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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1. 자유의 개념

자유란 희랍적 개념이다. 그리고 희랍의 자유란 폴리스와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다. 폴리스는 대우주의 이데아가 땅 위에 구현된 공동체다. 폴리스의 질서는 '누스'라는 우주적 법칙이다. 그런데 이 폴리스 안의 인간은 두 계층으로 나뉜다. 하나는 노예요, 이에 반한 것이 자유인이다. 노예는 생존권의 옹호를 받을 권리도 없고, 또한 폴리스의 형성과 유지에 참예할 정치권도 없다. 이에 대해서 자유인은 폴리스의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와 정치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유인이란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스에 따른 국가의 법을 준행함으로써 국가에 충성하고 목숨까지 버릴 자유가 있는 것이다. 즉, 이 자유의 개념에는 기존질서라는 제약이 있다. 이런 사고는 서구의 전통이 됐다.

괴테는 '법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폴리스가 붕괴되었을 때, 이 자유의 개념은 내면화됐다. 폴리스가 있을 때는 그 법과 자유의 이성과를 일치시키는 데서 자유를 찾았으나 그것이 무너짐으로 자기 안에 있던 영원한 법칙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데에서 자유를 찾았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안의 감각적인 욕구의 줄을 끊고, 자기 안의 질서인 이성에 매달림으로써 외계의 영향에서의 자유를 찾게 됐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것이 스토아철학이다.

2. 성서에서의 자유

성서에는 이같은 자유의 개념은 없다. 구약에서 자유에 해당하는 명사는 없고 무엇에서의 해방이라는 뜻의 자유의 동사만이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성서에서 충성의 대상은 하느님 한 분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국가가 있어도 또 그 국가의 일원으로 그 권익을 위해 싸웠어도 그것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폴리스처럼 영원한 법의 소유체인 국가는 없고 단지 하느님의 뜻을 시행하는 공동체만이 있다.

그럼 희랍의 이데아의 자리에 하느님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데아라는 것은 세계 또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사변적 관조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움직이게 하는 기점이다. 그것은 영원 불멸의 정점(靜點)이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은 동적 의지다. 그는 정점이 아니라 이 세계와 이 역사,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인간을 변화시킴으로 어떤 궁극적인 데로 이끌고 가는 의지다. 그러므로 자유란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함으로 그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가 자유하게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 이 인간을 낡은 것에서 해방한다는 뜻이다. 악한 것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해방 그리고 제도나 낡은 것에서의 자유이기보다 해방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의 자유의 뜻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자유란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해방한다'이며, 이 해방운동에 가담함으로 스스로를 해방하며, 또 이 역사를 악의 세력에서 해방하는 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자유 운동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는 어떻게 자유하게 하셨나? 마르코는 "때가 찼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를 존재케 하는 법칙과 같은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하느님, 낡은 세계를 새 세계로 변화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나라 도래라는 궁극적 현실 앞에 섰다. 그 앞에서 회개하라는 것은 바로 이 낡은 세계에서 자신을 해방하라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 도래의 선포는 그러므로 낡은 세계에 매인 인간에게 주는 신앙의 선언이다.

루가는 이런 자유의 선언을 구체화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시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상은 이사야 61장 1절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다. 이 선언은 "주의 은총의 해"를 전제한다. 주의 은총의 해는 궁극적 해방과 자유의 때로서 성년(聖年) 또는 희년(禧年)이라고도 하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런 궁극적 도래 앞에서 해방과 자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이 그 얽매인 것에서 자유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와 더불어 구체화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쉽게 정신화 또는 '종교화'해버린다. 그러나 본문은 외적 상황과 내적 상태를 구분하는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이사야서는 모든 예언서가 그렇듯이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포로되고 억눌리고 병에 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한 말씀이다. 바빌론 포로의 쓴 경험, 그 안에서 유린된 인권 등 가난하고 무식한 자의 슬픔을 목도하면서 저들에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리어 체념 또는 불신앙에서 희망과 믿음으로 재기할 것을 권고한 말씀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다음 우리는 이 본문에서 눌린 자들의 불쌍한 상태에만 눈을 돌리고 하느님의 돌연한 초자연적 해방을 생각함으로 그 구체성을 간과할 수 있다. 그런데 가난한 자가 있으면 가난하게 하는 자, 묶인 자가 있으면 묶는 자, 눈먼 자가 있으면 눈멀게 한 것, 눌린 자가 있으면 억누르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해방, 또는 자유의 선언이라고 하며 그것은 동시에 현실적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불의한 세력과의 투쟁의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주님의 은총의 해"란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의 때다. 그것은 사회 정치적 차원을 넘어선, 하느님만이 줄 수 있는 새 세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는 사회 정치적 차원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는 왜 하필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된 자의 해방, 자유를 말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산상설교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전제하면서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미움받아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자들을 축복했다[반(反) 마태]. 왜 하필 그런 사람들을 축복했을까? 저들은 윤리나 종교적 가치 판단과 상관없이 순전히 사회, 정치적 부조리 속에서 신음하는 무리들이다. 저들을 축복함으로 자유를 약속한 것은 정치적 동기를 무시할 수 없으며 그들의 해방의 선언은 어쩔수 없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투쟁의 선언이게 한다. 저들의 자유를 위해서는 저들을 속박하는 힘과의 싸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루가는 저들을 축복한 다음, 곧 그 뒤를 이어 '지금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지금 칭찬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다. 바로 이들을 저들의 생존권, 저들의 인권을 빼앗은 장본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정면적 투쟁선언이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 26)고 한다. 이 초대의 말씀에도 윤리적, 종교적 모티브는 없다. 단지 눌려서 강제당하며 무거운 짐을 진 피압박자를 오라고 한다. 단적으로 '인권이 유린된 자는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다. 그런데 저들에게 누가 짐을 지우느냐? 그들에게 이 초대는 무관한가?

