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는 시리아 지역에 있는38)4장 24절에 전후 관련없이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습니다"라고 한 것은 마태오 공동체가 위치한 지역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39)아벨(E. L. Abel, Wo wrote Mattäus, NTS, 17)은 마태오를 M1, M2로 구분하고 M1은 예루살렘에서 탈출한 유다계 그리스도교인 집단의 소산이라고 보며, 베츠(H. D. Betz, Essays on the Sermon on the Mount, Philadelphia, Fortress, 1985)는 Q자료를 루가의 것과 마태오의 것으로 구분하고 마태오의 것은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한다. 한편 홀슬리(R. A. Horsley, "Ethics & Exegesis : Love your Enemies & the Doctrine of Non-Violence", JAAR 54, 1986, pp. 3~31)는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인만의 촌락공동체내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본다. 그 공동체는 십일조도 바치고(23, 23), 안식일도 지켰으며(12, 11~12ᆞ24, 30), 율사들과 바리사이인들의 교훈을 인정했다(23, 2~3). 특히 마태오의 특수자료인 17장 24~27절에서 예수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데, 성전세를 낸다고 하는 보도는 마태오시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다교내의 한 분파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운동을 A.D. 30~70년에 시리아 지방과 팔레스틴 지방에서 일어났던 유다교 내부의 한 갱신운동으로 보는 이도 있다.40)G. Theissen, Soziologie der Jesusbewegung, 1978, München, S. 9.
그러나 이 복음서를 쓰는 시기에는 이미 탈(脫)유다교 인식이 분명했으며, 로마의 압제하에서 당하고 있는 민족적인 고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박해에 시달리고 있으면서 새로운 자기인식을 모색한 흔적이 뚜렷하다. 마태오 특수자료와 병행자료인 마르코와 Q자료를 편집사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특정적인 것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