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1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한 권고이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나 바울에서 많이 본다. 본 뜻은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믿으라는 것은 도피구가 많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고 하면서 그를 내 삶의 튼튼한 후견인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청년이 무슨 의논을 하러 온다. "글쎄,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걸!" 하면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한다. 자기 결단은 보류한다. 후에 보면 내가 원했던 것과는 다른 길로 간다. 원래는 '나를 따르라' 해야 하리라. 이렇게 했다면 그에게 변할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자신이 우리에게는 없다. 석가는 최후에 "나를 따르지 말고 내 한 말을 따르라"고 했다. 니체는 "나를 따르지 말라"고 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다. 그런 것은 다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따르라는 것은 완전히 내게 너를 맡기라는 뜻이다.

언젠가 해인사에서 소승이 '나만 따라 오십시오'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 예수를 따르는 혹은 따르려는 자에 대한 세 가지 예가 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뜻을 배우자.

2

첫사람: 그는 예수를 자진해서 따르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말은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는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그게 원래의 따르는 자의 결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든지'라는 한계를 생각하고 하는 말인가? 사랑하는 순진한 소녀가 "당신과 만이라면!" 과도 같이 들린다. 그럴 때는 행복하리라는 전제만이 있는 법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루가복음서는 기록이 없다. 마태오에는 서기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이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은 신학, 율법을 배우기 위해서인가? 그러나 루가에는 그를 특정인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했다.

왜 예수는 이런 반응을 했을까? 여우와 새는 굴이 있고 보금자리가 있다. 즉 제가 휴식하고 은거할 거점이 있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내 머무를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집이 없다는 뜻인가? 그러나 루가에는(9, 1) 그의 어머니와 형제가 가파르나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여우'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암몬족의 속칭이다. 암몬은 유대인과의 정치적 원수이다. '여우'같다는 말은 우리 말에서도 간교하다라는 증오심을 포함한다. 신약성서에서도 헤로데는 '저 여우'라고 한 데가 있다.

새 또는 공중의 나는 새(마태오)는 이방인을 표현할 때 잘 쓴다. 그것은 남이 지어 놓은 곡식을 공짜로 먹어버린다는 뜻도 있는 듯하다. 즉 침략자다. 그래서 에돔이나 로마인을 그렇게 부른 기록이 있다. 우리 말로 오랑케, 왜놈이란 뜻이 통할런지도 모른다. 하여간 둘 다 가장 싫어하는, 경계해야 하는 미움받는 상징이다. 그러나 저들에게도 굴이 있고 보금자리도 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잡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쫓기는, 그리고 미움을 받는 자는 여우나 새보다도 더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고백이다. 얼마나 고독한 자의 소리인가? 이 말은 그의 생애를 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가 어디 머리를 둘 곳이 있었나! 그 민족, 로마인 심지어 제자들에게까지 종말적 실존의 반영이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했다. "너를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라. 너를 미워하기 전에 나를 미워하리라. 까닭은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니!"

즉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땅안에 살면서도 이 땅에 삶의 거점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면서도 거기 매이지 않고, 오고 있는 미지의 미래에 밧줄을 던지며 새 천지에 상륙하려는 모험자처럼 그런 그리스도의 길이다.

어디든지 따르리라고?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 길은 네가 이미 가진 것을 더해 주거나 그보다 더 화려한 것으로 대치되는 그런 길이 아니다. 아니 네 일체의 가치관, 행복 따위는 단절돼야 하는 길이다.

네가 나를 따르려면 이 과정 없이는 새 세계에 갈 수 없다. 마음대로 결정해라. 제자들이 예루살렘 도상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대한 꿈에 취하면서 그를 따를 때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와 유사하다.

흔히 천재는 고독하다고 한다. 그것은 천재는 그 시대에 한걸음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가 인정받는다. 그래서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말은 이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기에 고독한 게 아니라 "영원히 방랑하는 유대인"처럼 이 세상에서 원칙적으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기에 고독하다. 저들이 어느 때인가 이 세상에 합류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 몸을 맡기고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길을 결단할 수 있느냐? 그가 어떻게 결단했는지의 뒷얘기는 없다.

둘째 경우는 좀 다르다.

이번에는 예수가 만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위급한 것이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고 봤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첫 사람에게는 예수가 일단 거리를 둔 데 대해 이 사람은 자신이 일단 거리를 둔다. "먼저 제 아버지를 장사하러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그를 따르라는 것을 거부한 게 아니다. 단지 먼저, 우선 그 전에 해야 할 정리할 일을 처리하고 나서 하는 것이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죽은 아버지 장례를 지내는 것은 십계명과도 관련된 자식의 임무다. 일상적 너무나 당연한 '먼저'이다.

