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1. 인간—도상에 선 존재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역시 '의미'이다. 물론 급한 것은 기근, 기갈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제는 되었다' 해지지는 않는다. 사람은 확실히 무엇을 찾아 떠난 도상의 존재다. 그 무엇을 찾아가는 도상에서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지, 먹고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떠난 존재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 '무엇'이 그만 잊어졌거나, 희미해졌다. 이렇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망각병에 걸렸다. 도중에서 이 일, 저 일에 지치거나 잔재미에서 무엇을 찾아 떠났는지를 잊고 있다. '내가 무엇을 찾아 떠났는가?' 그래서 마치 이 물음이 고상한 일종의 종교요, 철학처럼 보인다. 나는 지금의 삶은 페스트 환자를 간호하는 '이반젤린'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물질 구조의 깊이의 신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나'라는 존재가 자꾸 축소되어가는 마당일수록 '나는 왜 사는가?', '역사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한 대학생이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라고 교수를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우리는 왜 이래야 하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바빠만지고 남는 건 의무뿐이다. 왜 이래야 하나? 왜 우리는 이 역사의 악순환에 계속 휘말려 들어야 하나? 왜 그래야하나? 근대화를 위해서인가? '근대화'라니 그게 무엇인가? 달에라도 한번 올라가고 싶다는 건가? 달에라도 한번 오르기 위해서 이런 아니꼬운 것을 계속 보아야만 한다면 나는 달에 오르는 일을 포기하겠다. 아니 테크놀로지가 제시하는 그런 미래는 나의 마음을 달래지 못한다. '나의 삶은 괴롭다'는 것을 거듭 느끼며, 더 이상 위장하고 싶지 않다. 삶은 확실히 고통이다.

로마서 8장 18-30절을 고린도후서 5장 1-10절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의 네 가지 사실—그것은 결국 하나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지금의 삶은 고통이다는 것이고, 둘째로 현재 우주(피조 세계)가 신음한다는 것, 셋째로 그것은 새 인간이 나타나기 위해서라고 하며 그리고 넷째로 꼭 영광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래, 즉 우리가 찾아 떠난 그것은 무엇인가?

2.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피조물의 한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4절에서 '이 장막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합니다'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차라리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살기를 원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로에 의한다면, 삶 자체가 즐겁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삶이다. 인생은 고해(苦海)이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신음한다고 본다. 그래서 22절에서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함께 신음한다'고 말한다. 그 피조물 중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아니, 피조물 뿐만 아니라 성령도 '친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느님께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26)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바울에게는 이 자연 전체가 신음하는 것으로 보였을까? 우리는 이것이 우선 그의 심정의 반영이라는 일면을 시인해도 좋을 것이다. 눈물어린 눈, 신음하는 마음으로 본 자연이기에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바울은 일시적 감상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이 자연관은 창세기 3장에 근거한 묵시문학적인 우주관에서 있다. 자연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관은 실존적이다. 인간의 이성이 자연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병든 자연이고, 자연의 잔인성도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은 확실히 변질되었다. 그것은 질서의 혼란에서 온 것이다. 질서가 혼란되었기 때문에 자연은 변질된다는 것이다. 동물학자 중에는 지금의 맹수들의 포악성은 그 상황에서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약육강식의 혼란된 질서가 동물들에게 경쟁을 시키고, 그래서 힘있는 놈은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 더욱더 포악한 면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자와 어린 양과 뛰놀고,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고 표현된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아주 흥미로우며, 이것은 곧 질서의 회복과 원래의 자연상태로의 복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바울은 결코 비관론자로 떨어지지 않는다. 즉, 유심론자들처럼 이 현실을 아름답게 그리고 즐겁게 보면서 현실은 고통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모순에 끼어 고뇌하는 현실을 그대로 체험하고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장차 오고야 말, 만나고야 말 영광의 미래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웃고 살 수 있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바라봄으로써다. 보다 나은 내일, 보다 나은 자식, 보다 나은 관계, 보다 나은 새 나라를 보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미래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난 영광에 비교하면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비교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이 희망, 이것으로 현재의 고통에 노예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근대화도, 참된 민주주의도, 자식에 의한 성공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또 희망할 까닭이 있습니까?'(24)라고 말하는 것이다.

