라고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 말이다. 그러나 그 거지는 사람으로서의 그들에게 흥미가 없고 '무엇을 얻으려고 두 사람을 보았다.' 거기 사람이 섰는데 사람을 보았으나 사람을 보지 않고 무엇을 줄 수 있는 '손'만 본다.

아니! 나를 좀 봐라! 사람을! 내 얼굴! 여기 네 앞에 사람이 서 있다. 우리는 너를 '사람'으로 마주하고 있고 사람으로 관계하고 싶다. 그러나 그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대한 지 너무 오래이기에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었기에 그 눈에 역시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돈 푼으로 보이도록 체질화된 거지! 그런데 그 앞에 어떤 사람들이 서 있나?

따지고 보면 그 '우리'들도 바로 이 거지와 같이 절망과 체념에서 완전이 좌절했던 자들이다. 저들은 그날 그날의 생계를 위해 이 거지가 오가는 자들의 처분을 바라 손을 내밀듯이 디베랴 호수에 손을 내밀어 얻어지는 물고기로 연명하는 것을 삶의 전부라고 알던 이들, 그러던 그 어느날 예수를 만나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웅대한 꿈과 더불어 새 삶의 발돋움을 했던 이들, 그런데 그 희망인 예수를 잔인한 역사(4월이 잔인한 것인가?)의 인간들이 그를 죄없는 죄인으로 로마제국의 이름으로 처형해서 무덤에 매장하는 순간 이 '무리'들은 꼭 이 거지처럼 절망과 체념속에 다시 그 옛 디베랴 호수가에 주저 앉아 버렸던 이들이다. 그렇던 '우리'가 어느 순간 그 체념과 절망을 뚫고 자기(自起)해서 그 거지 앞에 섰다. 저들은 바로 그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서 부활함과 함께 되살아난 것이다.

우리를 보라!

이 사도들은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이 거지와의 관계를 끊는 선언과도 같다. 돈 한 푼에 관심해서 그들을 보는 그에게 그런 언명은 더 이상 흥미없는 대상을 만든다. 말하자면 이 사도들은 그의 욕구를 단절했다. 저들은 그의 욕구에 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자렛 예수의 이름! 이 사도들은 그와 함께 그의 이름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우리'다. 바로 그 예수는 저들이 원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예수는 저들의 욕구나 소원을 단절했기에 저들은 그를 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도 그 거지와 지금 이들에게서 경험하는 공통의 쓴 경험이 있다.

그런데 이 '우리'는 바로 저들의 소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버렸던 그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한다. 그것고 저들이 부활한 그리스도의 손에 부축되어 새로 걷기 시작한 경험에서 얻은 신념에서다. 그 신념 그대로 이 거지는 저들의 손에 의해서 일어나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뛰어 일어나 걷기 시작했고" 또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은 주술적인 신호이기도 하다. 마르코 9장 38절에는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행각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니 복종하더라(루가 10, 7)라는 보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술이 아니다. 이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사건은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는 새 시대의 선언(이사 35, 6)이 현실화된 것을 뜻한다. 예수 자신은 그의 출현에 대한 선언으로서 이렇게 말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옴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심이라(루가 4.19).

그리고 그의 활동에 대해서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나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 5-6)고 했다. 이것은 새로운 종말적인 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돌입했다는 징조이다. 여기 한 개인이 그의 낡은 욕망과 병과 체념과 절망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예기치도 않았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은 새 시대, 오고야 말 새 현실의 도래의 증거이다.

