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져야 할 십자가
마르코복음 8, 34

아마 오늘만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재정비하고 그 진로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이 요청되는 때도 드물 것이다. 까닭은 우리가 지금 위기에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자명적인 목적을 향해 단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는 그것이 흐려졌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대열에 이상이 왔다. 어제는 무엇이 적이며 누가 제휴할 수 있는 동지인가가 자명했는데 오늘은 그런 기준이 흔들린다. 어제는 민주화를 내세우면 동지요 반민주는 적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집안 누구에 의한 민주화냐를 묻게 되고 그로써 편이 갈리게 되었다. 교회도 정치풍토에 휩쓸려서 파벌적이 되어 서로 백안시하는 경험을 했다. 그러한 흔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의 적이 무엇이었는지마저 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일각에 어처구니없는 무원칙한 말과 형태가 난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러한 경향이 교회 안에마저 숨어들었다. 판국이 이러니 이제 사이비 민주화가 난무해도 그것을 가려볼 능력이 있겠느냐가 의심스럽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이 흔들릴 것이 염려된다.

이 마당에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판단기준이요 행동지침이다. 우리는 현실정치 속에 합류할 수도 있고 그 밖에서 언제까지나 예언자의 자세에서 시비를 가리는 입장을 고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어느 것이든 분명한 것은 우리는 정치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그럼에도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정치현실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예속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길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행동지침으로 다음 세 가지를 열거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닮는다 그리고 따른다 등이다. 먼저 이 세 가지 경우를 다시 검토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행동지침을 밝혀보자.

믿으라!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부끄러워한다면 구태여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마태오복음에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16, 16)라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에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라고 한다.

루터 이후에 이른바 사도적 복음이란 바로 이러한 신앙에 초점을 모은 것으로 개신교의 근간이 되어 왔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전통에 서서 신앙을 그리스도인의 핵심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믿음"을 지나치게 일방적이며 협소하게 만들고 있는 점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고백에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믿음(pistis)을 가장 강조한 이는 바울이다. 그는 이 단어를 무려 142회나 사용하는데 이것은 복음서 전체의 24회와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믿음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동사의 부정사형인 pisteuein을 54회나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믿음은 결코 이른바 사도적 믿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로마서 4장을 예로 보면 안다. 그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내세운다. 그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와 대치되는 것일 뿐 그리스도론적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소망이 끊어진 때에도 믿고 바랐다"(4, 18)로 표현된 믿음이다. 그에게서 믿음이란 어떤 단서도 붙지 않는 것이며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른바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을 나열한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사사들과 다윗까지 열거한다. 그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론적 믿음은 아니다. 아벨의 믿음은 그가 양을 잡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피와 연관된다는 억지 해석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면 에녹이 믿음으로 죽지 않고 하늘에 올랐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며 노아의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까! 아니다! 믿음이란 휠씬 폭넓은 개념이다. 넓게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존재양식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 말이 인정된다면 '나는 믿는다. 그런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도 산 사람의 삶의 길이라면 믿는다는 것도 삶의 엄연한 또 하나의 길이다. 믿음이란 결코 종교적 특수 기관을 가진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것 아니고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믿음이라는 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제외하면 그리스도론적인 믿음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신뢰한다, 그의 능력을 믿는다, 병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등등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교리문답적 믿음 이해에 너무 매여 믿음의 넓고 깊은 뜻을 상실하고 독선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그럼으로써 쉽게 역사의 예수와 단절될 수 있으며 그러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신앙 또는 예배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와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그를 대상화해 버림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다면 예수 사건의 비역사화이다. 그러므로 역사현실을 떠나 버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예수를 닮으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 역사의 예수를 잃어버릴 위험을 직시하면서 "예수를 닮으라" 또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권고가 줄기차게 제창되고 있다.

