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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하는 초월자
요한신학의 일단면
요한복음 19, 28
1

"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의 신이!" 이것은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표방한 한 시인의 시의 한 토막이다. 이것은 신 같은 것은 없다는 시위이기도 하나, 동시에 자기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토로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비록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망정 무신론자로 자처하면서 신을 찾나? 그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어떤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상징할 적당한 말이 없어서 이미 통용하는 말을 빌린 것이다. 이 시인은 동시에 스스로 허무주의자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님을 이 한마디에서 폭로한다. 그는 오히려 허무 앞에서 도피하고 싶어하며 그것과 맞서려는 자기를 갖고 있다. 정말 허무주의자면 내 소원에 대해서 그렇게 분명할 수 없을 것이다. 내 편이 돼 달라면 자기의 욕구는 분명하다는 말이다. 참 허무주의자라면 그 허무를 우선 자기 안에서 발견했어야 할 것이다. 그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독거미 같은 에고이스트이다. 딱 버티고 앉아서 신마저도 움켜 잡아먹으려는 자세다. 신을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다. 아니!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내 편이 될 신을 찾게 된다. 내 소원, 내 욕구를 들어 주는 힘으로서의 신!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을 찾자는 것이다. 신을 부리는 아랍의 마술사처럼.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나 아닌 초월자를 갈구하는 면도 있으나, 반면에 그런 것을 저항 또는 도피하려는 면도 있다. 성서는 하나님을 도피하는 인간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도피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압도해 오는 하나님을 말하며, 그와 인간의 만남을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을 문제하는 것은 해 볼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그런 한가한 처지에서 하는 일은 아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피하랴. 하늘에 오를까? 당신은 거기 있다. 지옥에 내 자리를 펼까? 아! 당신은 거기에도 있구나. 내가 미명의 날개를 펴고 수평선 너머 바다 저끝으로 피할까? 그는 미리 와서 내 손을 붙드는구나. 어두움아 나를 덮어다오. 아! 어두움도 그의 빛 앞에 무색하구나. 그는 내 몸을 만들고 그는 어미의 자궁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았구나(시편 139편 의역).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려다 실패한 한 시인의 노래다. 그는 하나님을 피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도피하는 것임을 발견하고 항복하고 만다.

2

요한복음은 대선언과 더불어 시작된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안에 있다"(1, 14). 초월자가 인간이 되어 이 역사 한복판에 와서 우리와 더불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는 예수는 순수 인간이 된 초월자임을 선언한다. 요한의 이 선언은 당시의 두 가지 종교사상에 도전한 것이다. 하나는 "그노시스"요, 다른 하나는 유대교 계열에 속한 묵시문학파다. 그노시스는 철저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종교 사상으로 당시 기독교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저들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엄격히 구별한다. 이 둘은 영원한 평행선을 이루며 서로 만날 길이 없다. 인간은 이 두 이질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 영은 육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인간의 구원은 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일이다. 빛의 초월자는 인간세계에 내려올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빛 그대로서만 올 수 있다. 그리스도는 빛의 초월자로 세상에 왔다. 그러나 그는 육체를 입을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그것은 육이 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현(假顯)이다. 이러한 주장 앞에서 요한은 아니! 말씀, 그 초월자는 육체, 즉 인간이 됐다는 것이다. 묵시문학파는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의 철저화의 표현이다. 저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초자연적으로 역사를 거부하면서 올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 메시아는 인간과 함께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아니! 그 초월자는 바로 인간 예수며 그를 통해서 이미 낡은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새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초자연적인 천지이변으로 그 나라가 온다는 사상을 비신화화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야말로 차안 속의 피안이며 역사 속의 초월이다. 그러면 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이것을 단적으로, 드라마적으로 스케치한 것이 수가 성 우물가에서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다.

3. 한여인

수가 성 우물가에서 물걷는 사마리아 여인은 삶에 지쳤다. 밤낮 부엌과 우물 사이를 뱅뱅 도는 삶의 반복에 피곤하다. 그는 이런 지루한 반복의 삶을 변화시킬 기적을 바랬다. 그랬기에 그는 물길러 다니지 않고도 언제나 목마르지 않을 물을 달라고 한다. 그는 지금에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일상생활을 뚫고 들어 오는 초자연적 변화를 기다렸다. 그래서 그는 "장차 그리스도라는 이가 오실 줄 아는데 그가 오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을 믿습니다."라고 한다. 초월자는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다고 믿고 있음은 유대교의 신앙의 전통을 그대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초월자는 장차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현재는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격간에 불과하다는 사고다. 따라서 현존에 의미가 있다면 기다린다는 것 자체뿐이다. 기다리는 자세가 바로 종교요,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초월자와 격리된 상태에서의 몸부림이 종교라고 본 것을 뜻한다. 그랬기에 그는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고 고민한다. 그 예배에서 어떤 새것이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새 가능성은 현재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장차 온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서는 어떤 기대도 없고 따라서 상식의 세계에 정좌하는 수밖에 없다. 상식의 세계란 새 가능성을 거부하고 이미(旣) 있는 것, 주어진 것에 의해서 자기를 폐쇄하는 상태다. 이 여인이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는 위대한 조상 야곱의 자녀라는 자부, 유대와 대결해서 다른 거점을 가진 사마리아의 여인이라는 한계와 에티켓, 두레박이 있어야만 물을 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영리성, 그리고 방어하는 것이 삶이라는 자명성 안에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종교도 현재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 이상을 넘을 수 없다.

