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여 나는 아직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으로 앞으로 기울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위를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바울은 두 관점에서 자기를 보고 있다. 하나는 과거 속의 자기와 다른 하나는 미래(오고 있는) 속에서의 자기다. 과거에는 자랑스러운 것이 많았다. 그는 본문 4절에서부터 "만일 어떤 다른 사람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전제하고 가장 전통적인 혈통과 가문에서 났으며, 율법상으로 가장 모범적인 종교인이었고, 불의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투쟁으로 그리스도교의 박해의 선봉에 나섰던 이력도 가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자기의 과거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잊어버린다 함은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그런 것을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배설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서 탈출하고, 탈출하려는 자기를 말한다. 이것은 발전된 어떤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볼 때 과거의 자기가 유치하게 보여서가 아니다. 아니! 그 과거가 계속 도전 또는 자기를 포로로 하려는데 대한 결단의 선언이다.
노자(老子)는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라고 했다. 즉,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직 거기 머물지 않을 때만 실은 거기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과거의 업적에서 떠나라는 뜻에서는 바울과 같다. 그러나 그 차이는 질적으로 다르다. 노자가 과거에서 떠나라는 것은 실은 과거에 되도록 오래 머물기 위해서이다. 즉 자기의 업적을 되도록 오래 빛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과거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과거에 안주하자는 처세적인 지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과거(업적)로부터의 철저한 탈출을 말한다. 이것은 과거에 되돌아 가기 위함이 아니라 앞의 것을 향해 달리기 위해서이다. 그 앞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되려고'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위함' 등등 여러가지로 표현한다. 그 앞의 것은 단적으로 참 '나'이다. 참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는 과거를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한다. 그는 참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를 '믿는 믿음'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과거를 버렸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버린 것은 과거에서 얻은 것, 가진 것들을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과거에 얻은 것들을 '배설물'처럼 증오하면서 버려야만 했든가? 그는 그런 것들을 가진 것으로 자기는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것들이 자기의 삶의 보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을 버리되, 배설물처럼 버리는 것은 그런 것들 안에서 내가 산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서 얻은 모든 것이 그것은 주어진 것이든, 노력해서 얻은 것이든지 간에 자기 자신은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히브리인이 됐다는 사실, 바리사이파에 속했다는 사실, 또는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이 자기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가진 것이 바로 '나'일 수는 없다. 존재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가졌다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아니! 존재한다는 것은 가졌다는 이전의 문제이다. 그런데 가진 것이 마치 자기 삶의 보장처럼 안주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자기 존재를 묻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상실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실은 나를 잃어버리게 한 것을 깨달은 그는 그런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린 것이다. 이미 있는 것들에 나를 적응시킴으로써 나의 현재성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그 현실을 감추어 버림을 알았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을 버려 버린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단에서 우리는 그의 현재 견해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그의 인간존재 이해와 대조적인 희랍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
희랍의 인간관은 '코스모스'라는 개념에서 결정된다. '코스모스'란 있는 것 전체를 표현한 개념이다.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은 이미 다 갖추어진, 그 자체로써 완결된 질서이다. 이것이 질서정연하게 제 궤도를 돌 수 있게 하는 것은 영원한 법칙이다. 이 법칙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계속 반복하면서 모든 만물을 생성소멸케 한다. 인간은 이 우주에 속한 한 존재이다. 희랍에서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한 법칙을 알 수 있는 '누우스', 즉 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이성은 본질상 영원한 우주의 법칙과 일치한다. 그래서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곤충이나 초목과 본질상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도 이 영원한 우주의 법칙에 의해서 제 자리가 주어졌고 그것에 따라서 자기를 적응시킬 때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저들의 제신(諸神)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신(神)이라도 이 영원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으며 그 아래 제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차이가 있다면 기능상의 차이뿐이다.