3. 기적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여러가지의 도움의 손길이 있다. 그중에 가장 유혹적인 것은 앉은뱅이대로 있을 수 있는 삶의 방편을 마련해 주려는 손길이다. 숙명론은 약자가 발견한 철리(哲理)가 아니라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세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 그리스도교도 한동안 가담했다. 불행에 억눌려 신음하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거나 아니면 '죄 값'이라고 해서 그 자리에 눌러 앉게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라는 설법도 꼭 같은 강자의 편에 선 어용 진리다. 이같은 '원칙'을 설득하는 데는 이른바 '합리적' '현실적'이라는 도그마를 사용했고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체념'이라는 독을 뿌렸던 것이다. 합리적이요 현실적이라는 것의 기존질서는 불가항력적이라는 시위이다. 그것은 그 시대시대마다 당시의 체제를 영구화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도덕, 윤리, 종교 그리고 힘이 동원됐다. 오늘에 있어서도 오늘의 사회체제, 권력구조, 경제체제 등은 모두 마력적 지식과 조직과 선전을 동원해서 가장 합리적이고 불가항력적 현실이라고 설득한다.

이런 설득 앞에 현대인은 자기의 앉은 자리를 숙명처럼 받아 이 불가항력적 현실에 적응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함으로 점점 자기를 잃고 인간관계를 상실해가고 있다. 그런 뜻에서 현대인은 앉은뱅이이다. 남이 업어다 준 일정한 장소에서 계속 기계를 만지거나 머리를 씀으로 얻어진 푼돈으로 그 삶을 연장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들은 구제품과 복지사회라는 이름아래 주어지는 편리한 것에 습성이 되어 '나'로서 살려는, '제 발로 걷고 뛸' 것을 체념한다.

오늘의 '합리적', '현실적'인 설득법은 비전이나 희망은 없고 현재만이 전부라고 한다. 이 현재를 파괴하는 것은 무엇이나 인류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이 현재를 제지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득한다. 하나는 '기적은 없다'요, 동시에 또 하나는 '절망은 없다'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제 발로 걸으려는 의욕을 갖는다면 그것은 망상이다. 까닭은 기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죄'이다. 까닭은 기적을 바라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그냥 들어누워 죽기를 각오하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 왜? 그것은 절망이 있다는 것을 알면 '현재'가 상처를 받는다. 그는 굶어죽지 않을 만한 장소에 일자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그 성전 입구에 매일 업어다 놓아주는 자들, 그리고 그 성전에 드나들면서 돈푼을 떨어뜨려 그를 연명하게 하는 자들은 그 앉은뱅이를 위한다는 사실에서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자기들이 일정한 위치를 보장받은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 '기적'과 '절망'을 방지하는 역할을 알게 모르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기적이 없다는 것이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은 인과율만이 현실의 전부며 그 위에 오늘의 질서의 보장을 삼는 자들의 거짓말이다. 성전을 드나드는 자들도 기적을 믿지도 않았으며 그런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 무리들이 아니었나? 그랬기에 전능한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드나들면서도 그 앉은뱅이는 영원히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기적도 바라지 않았거니와 동시에 절망에 빠뜨리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적선'을 한다.

앉은뱅이는 남의 손에 끌려서 한자리에 앉아 구걸해야 사는 것이 합리적이요 현실이다. 그런데 그가 제발로 걷고 뛰고 저들과 동등하게 성전에 들어가면 그것은 기적이다. 그런 것을 저들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기적'을 믿었고 또 '기적'을 가능케 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당장'에 걷고 뛰면 이날까지의 질서의 합리성의 牙城이 무너지는 사건이다. 그것은 일대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기적'을 믿고 그것을 일으킨 저들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현실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들 자신이 체험했기에 가능했다. 만일 '기적'이 없었더라면 저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들은 영원히 체념과 절망 속에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기적이 안 일어났다면 어쩔뻔 했나? 그러면 종교의 이름을 빌린 유다교의 악당들과 그들과 야합해서 자기들의 기득권에 거치장스럽다고 죄없는 죄인을 만든 빌라도의 정권은 영속하라는 말인가?

기적이 없다면 가난한 자는 영원히 울고 포로된 자는 영원히 매여 있고 눈먼 자는 영원히 못보고 눌린 자는 영원히 압제아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 저들이 기뻐하고 눈이 뜨이고 해방된다. 그것을 위해 예수는 왔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바로 기적을 행하기 위해 왔다는 선언이다.

이 사도들은 이 기적의 한 부분을 실현했을 따름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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