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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門)
요한 10, 7-16
1. 두 문

요한복음 10장은 '선한 목자장'이다.

그 중에 1-10절까지를 주목해 보면 1-5절까지와 7-10절은 원래 서로 독립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한 기자는 이 둘을 연결시켰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두 그림의 차이다. 1-5절에서는 목자와 도둑(강도)를 구별하는 기준이 문으로 드나드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며, 7-10절에서는 나는 문, 또는 양의 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나'가 11절 아래 있는 그 '나'라면 선한 목자 자신이 문이라는 말이다. 처음의 그림은 목자가 누구를 뜻하는 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 아래와의 관련에서 보면 이 기자는 그 '나'를 가리킨 것임에는 틀림없다. 처음 그림은 그 '나'는 도둑이 담으로 뛰어 넘는 데 대해서 문으로 드나드는 것으로 특징을 지었는데 그 다음은 그 '나' 자신이 문으로 비약한 것이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틴의 양을 치는 풍속도를 알 필요가 있다.

양을 위한 우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당적인 우리와 다른 하나는 임시적으로 가설한 우리이다. 목자는 하루 종일 양을 몰고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이 우리에 양을 몰아 넣고 문을 잠근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열쇠를 맡겨둔다. 이튿날 아침에 목자는 그 문지기에게서 열쇠를 받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양을 불러낸다. 양들은 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를 따라 문으로 드나든다.

그런데 따뜻한 계절에는 양들을 끌고 동리에까지 들어 오지 않고 들에 약식 노천 우리를 만든다. 울타리를 간단히 둘렀기에 문이 따로 없고 양의 출입구에 목자 자신이 앉아서 문 노릇을 한다. 이런 경우에 양들은 그 목자를 문을 삼아 드나든다. 따라서 두 종류의 우리를 염두에 두면 목자는 문으로 드나드는 경우와 그 자신이 문이 되는 경우를 이해할 수 있다.

문! 그것은 참 목자와 도둑을 구별하는 기준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양과 이리와의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목자와 양은 문으로, 도둑과 이리는 문아닌 문, —그것은 뚫린 구멍이든, 담을 뛰어넘든지 간에—으로 드나든다.

2. 문은 가능성

본문은 예수를 문을 열어주고 닫는 선한 목자라고 했다. 아니! 그가 바로 문이라고 한다. 그가열어주는 문, 아니! 그를 통해서 드나들면서 사람은 꼴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 예수가 하나의 문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다. 말하자면 갇히어 있는데서 탈출할 수 있는 문이 됐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주의의 울타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문이 됐다. 유대인은 율법이라는 울타리에 하느님도, 그리고 자신도 가두었다. 그러므로 위로나 밑으로 또는 옆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버렸다. 그러므로 독선과 독립,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들은 세계에서 이방인, 저들에게는 세계가 모두 이방인이 됐다. 저들에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그 '패스포드'는 할례를 중심한 율법이다. 그러나 저들이 나올 문은 없었다. 예수는 그의 몸으로 이 울타리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는 죽음으로 문이 됨으로써 미래(하느님 나라)에로 탈­향(脫-向)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완고한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의 소외된 세리나 죄인, 창기들에게 무조건 문을 열어 제쳤다. 당시에 저들에게는 모든 문이 다 닫혀 있었다. 예수는 저들에게 아무런 패스포드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는 모두 그렇다. 성주가 문을 활짝 열고 아무나 오라고 한다. 탕자의 비유같은 것은 배신한 아들을 기다려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는 아버지를 그렸다. 또한 예수의 죽음은 헬레니즘의 세계에 문을 개방했다. 아니, 그 자신이 문이 됐다. 그는 '코스모스'라는 차단된 세계관 아래서 형성된 모든 관념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고 새 가능성에로 향하는 문이 됐다.

문은 가능성이다. 바울은 이런 뜻으로 문이라는 말을 잘 쓴다. "크고 유효한 문이 내 앞에 열려 있고"(고전 16, 9) "드로아에 갔을 때 주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려 있었지만"(고후 2, 12) 등이 그 예이다. 사도행전 기자도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14, 27)라고 표현한다. 요한묵시록에는 위대한 표현이 있다. "내가 네 앞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열어 놓았다"(3, 8) 이것도 활짝 열린 새 가능성을 뜻한다.