열두 제자를 파견할 때 지시한 말씀(마르 6, 8 이하)은 바로 예수의 삶의 단면 그대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고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13, 34)라고 한다. 사랑하는 것을 삶의 핵심으로 알았다면 그것은 삶 전체를 예수를 본받아 살라는 뜻이 된다. 역사의 예수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 바울로는 데살로니카교회에, "여러분은 … 우리와 주를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데전 1, 6)라고 한다. 여기 삶의 양식이 예수, 바울로 일행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상통하는 맥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바울로는 예수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며 자기를 비운 그리스도론을 내세운다(필립 2, 15 이하). 온몸을 바쳐 사랑하고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지상의 목적으로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를 본으로 하고 조금이라도 그와 같은 길을 가고 그의 모습을 자기 안에 실현해 보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함과 더불어 빨리 퇴색해 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관념화로 줄달음쳤다. 그러나 이 길을 끝까지 고수해 보려는 운동이 바로 수도원운동이다. 세계의 구조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한 그처럼 살 수 없으니 자주적이고 자족적인 공동체라도 이루어 그를 닮는 생활을 하자는 노력인 것이다. 그 전통이 가톨릭교회의 체제에도 남아 신부와 수녀들이 가정을 포기하고 가정을 갖지 않음으로 사유재산 이전의 생활양식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오고 있다. 이에 대해 개신교는 루터의 결혼을 웬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냐는 듯이 받아들여 아무런 반성 없이 가정, 사유재산 갖는 것을 권리로 알 뿐 아니라 교역자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풍조까지 만들었다. 문제는 그런 것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예수를 생활에서 닮으려는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개신교의 큰 약점이다. 아무런 희생은 없고 오직 은혜만을 강조하여 그것에 안주한다. 그러므로 깊이도 없고 힘도 없다.

한편으로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까딱하면 복고주의로 흐르기 쉽다. 소승불교가 석가 시대와 그의 삶을 오늘에도 재현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에도 일찍부터 그런 운동이 있었다. 에비온파가 그런 것이다. 예수의 삶을 흠모하는 것은 그를 사모하는 집단으로서 당연하나 2천년 전의 그런 삶을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지금 유다인의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다닐 수 있으랴.

나를 따르라

이에 대해서 예수를 따르라는 권유가 있다. 예수가 제자들을 부를 때 내게서 ○○을 배우라든지, 특별한 훈련을 시켜 주겠든지 하지 않았고 "다만 나를 따르라"고 했다.

본회퍼는 1935년에 『나를 따르라』를 집필하므로 그의 신학의 갈 길을 분명히했다. 그는 1933년에 전권을 완전히 장악한 히틀러의 선풍 앞에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터 위에 선 그리스도교의 무력함을 직시한 것이다. 국민 전체가 등록된 그리스도인이면서 저들은 시시비비를 가릴 아무런 능력도 없었으며, 설령 그것을 안식한다고 해도 판단에 따라 행동하기에는 이미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까닭은 정치와 믿는다는 일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오랜 교리가 저들을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수를 닮는다는 수도원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자기 게토나 온실 같아서 거기서 나올 생각도 못했지만 나오면 곧 얼어죽어 버릴 것이었다. 이에 그는 "나를 따르라"가 그 난국을 사는 길임을 직시한 것이다.

예수가 제자될 사람들을 찾아 첫번째로 하신 말씀이 "나를 따르라"이다. 이 말에 응한 베드로 형제의 결단이 예수운동의 출발이다. 그를 따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그런 본문들의 뜻을 좁혀보자.

나를 따르라는 뜻을 집약한 것은 마르코복음 8장 34절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다르라." 이것은 마태오와 루가에서 전승되는데, 루가에는 "날마다" 라는 말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앞에 있다.

