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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본문의 내용들은 다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이방사람과 유다인 사이에 담이 막혀 있었고 그 관계는 원수의 관계였다. 둘째는 이 원수된 담은 그리스도의 피로 헐고 원수의 사이를 그의 몸으로 해소시켰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들었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느님의 거할 집(katoiketerion tou Teou)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상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이 말씀의 개념들에 접근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 보자.

1. 철의 장막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란 구체적으로 유대 성전구조와 관련이 있다. 성전에는 세 겹의 담이 있다. 제사장과 일반 유대 남자들 사이, 유대 남자들과 유대 여인들 사이, 그리고 유대 여인들과 이방인이 접근할 수 있는 사이에 담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담 입구에는 이방인이 들어가면 죽으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사실상 이방인이 이 담을 넘으면 어떤 형태로나 죽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담이며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와 같은 담이다.

이것은 유대인 대 이방인 감정을 압축한 것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무할례당이라고 했다. 무할례당은 저들의 눈에는 저주의 대상이다. 그런 뜻에서 유대인은 저들을 지옥에서 타는 연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옥감이란 말이다. 유대인의 폐쇄성은 극단화되어 이방인과 식사도 함께하지 않았으며, 만일 유대인이 이방사람과 결혼하는 경우에는 그는 죽은 사람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에 장례식을 올렸으며 그것은 이방의 어린이에게까지 적용되며 이방인 어린이가 위험한 처지에 있는 경우에도 구해 주지 않을 만큼 비인간화됐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의 경우만이 아니다. 헬라인은 유대인을 할례당이라고 하여 멸시했고, 희랍인 밖의 민족은 모두 야만으로 보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타민족을 짐승이라고 했고 플라톤은 타민족을 본질상 헬라인의 원수라고 했고, 그들과 휴전 없는 전쟁관계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이며, 저들의 원수의 관계이다.

최근 세계는 이른바 냉전시대에서 화해의 시대에로 돌리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외신은 키신저를 중심한 미국의 외교의 철학을 밝힌 바 있다. 키신저 외교의 큰 동기는 이대로 나가다가는 인류가 멸종이 될 것이라는 대전제에서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이 인류멸망의 위기를 모면해 보자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동기에서 온 외교방법은 현재의 모든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음성적인 것을 양성화하자는 데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잘잘못이나 과거의 소유권 따위는 묻지 말고 지금의 상태 그대로를 고정화하고 세계가 함께 인정해 버리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강대국을 동원해서 피차 이해관계가 다른 상대쪽의 소국 사이의 기존권을 인정해버리게 함으로 이 이상 분쟁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적해야 할 큰 특징이 있다. 그것은 지금의 있는 담을 그대로, 아니 튼튼히하자는 사실이다. 이런 것이 서방 강대국가들이 공산정권을 인정, 수교하고 공산세계의 강대국이 서방의 국가들을 인정, 수교한다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담은 그대로 두고 싸움은 말자는 국제정책이다. 이러한 화평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궁극적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국도 이같은 추세에서 남북회담을 강요받았다. 우리는 아직도 남북회담이 시작됐을 때의 축제 분위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 때 이북서 온 사람들은 내일이라도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듯이 마음이 부풀었고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여러 교파에서 이북 선교전략을 짜는 등 법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나는 그때 이것은 남북분단 현실화의 서곡이상이 아니라고 설교했다. 그 까닭은 북한 공산당의 생리를 잘 안다고 자부한 탓도 있지만 비록 공동성명에 "민족의 피"를 내세웠지만 이북은 민족은 고사하고 가족이라는 개념도 마구 흔들어 놓아서 가족찾기 운동이라고는 하나 그런 소리를 자기들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기 때문이며, 우리 정부측에서도 대화있는 대결이니, 양체제의 경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대화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내적인 담, 인간관계, 사상의 담을 넘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늘의 담은 국가나 민족간의 담만이 아니다. 우리는 동서, 남북, 빈부의 담, 세대의 담 등 무수한 담이 점점 가중해 가는 현실 앞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겹겹히 쌓아진 담들에 차단되어 질식 상태에 놓여 있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담과 담 사이에 고립된 전형적인 군상인지 모른다. 이것이 위와 아래 사이의 사고, 힘, 경제 등의 유통과정을 차단하여 점점 쇠잔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현실앞에서 우리는 정치적 수법, 경제적 기교 아니면 기술과학의 발달에 기댈 것인가? 오늘 같은 세계체제를 그대로 두고 그런 것들이 발달되면 될수록 높아질 것은 담뿐이다. 말하자면 네 것 내 것의 분계선을 뚜렷이 함으로 이것을 피차에 침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길들일 뿐이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강력한 권력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게 된다.

