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의 Q자료는 물론 마르코자료의 10분의 7을 전승하고 있는데, 복음서의 편집을 통하여 그의 특수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미 여행 보도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것 중에서 그의 편집의도가 뚜렷한 부분만 고찰하기로 한다.
(1) 마르코자료
세례자 요한에 대한 전승에서 루가는 마르코에 기초하고, 그것에 덧붙여 Q자료(3, 7~9)를 배열한 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지시로서 두 벌 옷이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먹을 것이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구하고(3, 11), 세리ᆞ군인 등 경제적 수탈이 가능한 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횡포를 금한 것(3, 13~14)을 첨가한다.
세리 레위 이야기(5, 27~32)에서 루가는 레위가 '큰 잔치'를 벌였다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그가 부자였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고, 그리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28a절)를 첨가함으로써 그의 결단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고 있다.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말을 '축하'라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큰 잔치는 나누어 먹는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특별히 이 경우에는 그같은 의미가 뚜렷하다. 레위는 큰 잔치로써 그의 부를 시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재산 전체를 나누어주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구원을 희구하는 부자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를 따르라는 이야기(18, 18~31)도 마르코자료에 속한다. 그런데 루가는 이 자료에 다음 세 가지 말을 첨가, 변형시킴으로써 이 부자의 결단을 통해 재물의 부정적 성격을 강조한다.
① 마르코복음의 단순한 '한 사람'을 '한 관원'(άρχων)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지상의 왕(마태 20, 25; 묵시 1, 5;사도 4, 26), 재판관(루가 12, 58), 점령국의 관리(사도 16, 19), 또는 산헤드린 의원(루가 23, 13)에게도 적용되는데, 여기서는 구약 성서의 계명을 지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산헤드린 의원'을 지칭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3)슈나이더(op. cit., S. 369)는 회당장일 것이라고 하고 12장 58절과 14장 1절을 들고 있는데 그러면 오히려 산헤드린 의원이 타당하다.
예루살렘 산헤드린 의원 중에는 부자가 많았는데, 그것은 권력과 축재가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에서는 이 부자가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지켜왔다는 사실에 대해 의외라는 듯이 "예수가 그를 보고 사랑하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계명을 지키는 부자가 드물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② 루가는 그에게 재물을 내놓되 "전부"(πάντα)라는 말을 첨가하여 철저한 포기를 요청한다.
③ 마르코의 "그가 많은 재산을 가졌기 때문에"를 루가는 가난한 자에 대한 상반개념으로 자주 쓰이는 명사인 "큰 부자"(πλούσιος)(루가 16, 21 이하; 야고 1, 10)34)W. Bauer, WNT, S. 1936.로 대치시킨다. 이로써 루가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라는 말의 실상을 구체화한다.
(2) Q자료
Q자료의 전승에 있어서 루가를 마태오와 비교할 때, 루가는 그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루가의 '들의 설교'를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비교하면 Q자료의 선택과 해석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마태오와 루가는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가난한 자"(οί πτώχοι, 루가) 혹은 "마음이 가난한 자"(οί πτώχοι τώ πνύματι, 마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마태오는 가난을 추상화하는 데 반해 루가는 경제적 가난이 추상화되는 것을 차단한다.35)정양모(Die Adressaten der Heilsbotschaft Jesu, 1970, S. 21ff.)는 예수가 πτωχοι를 경건하거나 겸손한 자를 의미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후기 유다교의 어법과 비교함으로써 πτωχοι는 반드시(경제적) 가난에 국한시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비참하고 궁지에 빠진 자, 약한 자, 눌린 자들의 넓은 의미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루가의 것이 원래의 것이라면 마태오가 그것에 πνευμωτω를 첨가한 것은 그 당시의 청중에게는 그런 단서를 붙이지 않으면 경제적 가난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πτωχοι라는 헬라어는 "너무 가난해서 구걸해야 하는" 아주 가난한 자를 나타낸다(I. H. Marshall, op. cit., S. 326). 이러한 차이는 그 다음에 오는 지금 굶주린 사람,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을 주목할 때 더 분명해진다.
루가와 비교해볼 때 마태오의 평행구는 굶주린 사람에 "의에"(τήν δικαιοσύνην)를 첨가함으로써 위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마태오에 있어서 "의에"라는 말과 "배부른 것"(χορτασθήσονται)이란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χορτάζω'는 '위가 부르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마르코의 용어를 그대로 전용한 것이다(14, 20ᆞ15, 33).36)W. Bauer, WNT, S. 1747; W. Stegemann, Das Evangelium und die Armen Kaiser Traktate, 1981, S. 8. 이 용어는 루가는 물론 필립비 4장 12절과 야고보 2장 26절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추상화된 흔적이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루가는가난한 자와 굶주린 자를 부한 자와 배부른 자와 대립시킴으로써 이 말을 추상적으로 해석하려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봉쇄해버린다.37)슈미탈즈("Lukas-Evangeliums der Armen", in : Theologia Viatorum XII, 1973, S. 157ff.)는 "루가는 확실히 부자, 배부른 자, 태평한 자에 대립시켜서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들을 들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Q자료를 알고 있는 루가이기 때문에 그가 마리아 찬가와 같은 자료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마태오의 "꾸려고 하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마라"(6, 42)에 대해 루가는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주면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6, 34)라는 말과 "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줘라"(6, 36)는 말을 전승함으로써 가진 자가 못 가전 자에게 꾸어주는 것은 그냥 나누어주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만찬 초대의 비유(마태 22, 1~14; 루가 14, 15~24)에서도 두 복음서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마태오는 분명히 유다인들을 기득권자로 전제한다. 초청하는 임금의 태도가 간곡한 데(두 번) 비하여 불응자의 태도는 완악하다. 그래서 왕은 그들을 전멸하고 그들이 잔치 참여에 합당하지 못함을 선언한 다음 종들을 사거리로 내보내면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사람을 청하라"고 한다. 그러나 루가는 처음 초청받은 자들을 단지 재산의 소유자로서 재산관리에만 몰두해 있는 자들로서 성격화할 뿐이며(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이 초대에 불응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중에 불러들인 자들은 아무나 만나는 대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필두로 하여 병신, 소경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바로 이런 자들을 가진 자와 성분적으로 대립시켜 새 시대(하느님의 나라)의 주인으로 내세움으로써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라는 축복의 말과 이에 대응하는 부자들에 대한 저주를 비유라는 그림언어로 뚜렷이 표시한 셈이다. 이에 덧붙여 주목할 것은 마태오의 결미(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내쫓는 것)가 루가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마태오의 결미는 사리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나중에 초청한 사람들에 대한 초청자의 뜻을 불투명하게 한데 반하여, 루가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경 된 자들의 초청이 어떠한 다른 조건에 의해서도 무효화될 수 없다는 뚜렷한 의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