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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지식과 윤리
고린도전서 8, 1-13
1

자신을 지식인이라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지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적어도 현대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일단 이 물음 앞에 서서 스스로를 돌이켜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신앙이란 이미 지식화되었으며, 성구를 기억하고 교리를 외우는 것으로써 이미 자신을 훌륭한 교인으로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설혹 그 지식이 옳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과 신앙과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을 그러한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 규정하고 제한을 해도 좋은 것인가!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실제로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통하여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고린도교회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어도 좋은지 먹지 않아야 할 것인지가 문제되었다. 그런데 만일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면 사실상 이방인 세계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회상으로 봐서 회식이라는 것, 밖에서 먹는 음식은 거의가 일단 우상에게 바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 사람들은 아직도 우상을 섬기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제물을 먹을 때면 그것이 우상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먹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고 일종의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에 반해 지식층들은 우상의 제물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마음대로 먹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부터 모든 것에서 자유하다는 결론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데도 자유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바울은 일단 그들의 지식을 승인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지식이 교만을 낳았으며, 참으로 알아야 할, 보다 중요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절에서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말함에 대해 바울은 그럴 것이라고 그들의 지식을 솔직하게 시인한다. 그들의 앎은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에서 자유하며 따라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자유하다는 생각은 확실히 옳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2절에서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자라는 역설을 말한다. 지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그리스도는 구주라고 말함으로써 이미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명적인 것으로 결정지어 버린 그 순간, 참 알아야 할 것에서 차단되고 만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스스로 알고 있다는 그들이 무엇을 몰랐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많은 전개를 하지 않고 극히 사소한 일을 예로 든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적으로 얻은 자유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저들이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교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 바울은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의 한 예로 들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너를 위해서"를 몰랐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몰랐다. 이러한 비판은 곧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 혹은 예수를 알 수 있느냐? 설혹 안다 해도 그러한 교리적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반문이 됐다. 바울은 다시 지식을 내세우고서 곧 결론을 내고 안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지식은 인간을 자기 자신 이상으로 확대하거나 과장하여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라고 말하며 3절에서 결론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 주십니다"라고 한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현실임을 알리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알아 주신다.

2

기독교는 오랫동안 교육적인 방법에서 교리문답을 실시했다. 우리는 줄곧 이러한 교리문답적인 교육에 젖어왔다. 이것은 대중을 이끄는 데 하나의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대중은 대체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굵은 것만 몇 가지 골라서 그것을 개념화하여 주입시키면 대개가 그것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모르는 동안에 그 교리들이 우리의 머리에서 굳어진 어떤 개념이 되고 말았으며 그러한 교리적인 지식으로써 기본적인 것은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러한 교리적인 표현으로서 우리가 정말 무엇을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가령 아이들에게 어떤 필요에 의하여 그 부모를 소개한다면 부모를 통해 너는 세상에 태어났으며, 또한 양육을 받았다는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그 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부모에게 하는 이들에게 "네가 그럴 수 있느냐? 부모가 네게 어떠한 분인데 …" 하고 묻는다고 할 때에 이미 배운 말대로 "나는 다 알아요. 설교는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을 통해 세상에 태어났어요. 이만 하면 잘 알지 않아요?"라는 거침없는 대답은 정말 부모를 안 것인가… 만일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분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로 되어 있는 6절의 말씀대로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런 초보적인 질문을 받는 것을 모욕적인 것으로 생각할 분도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은 너무나 자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자명적이고 분명한 것이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이미 설교도 필요 없고 성서를 탐구하겠다는 심정이나, 무엇을 간구하겠다는 그런 필요가 이미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오랜 그리스도인일수록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그는 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하고 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너는 말하는 그 분과 유리되어 있다는 그런 뜻을 바울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

참 상대방을 아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소위 관념적으로 아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말씀이다. 그런데 사랑함으로 아는 것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다른 점은 결코 다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는 다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3