3. 문은 닫기 위해

그러나 문은 열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닫기 위해서도 있다. 가능성이라고 해서 무시간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문은 열 때와 닫을 때가 있듯이 가능성이란 때와 관련이 있다. 문은 열려 있는 동안만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닫히면 들어갈 수 없다. 아무때나 드나들 수 있는 것이 문이 아니다. 그것은 때가 있다. 그런 뜻에서 문은 하나의 기회이다. 그런 뜻을 성서는 그림으로 나타낸다. 가령 열 처녀의 비유가 그렇다. 때를 맞추어 둔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때를 놓친 다섯 처녀에게 이미 문이 닫히어 "주여, 주여, 문을 열어 주십시요"라고 해도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마태 25, 11). 루가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면서도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이여, 문을 열어 주십시요'라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한다(13, 25). 우리는 이런 상태를 중세의 성을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낮에는 문이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문을 전부 닫아버린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성주의 허락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문에는 열쇠가 잠겨 있다. 이 문을 잠그고 여는 것은 열쇠를 가진 이만이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문은 인격과 직결됐다고 하겠다. 그 문은 열쇠를 가진 자의 허락에 의해서만 열고 닫을 수 있으며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하고 그 문의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은 책임적인 존재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허락받지 않고는 문으로 드나들 수 없으며 허락되어 있지 않은 길은 아무리 뚫려 있어도 문이 아니고 구멍이다. 이런 구멍으로 드나들면 그것은 도둑이요, 이리이다. 문이 있는데도 문으로 드나들지 않고 다른 데로 드나드는 자는 허락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자이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이다. 그는 무엇인가 훔치려고 들어오는 자이다. 그런 뜻에서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사람은 각기 자기의 문을 가졌다. 이 문을 닫고 여는 열쇠는 인격이 가졌다. 그는 이 문을 열고 닫을 때 책임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이 열쇠는 하느님도 뺏지 않는다. 그러기에 구약의 시인도 "문들아 열리어라, 여호와가 들어가신다"고 했으며,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이"도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한다. 즉, 열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문이다. 그곳은 너와 내가 만나기 위한 자리이다. 문 이쪽과 저쪽의 사람들은 서로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써 서로 그 음성, 그 이름을 안다. 서로 모르면 아무리 열려 있어도 그리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결국 열린 대로의 닫힌 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은 너의 문이면서 나의 문이다.

4. 문턱에서 가로막는 것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문, 그리스도가 열어 놓은 문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 예수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문턱에 앉아,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여 보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저들은 열린 문턱에 앉아서 스스로 문노릇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이러한 파렴치한 짓을 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문턱에 어떤 특수한 교리나 제도를 만들어 놓고 이것으로 열린 문을 가로막고 대신 문노릇을 했다. 저들은 사제(私製)의 '패스포드'를 만들어서 스스로 파수꾼 노릇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가로막고 쫓아 내려고 했다. 종파주의 따위는 이러한 사제의 열쇠를 제 손에 틀어 잡고 그리스도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했다.

또는 그리스도교는 자신안에 파벌을 형성해서 울타리 안에 또 하나 울타리를 두르고 문을 굳게 잠가 버리는 일을 해왔다. 내 주장, 내 고집, 내 기득권, 내 타성 따위는 언제나 낡은 집의 사제의 문으로 등장한다.