여기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는 자명적이다. 인간은 주어진 이성으로 이 영원한 법칙을 알므로 제자리를 알고 다른 존재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 가면 자동적으로 제 궤도를 따라 돌게 된다. 여기서 삶이란 발견(Entdeckung), 기술(테크닉)이 된다. 사는 것은 바로 이 법칙을 찾아서 그것에 조화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도 같다. 희랍말에서 도덕을 '테크네', 즉 기술이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법칙에 따라서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만 알면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고 자명적이다. 거기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이 법칙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일 따름이다. 자기 현존을 전체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를 다른 자연물처럼 객관화해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를 전체의 한 예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나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한 법칙이 돌아가는 과정의 현상이고 결코 고유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마주 선 너도 전체의 한 예에 불과하다. 이런 이해에서 사랑을 말한대도 어느 특정한 사람에 특유한 사랑은 있어서도 안 되고 소위 '박애'만이 있어야 한다. 너나 나라는 구체성(역사성)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현상이고, 있는 것은 영원한 법칙뿐이다. 이 마당에서는 나니 너니라는 구체적인 존재나 지금이라는 역사적 현실이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이런 다양한 현상들을 통해서 그 영원한 법칙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관계에선 저들이 자유를 말할 때에도 바로 나니 너니, 이때니 저때니 하는 구체성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자유란 개체로서의 내가 궁극적인 영원한 법칙에 몰입하는 일이다. 따라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라는 구체적인 것, 개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전체 속에 흡수되는 나의 비역사화가 된다. 여기에서는 비약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나를 전체에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삶의 법칙과 그 과정을 방해하지 말고 기술공이 기계를,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듯 자기 삶이 비역사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면 씨를 심으면 싹이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마침내 열매를 내고 쓰러지는 식물처럼 인간의 삶도 그런 과정을 밟게 된다.
이러한 인간관에서 보면 '현존'이란 한 원형으로 된, 영원히 돌고 도는 쇠사슬의 한 고랑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며, 내일은 오늘의 연속일 것이다. 오늘의 육체는 어제의 그것의 연속이며 내일의 육체가 어제의 그것의 필연이듯이, 내 삶도 현재는 어제의 연속이며 내일이라고 달라질 것이 없다. 새것이란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이미 있는 것의 발견 또는 그것의 발전일 뿐이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필연뿐이고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이말은 사건이란 없다는 말이다. 법칙만이 있는데 무슨 사건이 있겠는가? 자유가 없는데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제신도 인간도 곤충도 결국 이 법칙에 자기를 적응하는 길 뿐이다.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특히 불교를 통해서 이와 본질상 같은 인간관에 젖어 있다. 따라서 '현존'이랄 때에 그것은 어제[原因]의 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해버린다. 숙명적이다.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현존은 어제의 업보이다. 그러니 현존은 빚꾼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삶은 어제 진 빚을 갚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현존은 어제에서 이어받은 유산으로 채워졌다. 즉, 어제가 갖다준 유산으로 사는 것이다. 즉, 과거가 현존의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에서의 탈출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주장은 웃음거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기편에서 보면 과거에서 손을 뗐는지 몰라도 과거는 여전히 그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갔다고 해야 말뚝에 비끌어 맨 줄의 길이 만큼 나가보는 어떤 짐승처럼 과거의 줄의 길이 만큼 나가보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과거에서의 탈출을 선언한다. 이것은 그가 법이 지배하는 현실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 그는 바로 그 현실만이 있는 것의 전부라고 알고 그 안에서 가장 철저하게 살아온 과거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이 현실을 전부로 알고 그것에 적응해서 사는 삶을 '율법에 의한 나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한다. 성격적으로는 그가 말하는 율법과 희랍의 영원한 법칙은 다르다. 그러나 법이라는 원칙, 기존적인 것으로서 사람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이라는 뜻에서는 같다. 그런 뜻에서 과거의 그의 삶은 '율법에 의한 나 자신의 의'란 영원한 우주의 법칙에 적응함으로써 자기를 산다는 희랍적인 삶의 이해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다. 그는 이 율법을 알므로써 그 안에서 제자리를 알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자기를 산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바로 이러한 자기 이해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현존의 이해가 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과거의 그는 '현존'은 자명적인 것으로 알고 그것을 보장하고 수호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현존한다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고(확정된) 그 전체에서 이제 이 삶을 위해서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서 그는 그의 현존이 결코 자명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기 책상이나 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명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무엇이 그 현존에 대한 물음을 자명적인 것처럼 덮어 두게 했나?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사이인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는 이런 사실에 안주하고 있는 동안 "이런 것들이 곧 나다!" 해진 것이다. 가진 것이 내 현존에 대한 물음을 은폐해버린 것이다. 그는 그의 가진 것에 도취해 있는 동안 자기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사람은 다른 자연물이 있듯이 존재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처럼 지금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존이 아니라 현재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존재가 자명적인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 그럼으로써 '현존'한다.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물음으로써 어떤 다른 존재하는 것보다 비참해질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느냐? 어디로 가는 것이냐? 결국 죽음에로의 존재가 아니냐! 이렇게 문제로 하는 데서 불안이 오고 고뇌가 따르고 또는 절망에 빠져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물음으로써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물음에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 아래 살면서도 그것에 예속되지 않고 전체 속에 살면서도 전체에 흡수되지 않고 '나'로서 책임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을 하지 못하게 자기 눈을 가리운 것은 바로 그 '자랑스러운' 가진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바울은 그런 것들을 배설물처럼 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참 나를 찾으려는 것이다.
