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복음은 바울로의 모든 편지에 대해서 극적 전환을 한 새로운 문학서이다. 그 사이에는 역사의 단절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로와는 삶의 자리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서술법에서, 언어에서 그리고 내용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마르코복음은 불트만 등이 말하듯 결코 확대된 케리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케리그마화한 그리스도교에 제동을 걸고 마르코가 선 삶의 자리와 예수전승 중에서도 마르코가 있는 그 현장과 호응되는 것을 선택하여 쓴 것이다. 바울로는 헬레니즘 영역의 지식층의 세계관을 의식해서 변증적 논리를 전개하는 데 대해, 마르코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낸다. 그 이야기는 전형적인 민중언어이며, 그 내용은 개념적 설득이 아니라 하나의 산 삶을 통째로 제시한다.
마르코는 예수의 교훈집이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도그마를 뛰어넘어 어떤 인간집단과 더불어 행진하는 예수이다. 석가처럼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입산해서 도통함으로써 니르바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그가 아니라 처음부터 민중 속에 들어간다. 그가 있는 곳에 민중이 있고 민중이 있는 곳에 그가 있다.
처음에 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오클로스(ὄχλος)라고 부른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마르코복음에 36회나 이 단어가 적용된다. 그런데 이 오클로스는 노예, 고용병, 농노 등 가장 비천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명사이다.
나는 어딘가에 오클로스가 예수에게 대하는 자세와 예수가 이들을 대하는 자세를 분석해본 글을 썼다. 이 관찰에서 발견한 것은 예수는 오클로스에 대해서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무조건적'이란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 보장을 다짐하지 않고 단지 현재 상태를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또 여기서 '현재 상태'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억압 또는 버려진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과 사귄다(koinonia). 이런 현상은 양면으로 부각된다. 하나는 하필이면 그런 자들만이 예수에게로 몰려왔다는 면이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사흘씩이나 먹지 못한 5천여 명의 그런 자들만이 그에게 몰렸다. 이에 반해서 그렇지 않은 계층은 그를 경원했다. 그런 계층은 서기관 또는 바리사이파라는 이름으로 대신하여 자주 등장한다. 등을 돌리는 부자, 여자를 산 사람, 발을 산 사람 등은 그런 것들을 시험해보기 위해 예수에게 오는데, 예수는 이들을 거절했다. 반면에 예수의 행태에서는 이 점이 뚜렷하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2, 16)는 것이다.
바리사이 체제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면 여러 규율 중 음식 먹을 때 정결예식을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암 하 아레츠'(Ám hā´ āres)로 취급받았다(J. Jeremias). 그런데 예수는 오클로스를 불러모으고,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귀가 있는 사람들은 들으라"(7, 15)고 한다. 이것은 히피족 지지성명 아닌가? 화이트 칼리족에 대한 무시 아닌가? 그는 바로 굶주린 집단 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겼다. 누가 저들을 정죄하나? 예수는 단 한 번도 저들을 정죄하지 않았고, 저들을 정죄하는 자들만을 비판했다. 이런 편애적 자세는 Q자료의 여러 비유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마르코에서는 실제로 그런 무리와 더불어 함께하는 예수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