2. 막힌 담을 헌 사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 또는 몸으로 이 원수의 담을 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고백이다. 그 원수의 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사선과 같은 담이 언젠지 모르게 헐렸다. 그것은 원수되었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이미 같은 믿음, 같은 희망을 가진 공동체를 이룬 데서 발견했다.

그러므로 그 이상 "외국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같은 시민이요 하느님의 가족이" 됐다. 어떻게? 그것은 정치적 수법으로나 무력으로나 외교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한 일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 바로 이 고백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그 담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담이었다. 유신론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으로 표방됐으며 무신론은 "하느님도 없이, 희망도 버리고" 현재 손에 잡힌 것이 전부라는 생활로 구체화 됐던 것이다. 만일 이들을 그대로 둔다면 그들이 싸우지 않는 길은 담을 높이고 분계선을 만들어 사람들로 제 것에 만족하고 남의 것을 인정하도록 길들이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은 유대교의 유신론의 표말인 조문으로 된 율법과 이방의 현실주의를 폐기함과 동시에 그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림으로 둘을 하나의 새 존재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평이다. 이 짧은 본문에 평화(eirene)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 "그리스도는 화평이다", "둘은 그 안에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고", "먼데 있는 사람에게 화평,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도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의 화평이란 무사주의나 안일주의와는 무관하다.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담을 그대로 두고) 피차를 무마해서 싸우지 않게 하는 것은 오늘의 미국을 중심한 서방측의 화평의 정책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화평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흡수, 통합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공산세계의 실현을 위한 공산주의의 방법이다. 참 평화는 기득권을 철폐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기득권을 빼앗아 다른 쪽에 넘기는 따위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제3의 거점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기득권도 이방인의 기득권도 아니다. 이 두 기득권은 그 사이의 담이 헐림과 동시에 박탈됐다. '그리스도 안'이란 유대인과 이방인이 자기 자리에서 뛰쳐나와 유대인이요, 이방인, 성전이요, 노예, 남자요, 여자라는 담이 언제 무너지고 그렇게 한 공동체가 된 것에 놀랬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것은 모든 국경과 민족 사이의 담이 없는 듯이 아무 저해 받는 일이 없이 세계를 제 집인 양 진출할 수 있었다.

우리의 남과 북이 회담을 할 때 그 통로를 연 것은 십자가라는 제3의 기폭 아래서 가능했다. 말하자면 태극기로 이북에 갈 수도 없었고 공산당기로 이남에 올 수 없었다. 십자가기로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은 기득권을 안고 드나들 수 없으며, 정치나 경제적인 무엇도 직접적인 통로일 수 없음을 말한다. 색이야 어떻든 적십자의 표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제3의 거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십자형'을 그렇게 싫어하는 공산정권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물론 십자가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표식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 것이며 그 정신의 밑바닥에는 그리스도 정신이 깔려 있다. 물론 그 본래 정신은 퇴색하고 평면화됐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참 평화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상징할 뿐 아니라 오늘의 이 인류의 위기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세계의 참된 화평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3의 화평의 초석인 그리스도 정신은 그리스도교가 자기만을 위한 아성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는 동안 완전히 퇴색해버리고 또 하나의 담을 쌓고 유대교가 범한 죄를 다시 범하여 역사의 죄인이 됐던 것이다. 그것은 '내 것 '내 기득권'에 집착하는 데서 온 범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두철미 너를 위한 것, 세계를 위한 것, 말하자면 참된 하느님의 화평을 위한 것이지 '내 신앙' '내 교회' '내 교파' '내 기득권'을 위해 생긴 사건이 아니다. 아니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회의 의미는 또 하나의 자기를 위한 집단, 이른바 우리를 위한 집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는 제3의 거점으로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루가는 교회의 탄생을 오순절에 두었다. 그런데 오순절의 특징은 바로 단절된 언어의 담을 무너뜨림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평은 오늘의 그리스도교. 스스로를 위해서 폐쇄적인 오늘의 그리스도교를 심판한다. 한걸음 나가서 교파주의 같은 것은 이미 화평의 복음을 전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3. 새 세계의 건설