그는 모범생이다. 계획성이 있다. 그러나 일상성이라는 것 외에 비상시를 계산했기에 모범생이다. 무엇이 '먼저' 할 일인가? 그 '먼저'의 순서를 언제나 고정되는가? 이에 대해 예수는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과격한 말씀이다. 그래서 르낭(Renan)은 이 말은 인간의 사랑, 가정의 신성한 의무를 짓밟으며 삶의 기쁨, 사랑의 기쁨, 감정의 희열을 잊은 말이라고 한다. 확실히 잔인할 정도이다. 그러나 문제는 '먼저', '후에'의 순서를 평상시처럼 지키게 돼 있지 않다. 지금 당장 종말이 온다. 지금 집에 불이 붙고 있다. 지금 전쟁이 터졌다. 이런 때는 '먼저', '우선'이 달라진다. 지금 아이가 차 사고를 냈다. "먼저 화장을 하고 나가지!" 하는 엄마가 있을까? 그게 옳은 태도일까? 이것은 확실히 비상시를 말한다. 먹고 입는 일은 '먼저'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러한 마음의 태세여야 한다. 보통때는 가계부에 따라 돈을 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는 '먼저' 하고 다음에 따지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할 게 있다. 병자를 놓고 '먼저 입원수속부터'인가? 그것은 일상성이다. 그런데 지금 빨리 손을 대지 않으면 죽는 판에 '먼저 입원수속인가'? 이러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도 그렇다면? 그럼 그를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로 장례하게 하리라. 여기 죽은 자라는 육적 정신적인 죽은 자를 구별한다. 과거를 사는 자들에게, 일상성에만 매인 자에게 죽은 자의 장례를 맡겨라! 네 할 일은 따로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련다. 이런 선한 일을 하련다. 참 그리스도인 답게 … 그러나 첫째 '우선'은 하고 나서 그리고 새 출발하는 사람을 본 일도 없지만 그것은 현재의 자책감을 모면하는 일이다. 그것을 다하면 또 그것이 꼬리를 물고 계속 우선권을 주장한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게 아니다. 결단의 기회, 한번 남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때 일상성 '먼저'가 바뀌어질 수 있어야 그게 참 인간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내게 지상명령이 내릴 때 '우선'의 순서는 바뀌어야 한다.

서양 격언에 "지옥 가는 길은 잘 계획되고 포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자기는 지금 제 임무를 뒤로 미루면서도 언제 "먼저 요것을 하고"라는 것으로 결단을 미루어 간다.

아니 너는 네게 지상명령, 네가 해야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그 일에, 그 사람에게 치명상이 온다고 보이는 것이 있으면 바로 지금, 여기서 당장 하라고 한다. 그런 기회는 다시 안 오겠기에!

셋째는 둘째 경우와 비슷하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것을 빼고 있다. "먼저… 하게 해 주십시오"와 같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해 주십시오." 평상시라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다르다. "손에 쟁기를 집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사람은 아직 지금까지의 관련에 미련을 가진 자이다. 둘째 사람은 의무를 다 하겠다는 것이요, 셋째 사람은 지금까지의 애착을 아쉬워하는 이이다. 가졌던 것이 아까워 다시 한번 보고 만져 보고 떠나려는!

본회퍼는 "쟁기를 가지는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또 꿰뚫어 볼 수 없는, 이제 갈 저쪽도 보지 않고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 다음의 한 발을 내디딘다. 되돌아 보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다. 불안, 슬픔, 죄책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새로운 출발을 명하는 그 분을 우러러 보는 것이 바른 자세다. 그러면 그 분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고 했다.

과거를 청산하고 생활을 정리하고 사랑에 매듭을 짓고 또 죄를 정리하고 그리고 새 출발이란 성서적 요청과는 다르다. 이것이 유대교나 또 다른 종교의 순서이다. 그러나 예수는 청산하고가 아니다. 지금 그대로이다. 그래서 일하던 손 그대로 오라는 것이다.

3

문제는 이상의 말씀들을 듣는 자의 입장이다. 만년대계를 세우라는 윤리, 세계가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내 설계에 따른 '生'을 영원히 구축할 수 있다는 사람들, 안전, 안일주의에 있는 사람은 성서를 읽어도 이런 구절은 싫어한다. 그러나 비상시, 지금 금방 손을 대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를 보는 자, 지금 금방 전환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지금 금방하지 않으면 죽는다 등의 위기를 알면 이 말씀은 진리인 것이다.

우리는 사실 위기에 살지 않는가?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무슨 보장이 있는가? 어떻게 내일로 미룰 만큼 그렇게 자신이 있다는 그런 보장이 있나?

그래서 예수는 지금 곧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