4.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은 예수를 초월자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된 초월자다. 그런데 이 초월자는 유대땅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박해를 피해서 그 본거지인 갈릴리로 가는 도상에 있다. 그 도중에 유대와 견원지간인 사마리아를 거치다가 야곱의 우물가에 멈추고, 시장해서 먹을 것을 사오도록 제자들을 거리로 보냈다. 배고픈 줄을 아는 초월자, 이 초월자는 피곤했다. 이 초월자는 목이 말랐다. 그는 생리적인 여건을 초월할 수 있는 초월자는 아니다. 인간이 가진 한계를 그대로 지니고, 느끼고, 울고, 웃는 이다. 이 초월자는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보고 "물을 좀 달라"고 한다. 구절하는 초월자I 먼 보행에서 피곤하여 우물에 걸터앉은 이 나그네! 그 여인의 말대로 하면 한 유대 사나이! 목이 말라서 물을 좀 달라는 이 나그네에게서 초월자를 보는 패러독스! 요한은 역사적 예수의 바이오그래피를 추구하지 않고 그를 해석한 이로 이름났다. 그러나 그이만큼 그의 인간적인 단면을 그대로 과감하게 드러내는 이도 없다. 이 우물가에서 목말라 물을 구결하는 이 나그네는 그의 생의 극치인 십자가 상에서도 '내가 목이 마르다'(19, 28)고 한다. 그 마지막 순간, 그 귀중한 순간을 보도하는데 왜 하필이면 '목이 마르다'라는가련한 비명같은 것을 전했을까? 이것도 요한만이 전한 자료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목말라 물달라는 그는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역시 목말라하는 제한된 인간, 정말 육체를 가진 인간임을 그대로 보여 준다. 마가는 복음서 중에 제일 처음에 기록된 것이다. 거기에는 예수의 감정을 묘사한 소박한 기록들이 있다. 그는 병든 자를 보고 "불쌍히 생각하며"(1, 4) 비정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며 "탄식하며"(3, 5) 인간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며"(6, 6) 잘 이해하는 자를 "사랑스럽게" 여기는(10, 21) 너무나 인간적인 면에 대한 묘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그런 표현들을 삭제해 버렸다. 그것은 초월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거리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화한 요한은 어느 누구보다도 너무나 인간적인 측면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피곤하고 목이 마르고 인정에 약해서 눈물을 흘리는 그는 정말 육체의 인간의 모습이다. 요한은 이 육체를 가진 예수, 그 안에서 초월자를 본다. 그것을 떠나서 초월자는 없으며, 있어도 인간과는 상관이 없다. 그 초월은 차안 속에 있지, 딴 영역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하고 "우리가그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이 영광은 육체를 가진 그를 넘어선 어떤 영역에서 비쳐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바로 그 육체를 가진 그 안에서 보는 영광이다. 이것은 패러독스다. 그러나 그는 이원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패러독스 속에서 영원을 경험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상에서 "목이 마르다"한 그 예수가 또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네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 지를 알았으면 드디어 네가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며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생수를 줄 수 있는 이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물을 구걸하는 그가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뜻을 알지 못한다. 그의 눈에는 당시에 축적된 종교관념의 껍질이 덮혀 있는 것이다. 초월자는 초월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영광속에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관념이 그가 선 지금 여기를 볼 눈을 흐리게 한 것이다. 그러한 눈에는 지금 여기에는 한낱 목말라하는 나그네, 물을 주고 싶어도 역사적으로 원수된 지방의 사람이기에 줄 수 없는 적대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대화는 계속된다. 이 나그네는 네가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한다. 이래도 이 여인에게 그가 말하는 그 나그네를 꿰뚫어 볼 눈이 열리지 않는다. 마침내 이 나그네는 그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간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이것은 그 여인의 숨은 비밀의 베일을 찢는 행위다. 그때 이 여인이 디디고 선 축대는 흔들린다. 즉 그는 그 나그네에게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본다. 그래서 당신은 예언자라고 한다. 따라서 그의 화제를 육체의 필수품인 물에서 종교 영역에로 이동한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저들의 성전 그 어느 것이 참 옳은 예배장소이냐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문제에서의 도피다. 그것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간의 종교적 논쟁의 테마다. 즉 그는 교리세계로 도피함으로 지금 여기를 외면한다. 그러기에 이 나그네는 그의 도피의 길을 막는다. 아니 예루살렘이냐 이 산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참 예배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때다. 참 예배 드릴 수 있는 때, 바로 그 때가 지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에서 그 눈을 장차 올 때에 돌린다. "저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줄 압니다." 이것은 마지막까지 도피하려는 인간상을 잘 대표한 것이다. 아니, 오면이 아니다. 이미 네 앞에서 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바로 그다." 다른 때가 아니다. 지금 여기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 너와 말하고 있는 이! 거기에 초월자가 있다는 것이다.

(1970. 8. 『현존』)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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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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