"나는 가졌다. 이것은 내가 살고 있는 증거다" 이처럼 생각해서 가진 것을 소중히 알고 거기에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 "나는 가졌다. 그런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곧 정착되기는 쉬운 일이다. 그랬기에 바울은 그가 가진 것을 자랑함으로써 자기 삶을 시위했다. 네가 무얼 가졌느냐?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가졌다! 즉 남과 비교해서 보다 더 가진 것에서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과 나는 별개의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을 버린 것이다. 그것을 버린 것은 과거의 자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과거)과 나를 어떻게 유리시킬 수 있는가? 바울은 바로 나와 가진 것은 유리될 수 없다는 그 생각을 버렸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을 버리는 일 자체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곧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또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되려고' 이런 것들을 버렸다고 한다. 그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또는 그 안에서 자기를 찾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버렸나? 그리스도를 바꾸어 가졌나? 아니 '얻으려고' '발견되려고' 해서이다. 아직 그런 현실에 돌입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나는 …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거듭거듭 말한다. 그럼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존'뿐이다. 이 현존은 가진 것이 없다. 이 현존은 오직 버리고 얻으려는 그 틈에 있다. 탈출하고 향해 가는 '이 순간'만이 있다. 즉 현존이란 '탈-향'(脫-向)일 따름이다. 바울은 이러한 현존을 똑똑히 밝혀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현존을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뿐입니다"라고 한다. 즉 도상에 있는 존재이다.
현존! 그것은 가진 것이 없다. 현존! 그것은 가난하다. 그는 그 자체에 어떤 보장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으로 사느냐 또는 나로서 사느냐의 두 갈래 길에서 결단함으로 잃었던 자기를 찾은 것이다. 그런 뜻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에 박수를 보낼 만하다. 왜? 가난한 것은 과거에 매어 있지 않은 증거이다. 이제 그에게는 오고 있는 것(미래)뿐이다. 그는 온몸을 이 오고 있는 미래를 향해 개방하고 있다. 미래를 향해서 활짝 연 그것이 그의 현존의 모습이다.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가능성만이 있다. 이제 그는 가진 것에 자기를 은폐하여 자기 현실을 도피하는 자가 아니고 나는 나로서라는 책임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물을 것이 있다. 그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다는데 그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인간존재를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한 것은 이런 질문의 대답으로 볼 수 있다. 현상학적으로 보면 사실 앞에 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현실을 피하지 않고 또 그저 끌려가듯 그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달려가서 그것을 앞당겨 온다면 그는 그때 자기를 찾은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라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로 향해 달린다고 한다. 그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몸에 지닌다"고 했다. 그는 확실히 죽음을 앞당겨 산 사람이다. 그는 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왜? 그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죽음은 벌써 법칙 아래 있는 죽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벌써 법칙 아래서 오는 죽음을 탈출한 것이다. 그것을 그는 "나는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즉 법의 세계, 필연의 세계에 대해서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지배하는 영역 밖에로 탈출한 것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연물의 부분으로서의 동물이거나 또는 객체가 아닌 주체적인 실존을 찾은 것이다. 이제는 자기가 타고 있는 바퀴가 돌아가는 데 따라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자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는 닥쳐오는 것과 직접 맞부딛치면서 살아야하는 책임적인 존재다. 무엇이 닥쳐올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는 것과 맞부딛치면서 패배하거나, 아니면 삶을 창조해 나가야만 한다. 이제는 삶은 순풍에 돛단 배처럼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적으로 개척해야 하는 비연속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삶은 사건이다! 