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학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추구한다. 신학의 이름이 그렇듯이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 벌써 오래 전에 불트만은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오늘에도 여전히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준다. 그는 이 논문의 서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 논문을 쓰는 것은 단지 어떤 의미에서 알 수 없는가를 밝히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말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을 객관화하므로 하나님을 나와 유리시켜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만일 그를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보일 때, 곧 계시할 때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계시된 것도 말할 수 없다. 계시된 것 자체도 객관화시키면 역시 나와 유리되고 말기 때문이다. 계시는 듣는 자에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를 말하려면 그 계시 앞에 밝혀진 나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한 나를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침묵할 것인가? 침묵할 수도 없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고 하면 벌써 하나님 앞에 한 입장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묵할 권리마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신학을 해야만 한다면 나는 끝끝내 말을 할 수 없으나, 그를 말하면서도 그를 말 못하는 이 내 말, 내 표현을 당신의 말이 되게 하는 그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지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존재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유리시켜 객관화해서 사변하면 아무리 다루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아는 지식이 탄생됐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 일반 자연과학과 다른 점이다. 반드시 신학만이 아니고 관계를 다루는 모든 것은 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인정해 주십니다" 하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사랑해도 나는 사랑하는 길밖에는 없고 바로 사랑하는지 그렇지 못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기대하는 것은 내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이 인정해 줄 것을 믿는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는 말씀이 있다.

4

두 아들이 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반역하는 이른바 방탕아다. 형은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한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맏아들은 그 부모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런 것은 없어져 버려야 한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는 그 부모의 마음을 그는 모르고 있다. 결국 그는 부모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알았다는 대 전제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인 그의 동생을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바로 이런 현상이 언제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왜 교회의 사람들이 싸움을 잘하고, 원수를 많이 만들고, 그렇게 독선적인가 하면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기준이 있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은 자기 보다 못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남을 비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 대해 교회에 손해를 끼치고,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 그래서 희망이 없는 자라는 결론이 내려지면 주먹이라도 들게 되어 있다. 교회에서 이웃사랑을 강조해도 마이동풍인 것은 바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의 지식 때문이다. 한국에 효도의 사상이 생생할 때 부모 앞에서는 자식도 동생도 제 밑의 사람도 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한 행위는 곧 부모를 욕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안다는 자가 어떻게 그 앞에서 함부로 형제를 규정하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점을 더욱 강조하여 이론상으로는 아무리 옳다고 생각 되는 일이라도 그 행위로써 약한 형제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된다면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한다. 이것은 부모 앞에서 부모의 참 뜻을 이해하는 맏아들의 권유와도 같다. "그 약한 사람이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가장 중요한 말을 내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적 지식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고 한다. 지금 네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그들, 그 약한 형제들을 위해서도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표현이다. 동생을 보고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거기서 읽지 못하면 참 부모를 알 수 없듯이 내 형제를 대할 때 그 형제를 위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사실상,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생활 전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본다. 그래서 무엇을 보아도 그와 더불어 생각하기 마련이다. 내가 옳다고 믿던 일에 사랑하는 친구가 그것과 다른 뜻을 가진 것을 느낄 때 이론을 초월하여 내 마음의 자명성이 무너지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운운하면서 그렇게 자명적이라고 하는 것이 견고할 수 있을까? 나약한 사람을 보고 그렇게 잘 의분을 느끼는 바울이 약한 자를 위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거기서 읽고 태도를 바꾸었다. 이것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오늘날 "효율"이라는 생각이 전처럼 도사리고, 프래그머티즘이 우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절대 불가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경우엔 또 근대사회라는 관념이 우상이 된다. 또 원칙론을 내세우고 거기 딱 버티고 서 있을 때 그 원칙이라는 것도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효율성, 근대사회라는 개념, 그 원칙들도 사회질서를 위함이 아니고 실상은 자기 보존, 자기 방위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절대처럼 내세우지만 사실은 절대가 아니다. 그것을 신처럼 내세우지만 사실은 신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넘어서는 안 될 사전 원칙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는가?

참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아니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맞을 일이 있으면 맞아야 한다. 정말 사랑하면 그것을 위해 손해 볼 각오가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매 혹은 분노, 강요에 쫓기는 희열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1972. 7. 『현존』 32호)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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