이것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와 통한다. 여기서는 윤리, 종교의 모티브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인', '죄인'이란 단서가 붙어야 한다. 즉, 기득권자들이 규정한 의인이요 죄인이다. 죄인이란 그 세계에서 소외된 자다. 그런데 그 소외된 자를 부르러 왔다는 것은 저들에게 어떤 관념이나 제 도덕 구별에서 소외된 저들을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기 위해 왔다는 의미 이상은 없다.

세상이 죄인이라고 단정한 자의 편에 선다는 선언이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한 집권층에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기존 체제에 대해서 너희가 죄인이라고 하는 그 규정이 잘못됐다는 것, 저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선언이 아니겠는가?

이와 꼭 같은 뜻이 탕자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등에 나타났다. 탕자는 이른바 죄인이다. 그래서 저들은 소외됐다, 돼야 한다. 그런데 예수가 저런 자를 무조건 영접하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은 낡은 가치관, 낡은 질서에 대한 전면 대결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맏아들이 대변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나 말씀이 정치적 인간의 해방이나 자유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일면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예수는 인간의 정치활동에서 궁극적 구원이 온다고 보지 않았다. 구원은 하느님께 속한 일이다. 하느님 나라가 궁극적 자유의 현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구축하는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역사의 한가운데 도래한다. 또 예수는 은둔자가 아니라, 바로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여러 계층의 인간을 상대로 했다.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구조적 사회의 일원이다.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이 여러 번 보도됐다. 그것은 그의 교류가 기득권자와의 충돌을 빚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적 관심에서의 행위가 아닌데도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는 불가피성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기본자세는 정치적 권력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것은 이 세대를 악마가 지배한다는 대전제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 도래라는 것 자체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권력층에 두려움을 주는데 이 세대를 악마가 지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들릴 것인가? 예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과 그 나라의 도래를 동시적으로 보았다. 그뿐 아니라 사실상 예수는 악귀 쫓는 일을 계속했으며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명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탄의 개념을 사회정치적 차원과 상관없는 어떤 고정의 종교개념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설령 그것이 정치 차원을 넘어선 어떤 힘이라고 해도 그 세력은 현실적으로 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본 것은 틀림이 없으며, 그러한 정치 차원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루가는 마리아 찬가에서 예수의 오신 목적을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어 교만한 자들이 꾸민 일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 보낸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회정치적 변혁이 아닌가? 마르코는 종말때의 경고로써 그 종말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로 대전제 하면서도 "정신을 바짝차리시오. 당신들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회당에서 매를 맞고, 또 나 때문에 총독과 임금들 앞에 서서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한다. 왜 법정, 회당, 총독, 임금이 박해할 것이라고 하느냐? 이것은 바로 사탄의 세력의 거점으로 본 것이 아니냐? 사실상 사탄이란 오늘에 있어서는 구조악이다. 사실상 예수는 법정에 서고 유대 공회,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처형됐다. 그것은 오해에서 왔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제국의 눈에는 저들의 질서를 파괴하고 위험하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수는 정치 활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정당을 만들거나 젤롯당처럼 폭력으로라도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한 결사대를 조직했거나 민중을 선동해서 기존세력에 저항하는 운동을 일으킨 보도는 없다. 그는 단지 세상을 변혁하자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저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저들을 그 처지에서 일으키고 저들을 억누르는 관념, 제도, 권력 내지 종교와의 결전을 불사했다.