바울은 나로서 살기 위해 이러한 '모험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겁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기를 원해서 뛰어든 것이다. 그 까닭은 그럼으로써 그의 부활 즉, 잃은 자기를 다시 찾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는 아직 잡았다(찾았다)고 하지 않는가? 왜 아직도 앞에 것을 향한 자기만 말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현존을 '여기 꽃이 있다' '여기 새가 있다'와 같이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바울의 말을 납득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현존을 과거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현존은 미래와의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 즉 인간의 존재성은 사건적임을 알면 그의 말은 그대로 현존의 참 모습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인간의 사랑을 생물적인 발로라고 이해하면 동물적인 자기충족과 더불어 자기성취(했다. 잡았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이만하면 됐다가 없다. 거기에는 언제나 "이미"가 아니라 "아직도 아니"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곧 거기서 탈출해서 앞으로 향한다. 사랑에는 '이미(과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으레히 이렇게 발전하지!' 하는 연속성이 없다. 만일 이미 된 일에 머물러 있으면 벌써 그 사랑은 잃어졌다. 이것은 인간의 현존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현존은 언제나 앞으로 향할 때만 찾아지는 것이지 뒤에 매어 있을 때는 잃어진다. 바울이 만일 어떤 순간적인 경험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했든가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것에서 종교적인 교리나 인간관은 수립됐을 수 있으나 그 순간 그리스도도 자기 실존도 잃어버렸을 것이다.
바울은 "아직" 자기는 그를 못 잡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는 나를 잡으셨습니다"라고 한다. 그는 무엇인가에 확신을 얻었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에 안주하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여전히 "아직도 아니"이다. 우리는 그가 잡는다는 말을 '소유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만난다(Begegnung)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참 만남(사무적으로 내 스케줄의 일환으로 만나는 것 같은 것 말고)은 어느 과거에 안착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아직도 아니"이다. 즉 계속 오고 있는 사건이다. 사랑이나 만남에는 저장이란 없다. 이처럼 참 현존도 언제나 가진 것을 저장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다. 그럼에도 공허에서 절망하지 않고 존재가능한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만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과거를 다 버리고도 아직 잡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바로 여기서 바울의 현존의 실상과 그의 이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 이력서와 나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을 본다. 사업 또는 지금의 지위와 자기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는 언제나 밖으로부터 규정받는다. 남의 인정을 절대시할 때 우리는 이런 밖에서부터의 규정과 나를 동일시 해버린다. 밖으로부터의 규정은 이미 있는 것들과 내 가진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규정된 것이 정말 나인가?
우리는 종교인들에게서 같은 현상을 본다. 나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몇십 년을 교회 생활을 했다. 나는 교리를 알고 그것을 지켜왔다. 나는 이러 이러한 경험과 업적을 가졌다. 그러니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우리 삶에서 순간적으로 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평소에 자랑스럽게 생각되던 내 가진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되어버림과 동시에 자신만만하던 내 삶이 공허 자체처럼 보이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내 가진 것들과 내가 유리된 것을 발견할 때이다. 가령 내가 가장 신뢰하던 친구에게서 멸시를 받을 때, 내가 실연을 당할 때, 내 가진 것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내 가진 것은 무엇이라도 다 주겠다는 이 애절함이 완전히 거부될 때! 그때 내 가진 것이 나를 전혀 보장 못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은 굳게 차단된 현존에의 노크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노크소리는 나를 절망의 문을 열고 추락하게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노크 소리에서 비어있는 현존을 발견했을 때, 당황해서 다시 과거의 유산을 그러쥐면 나는 인간으로서 존재함을 포기하고 그저 살아가는 자연의 한 부분인 '현재'로 전락될 것이며, 바울처럼 온 몸을 기울여 앞 것을 향해 달리면 새로운 존재가능성으로서 현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