3. 미래에서 현재를 극복

그러면 바울은 그저 막연한 미래를 향해 신음하고 있는가? 그저 역사의 저 끝에 보다 나은 것이 오리라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 그것은 약속된 미래다. 바울이 보는 미래, 약속된 미래는 좋은 상황(맑시스트들처럼)이 온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온 우주가 신음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새 존재,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위해서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역사관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역사관에는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첫째는 묵시문학파의 종말관인 우주의 괴변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현재의 자연은 나쁜 의지에 의해서 혹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바울은 자연을 별로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언급한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 피조물과 창조주를 뒤바꾼 것(가치전도) 그리고 둘째,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꾼 것(sex)에 대해서이다.

그런 뜻에서 자연은 '허무한 것'에 종속되어 '피조물들이 사멸의 종살이'를 한다고 한다. 지금 자연이 바로 쓰이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온통 산을 깍아 먹고, 강물을 더럽히고, 대기는 오후만 되면 희뿌연 안개처럼 매연 구덩이가 되고, 또 그런 것을 보고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삼라만상은 제대로 밝혀 있지 않은 그런 것이기에 인간성 자체도 그저 그렇게 적당히 오염되어도 괜찮다는 그런 생각에 만성화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구덩이 속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이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이 정말 오염되지 않고, 피조물이 피조물끼리, 혹은 피조물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표어가 있듯이 자연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자연을 닮는 것이 고래(古來)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동양적 인식이며, 지혜다. 그렇기에 곧 자연파괴는 인간파괴로 이어지고, 인간파괴는 곧 또 자연파괴를 가속화시키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을 위한 기술이냐? 그 지능이, 돈이 무엇을 위해 쓰여지고 있는가?

4. 예수와 함께 해방전선에로!

아니, 한국에는 경제제일주의가 판을 쳐서는 안 된다. 이 오염되고 어지럽혀진 세계가 원래의 자리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혁명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 오염되지 않은 인간이 되어지는 그런 인간혁명이 앞서야 한다. 오늘날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거나 그것은 어느 것도 상황에 잘 적응될 수 있는 인간상을 말한다.

바울은 새 인간상을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다. 이것은 바울의 그리스도론의 이색적인 부분이다. 바울은 '하느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를 그의 아들의 형상(The Image of His Son)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을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29)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이제 나타날 새 존재, 새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빌립보서에서는 그가 날 잡은 그 손을 잡으려고 달음박질한다고 한다. 그는 예수와의 관계를 배꼽이 붙은 채로 세상에 나온 쌍둥이의 운명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둘째로, 인간들을 그의 형상(Image)이 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맏아들이 되게 하신다. 즉, 이 인간상은 공동체적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바울에 의한다면, 예수에게 구원은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미래의 일로 남겨져 있다. 그 미래는 그가 앞장선 그 대열에 그를 닮은 공동체가 형성되는 그런 미래에 내가 참여하는 그런 미래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이것은 곧 공동체적인 새 존재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 그것에 속한 인간은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의 의미이다. 이것이 또한 내 삶의 의미이다. 이 자연, 이 역사, 이 삶은 그리고 성령은 결국 이 출현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인간상의 출현을 기다리리면서 몸부림친다. 이 공동체적 새 인간상을 바울은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속량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23)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긍지를 잃고 있다. 우리가 그러면 그럴수록 우주의 운명이 암담하다. 세상의 희망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긍지를 잃어가면 그 누가 이 세상에 희망되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의 불화를 회복할 수 있을까? 우리들이 긍지를 잃은 채 주일마다 반복되는 여러가지 고백, 여러가지 기도문들을 외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념, 우리의 신앙, 우리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는 추도사일 뿐, 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그 세계에 그리스도의 승리를 알리는 승전보는 되지 못하고 만다. 우리의 기도는 '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출전의 군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진군해 나간다는 것을 알리는, 선전포고하는 북이다. 오늘처럼 우리의 기도, 우리의 찬송이 비웃음을 사는 때는 없었다.

이러한 오늘, 우리는 새삼 이 바울의 희망대로 우리 주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만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여 신음하는 것을 해방하자. 우리는 이 선 땅에서 모든 것이 불의에 눌려 신음하는 것을 해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열에 참여하자. 그리스도는 이것을 죽음으로 항거함으로써, 거기서 첫 인간상이 탄생된 것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