그런데 마르코에는 예수가 수난당할 것을 예고하니,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그 길을 막았다. 이에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준엄한 책망 다음에 이 말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오와 루가에는 그러한 중간 이야기가 빠져 있는데 의미상으로 보아 마르코의 것이 옳다고 판명된다.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책망이 "자기를 버리고"와 긴밀히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믿는(신뢰하는) 구체적인 행위다. 그의 옳음을 믿는다. 그의 뜻을 믿는다. 그가 하려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 행위다. 어떻게 이 같은 결론이 가능한가? 그의 길을 다 모르는데, 그를 제대로 모르는데? 그래도 그를 따르기로 결단한 것은 계산을 넘어선 행위다. 참 따름은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계산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것은 그 누구, 그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어떤 사람은 먼저 죽은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에 하겠다고 했고, 어떤 이는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둘 다 허용하지 않았다. 예수가 그토록 비인간적이었나? 그렇게 화급했나? 꼭 그렇게 볼 근거는 없다. 아니! 예수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 전에 루가에는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려야 한다"(루가 14, 26)고 하는데 그것은 불가에서 이해하는 출가적인 금욕주의나 또는 서구에서 해석하듯 그의 명령의 종말성 때문이라기보다 철저한 사랑의 고백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 37)는 마태오복음의 표현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보인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다. 그를 따른다함은 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마당에 그를 본받으려는 노력이 배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이는 모양새도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그에게 거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길은 그를 닮는다는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당에는 그의 십자가를 지독히 따르는 자도 그 길로 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따른다는 것은 본받는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를 따르라고 권고하는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단서를 붙인다. 예수가 진 이천 년 전의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닮는다'(imitatio Christi)면서 복고주의에 빠지는 것과 다르다. 그를 믿는 조건 없는 사랑이 대전제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 삶의 방향이고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 그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의 대열에 참여하여 오늘의 역사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십자가를 지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죽음의 길로 가라는 말이 된다. 예수의 십자가가 정치적 처형이라면 정치적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바울로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고백했으나 반드시 정치적 체험을 뜻하지는 않았듯이 그것을 반드시 정치적 박해에 한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자기의 십자가는 그 '자기'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각오로 사선을 걷듯이 살라는 말인 것이다. 오해, 박해 나가서는 망할 수도 있는 분수령의 모험 없이 예수의 길을 따를 수는 없다. 한 가지도 내놓지 않고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손해 볼 생각 없는 길은 그를 따르는 길일 수 없다. 그를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고 그를 닮는다는 것은 이 시대를 거스르는 것인데, 그의 길을 따른다면서 어떤 고난도 전제하지 않는다면 거기 새로운 창조적 진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질 십자가! 우리는 지금 한국 땅에서 있다. 이 땅은 분단의 땅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화약고 안에서 사는 듯한 불안이 감도는데 역대정권은 그 불안을 정권 안보에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군정 종식을 위해 온 국민이 싸웠으나 결국 군정을 합법화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그로 인한 국민들의 실망이 너무 커서 어쩌면 정의에 대한 믿음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억도 체념으로 바뀔 수 있는 상태다. 적이 분명하고 동지가 분명할 때 싸움 자체가 보람이며 동시에 그것이 원동력이 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적도 동지도 희미해지므로 싸울 의욕도 가라앉은 상태이다. 따라서 정계는 대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며 꿈을 안은 사람들과 실리에 눈을 뜬 사람간에 큰 혼선을 빚고 있다. 그러면서 뚜렷한 목적의식 대신 상호 책임전가로 점점 민주세력이 약화되는 경향이다. 그렇게 만든 야당 지도자들, 그리고 세력 등에 대한 불신이 바로 무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애초에 그런 어떤 것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자라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고백처럼 세상의 어떤 힘도 우리를 그리스도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이 확신이 얼마나 분명한가를 점검하는 일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그것이 분명하면 우리는 그를 한 발자국씩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가 당면한 오늘의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따라가야 한다. 이는 우리의 길이 확실한 길이라는 다짐이기도 하지만, 어떤 구실로도 우리가 이 시대적 사명에서 도피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사회과학에 도취하여 교회에 드나들면서도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조소하는 바람이 젊은 층에 불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킨다는 것을 지상의 목적으로 삼아 역사적 과제인, 자기가 질 십자가를 철저히 외면하고 감미롭고 값싼 은혜만 내세워 세풍에 아부하는 풍조가 있다. 또 한편 이 둘 사이에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며 쇠잔해 가는 층도 있다.

이 마당에 우리는 다시 그리고 진지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일, 그를 본받는다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반성함으로써 정말 그를 따르기로 새롭게 결단해야 할 것이다.

그를 따르는 이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나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루가 12, 8-9)는 경고가 전혀 해당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주여 주여,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자기 공로를 인정받으려고 애태우지도 않을 것이며,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7, 21 이하)는 냉혹한 거부를 받지도 않을 것이다.

(1988. 2. 『한국기독교장로회보』/ 원제 "그리스도를 따라서")

TAG •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판권
표지
 
제1부 부활의 아침
어느 부활절 아침 (요한 21, 1)
오늘의 부활현장 (사도 2, 22-24)
부활의 그리스도와 그 현장 (사도 2, 22-24)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말라 (마태 25, 14-20)
사람을 낚는 어부 (마르 1,16-20)
부활 신앙 (고전 13, 12)
공포에서의 해방 (마태 10, 26-33)
"와서 보라" (요한 1, 35-39)
민중은 '환생'한 예수? (마르 6, 14-16)
 
제2부 하느님과 우상
두 질서 (마태 20, 1-16)
빛의 아들들 이 세대의 아들들 (루가 16, 1-8)
악에서의 구원 (마태 6, 13)
성서의 구원론 (요한 17, 13-16)
민중의 설교자 (루가 9, 3)
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뱀처럼 들리운 예수 (요한 3, 14-16)
누가 네 이웃인가? (루가 10, 29-37)
믿음과 결단 (마태 4, 1-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기도 (마태 14, 22-23)
저항과 복종 (마태 21, 28)
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자유에의 길 (갈라 4, 1-10)
일어나라 (사도 3, 1-10)
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바울의 인간관 (로마 8, 18-30)
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표지
 
제1부 구걸하는 초월자
앎의 두 면 (고전 8, 1-13)
져야 할 십자가 (마르 8, 3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