그는 왜 하필이면 갈릴리를 그의 활동무대로 했나? 그것은 예루살렘에 대해서 버림받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왜 죄인, 여인, 어부등 가난하고 눌려있는 계층과 교류했으며, 그 제자들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가졌나? 그는 피지배자의 자유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관심은 농부, 어부, 과부, 어린이, 죄인 등에 쏠렸다. 이른바 죄인을 책망한 데는 한 곳도 없고 저들을 정죄하는 자를 신랄히 비판했다. 왜 그는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돌입했나?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기득권자, 폐쇄된 종교적 봉건체제의 아성이었다. 거기서 먼저 성전숙청을 했으며 "예루살렘아!" 하고 운다. 거기서 그는 잡혀 죽었다. 고소는 누가 했든 정치범으로 죽임당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주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령으로 받아진 것이 '너희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이다. 왜 십자가냐? 십자가는 정치적 결단과 관련이 있는데!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처형틀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유를 주기 위해서 마침내 폐쇄적이고 절대화된 권력자에게 수난당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인권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다가 많은 사람들이 투옥됐으며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이 일에 참가한 우리의 동역자들이 많이 투옥됐다. 그런데 저들은 정치활동도 아니요, 단순히 반정부활동을 했기 때문에 투옥시켰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지만, 새삼 그것은 정교분리에 위배된다느니 종교는 제 한계를 망각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교계 안에서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악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역사에서 빚어진 오해에서 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교의 이 예수의 활동이 변질됐다. 중세기는 정교의 일원화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권력과 야합함으로, 교회는 그 자체가 집권자가 됨으로 그 권력의 방어에 힘써서 그리스도교를 이중윤리화했다. 치리의 도구로 삼았다. 거기서 권력의 절대화를 위해 신의 위임권을 내세우고 반면에 국민에게는 겸손, 복종, 사랑, 절제 그리고 타계의 행복만을 설교함으로 운명적 체념만을 가르쳐서 그들의 불만과 자유에의 희구를 봉쇄했다. 이에 맞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확실히 정교분리를 내세웠다. 그 동기는 정교가 야합함으로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인데, 무엇보다도 교회의 순화가 목표였다. 그런데 사회나 제도의 개혁없이 종교개혁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권력의 횡포에 오불관할 뿐 아니라, 국민들을 교회 안에 비끌어 매어, 권력 횡포의 길을 더 넓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런 전통은 시민사회에서 그대로 이용됐다. 루터가 모든 재간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최대한으로 발휘하라고 한 것은 모든 인간의 기본권의 평등을 말한 것인데, 기존질서의 구조성을 무시했기에 결국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장화하는 데 보탬이 되었고 마침내 산업사회에서 갖지 못한 자의 비인간화를 촉진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교회는 구조적인 사회관심은 외면하고 기존질서를 전제하고 그 밑에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와 적선을 함으로, 고작 있는 처지에서 만족하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기득권자들의 파국을 막아주는 역할만 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라는 새로운 노예, 자본주라는 새로운 귀족이 생겨도 정교분리의 관점에서 자기를 정당화하고, 그것에 간섭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배된 특권에 안주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런 전통이 들어왔다.

또 우리가 직접 선교받은 미국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대륙으로 갔다. 그러나 '재간은 하느님이 준 것이다'를 오용하여 마침내 '개발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생존경쟁장화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로 자처하는 저들은 역시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구조나 제도적인 면에서 간섭하지 않는 동안, 구라파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와 권력층이 결탁해서 인권을 유린하고, 마침내 세계의 약한 나라를 식민화했는데 미국교회는 그것에 대한 비판력 없이 오히려 그것에 편승해서 이른바 '전도'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르크시즘이 일어났다. 저들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에 화살을 돌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저들은 종교—그리스도교를 민중이 자기 자유를 찾으려는 의욕을 체념시키는 아편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구조악을 못보고 사랑, 겸손, 복종만 가르치므로 결과적으로 노예 도덕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마르크시즘이 그리스도교의 본 정신을, 그리스도교가 안주하는 동안 도적질했다는 것이다.

하느님 역사
수직적 3차원 평면적 3차원
사랑 인도주의
구속사 계급투쟁
소외
우상 이데올로기
낙원 공산세계

이상과 같은 평면적 비교로 둘의 본질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그러나 둘은 결국 다음의 목표에서 만날 수밖에 없고 단언할 수 있다. 이 둘 다 '인간의 해방'이라는 동일전선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참 자유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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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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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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