제3의 거점을 갖지 않은 자의 파괴는 파괴를 연속할 따름이다. 참 파괴란 참된, 새 것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기존의 담을 헌 까닭은 새로운 '하느님의 집', 즉 새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이 새 세계는 제3의 거점인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고 건설되는 하느님의 집이다. 하느님의 집이란 물론 또 하나의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유대 성전을 재건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의 그리스도교화가 새로운 하느님의 집을 건설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집을 건설함이 아니다. 정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집을 건설하려면 오늘의 그리스도교회라는 지평을 넘어서서 전 인류, 전 역사라는 지평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실이요 '그리스도 안'의 뜻이다. 그리스도교회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것 자체가 건물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머릿돌이 돼야 한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자기를 비우는 데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자기추구만 계속하는 서구의 교회 건물들은 일부 노인층 외에는 찾는 이가 없을 뿐 아니라 세계사를 결정하는 대열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약화됐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관찰이다. 이미 교회와 담을 쌓고 있는 이들은 무너진 담 밖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감추면서 제3의 거점 위에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전통적인 표현대로 보이지 않는 교회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화평의 정신은 낡은 담을 헐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하나 하나 머릿돌 위에 새로 세워지는 벽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저들은 "둘이 합하여 새 사람 되는" 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인간혁명의 운동이다. 저들은 인간혁명은 제3의 거점에 옮길 때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의 정신이다. 저들은 현재 유지를 위해 세워진 담에 도전한다. 까닭은 그것이 새 사람의 길을 저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낡은 담을 점점 견고히 하는데 주력한다. 그리고 그 담 안에서 자기의 안주만을 모색한다. 내 교파의 확장에 혈안이 되고 담 밖의 현실을 외계로 단정하고 무엇이 일어나든지 오불관의 배수진을 친다. 그러나 '외계'(外界)의 비극의 여파에 둔감하기 위해서 계속 자기를 몽롱하게 하는 '위로'의 말로 길들여진다. 그러므로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저들은 이미 우리 한국의 미래를 위한 대열에서는 소외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그리스도의 본 뜻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다. 까닭은 저들에게서 참 새 세계의 건설을 위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너', 세계 또는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존재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나타난 대로는 극히 적다. 그러나 저들은 최소한 민족적 차원에서 민족의 미래를 보고 싸우기 때문에 저들은 이 민족의 미래 건설의 대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저들은 자신들을 수호하는 담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나왔기에 낡은 관점에서 보면 불투명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조문으로 된 계명"을 도말한 대열에 섰기 때문에 저들은 새 세계의 주인공들이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중대한 시련기에 처해있다. 세계적으로 있는 담을 그대로 견고히한다는 고착적 화해의 움직임속에서 이른바 '대결있는 대화'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있을 뿐 어떤 제3의 거점도 못 가졌기에 피비린내 나는 승부 없는 투쟁 속에 휘말릴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마당에서 한국에서 상당한 수가 조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사명으로 받았는가? 여전히 사적 복락에만 몰두하는 종교적 이기주의의 그늘 밑에서 피안에로의 노래만 부를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안에서의 세계, 오늘의 인류 사이의 담을 헐고 새 세계건설을 위한 대열에 앞장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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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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