천국의 열쇠를 내가 받았다고 주장한 교회! 그것은 복종하는 종의 의식이 철저했을 때는 귀중한 책임의식을 뜻했다. 그러나 모르는 동안 그 열쇠의 행사권을 주인에게서 뺏고 주인의 허락없이 제멋대로 틀어 쥐고 자기 기준에 의해서 문을 열고 닫는 행사권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이 중세기 교회의 교만이었으며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치열한 권력 싸움으로 번지게 됐다. 이러한 것은 주인의 존재를 무시한 반역의 행위이다. 저들은 참 문을 물리치고 사제의 문을 만들어서 불순한 통행세를 착복한 데 그치지 않고 마침내 그 주인마저 감금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주인을 가두어 두고 그 권위를 팔아서 절대권을 행사했다. "오직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외친 것은 바로 인간의 운명의 열쇠는 제도적인 교회만이 독점했다는 선포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 주인은 그 안에 있지 않았다. 그 주인은 새로운 성을 쌓았고 새로운 문을 만들고 새 열쇠를 장만했다. 그 성, 그 문, 그 열쇠는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열쇠는 사람에게 주되 어떤 조직의 대표에게 준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인격에 주어졌다. 이것이 종교개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보다도 전에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참 문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의 문들과 구별하기 힘들다. 그래서 문과 구멍(사제 문)과를 착각하여 실패를 거듭한 사람들이 많다. 저들은 실패와 실망에서 열린 문을 마다하고 자기의 문을 꽉 닫고 고독의 애가를 부른다. 엘리어트의 『칵테일 파티』의 주인공의 말처럼 문을 굳게 잠그고 문이 있으되 문 고리가 없으니, 원래부터 있는 것은 단 독자로서의 자기뿐이며 그것은 본래 하나의 감옥이니 나갈 데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열린 문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도둑놈에게 쓴 경험을 한 사람이 친구의 문 열어 달라는 목소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문을 굳게 잠그고 귀를 막고 있는 경우와도 같다. 그런가 하면 문에 대한 회의에서 아무리 문이 있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고 카프카의 <성>의 주인공처럼 성 밖에서 빙빙 돌면서 그리움에서 외로워하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리스도는 "나는 문이다"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나는 훔치려는 강도나 도둑과 다르다고 한다. 나는 삯군처럼 너를 버리고 도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초대의 소리는 벌써 문인줄 알고 들어갔다가 약탈을 거듭당함으로 회의주의에 빠진 무리들을 전제한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어떤 문을 만들었다거나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패스포드'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 자신이 문이라고 한다. 그 자신이 진리를 가졌거나 길을 가르쳤다거나 삶을 제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것처럼 그 자신, 그의 삶, 그의 인격 자체가 곧 문이라고 한다.

5. 문이 있어도 못들어가는 현실

우리의 현실은 문이 많으면서도 없고, 문이 없으면서도 있기 때문에 비극이다. 우리에게는 극장문, 회사문, 관청문, 학교문 등 무수히 많은 문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열려 있으면서도 닫힌 문이다. 까닭은 그 문을 통과할 '패스포드', 입장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보이지 않는 문도 얼마든지 있다. 피부색의 문, 민족의 문, 이데올로기의 문, 기성 세력의 문, 이러한 무수한 문들이 인간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 인간들은 이 문들을 열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 그 문을 깨기 위해 폭력을 쓰고 쿠데타를 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전쟁을 한다.

우리 땅에도 문은 많다. 그러나 모두 닫혀 있는 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식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 문들은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문들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열쇠로(master key) 다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만능의 열쇠는 '돈'이다. 돈만 있으면 다 열리는 문! 그러니 그것은 문이면서 문이 아니다. 그것들은 뚫린 구멍들이다. 문이 없으니 인격이 있을 수 없고, 질서나 정의는 물론 없다. 그래서 무법의 천지로 화했다.

무엇을 하는 데에도 문이 있다. 스포츠에서는 경기법칙이 그 문이며, 돈을 벌거나 지위에 도달하는 데도 공동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문으로 드나들려고 하지 않고 구멍으로나, 담으로 넘나든다. 그래서 가짜가 범람한다.

대중은 이 문을 무시해버린다. 어디서 누가 뚫었던지 뚫린 구멍이 생기면 그리로 왁왁 몰려 들고 난다. 이래서 문은 서울 동대문이나 남대문처럼 하나의 골동품처럼 되어버린다. 문! 그것은 필요없다. 실력! 그런 것은 다 필요없다. 담으로 뛰어넘어 출세한 사람들을 따르자! 정당한 방법? 그 따위는 지루하다. 지름길로 가자! 성실? 그 따위는 사치품이다. 꿩 잡는 게 매라더라!! 이런 풍조가 판을 치는 사회! 이런 사회는 인격이 전적으로 무시된 사회이다. 이것은 도둑의 사회요, 삯군이 주인된 사회다. 거기에는 뺏자는 자뿐이고, 책임지자는 사람은 없다. 뚫린 구멍이 이토록 많은 이 사회에 힘의 집결이 있을 수 없다. 구멍 뚫린 독에 물붓기다.

따라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뚫린 구멍부터 막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문으로 모두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문 아닌 구멍으로는 통과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강도에게 쫓기어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 채 그 앞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담을 넘거나 구멍을 뚫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문이다! 이 소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야 할 부름이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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