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설화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에 있을 뿐인데 그 자료들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역사상의 인간들이 예수의 탄생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가는 그 어린이가 짐승들이 우거하는 외양간에서 나서 말구유 위에 누웠다는 것이요, 마태는 그가 탄생했다는 소문을 들은 헤로데가 탄생했다는 지역의 어린이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성탄설화를 전하지 않고 있으나 그것과 관련된 내용으로 위의 두 복음서와 상통하는데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습니다"가 그것이다.
왜 예수는 말구유에 나셔야 했나? 예수의 나심은 무자비한 칼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는 것인가? 마태오는 "여관에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루가는 "헤로데가 매우 불안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은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니 어두움이 빛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탄생했다. 비록 인간들이 사람이 있을 곳을 다 독점하고 또 그 기득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이질적인 것들을 배척했어도 그는 탄생했다. 그런데 그가 탄생한 곳은 말구유며 그의 탄생을 헤로데의 칼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것은 2천 년 전의 우발적인 전설인가 아니면 오늘도 계속되는 현실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7년 독일전범자 재판장에 한 증인이 출정했는데 그는 폴란드 비르나에 있는 유태인 공동묘지에 피신해서 살아남은 유태인이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지대의 유태인은 모두 학살 당하고 오직 그 묘지에 숨은 자들만이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무덤 사이에 피신하고 있는 동안 한 여인이 아들을 해산했다. 그때 80세가 된 무덤지기 노인의 도움으로 순산했는데 그 어린것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노인은 "크신 이여, 마침내 당신은 우리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것입니까? 메시아 외에 누가 또 무덤 속에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라는 기도를 올렸다. 메시아 외에 또 누가 무덤 속에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절규와 같은 기도는 현 역사의 한 성탄절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세상에 머무를 곳 없어 무덤으로 쫓겨난 바로 거기에 성탄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은 절대로 메시아를 자기들의 처소로 영접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 기도는 참 생명은 바로 죽음의 사선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기도는 참 생명은 무덤(죽음)을 뚫고만 탄생한다는 확신이다.
이 무덤 속의 기도는 바로 2천 년 전 그 성탄절의 현재화가 아닐까? 이것은 그 어린것을 낳은 그 엄마의 젖을 대신한 기대 아닌가? 그런데 이 어린이는 먹을 것이 없었다. 사흘동안 말라붙다시피 한 그 엄마의 젖을 빨던 어린이는 기진했다. 그 어린것을 가슴에 품은 그 엄마는 속절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이 어린이는 그 흐르는 엄마의 눈물을 빨아먹더라는 증언이다. 이 어린이는 비통과 고난과 슬픔이 액체가 되어 흐르는 눈물을 빨아먹은 것이다. 그는 그 비통함과 고난의 슬픔을 제 몸에 흡수한 것이다. 여기 메시아의 모습이 엿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누가 아기를 무덤으로 내 쫓았나? 누가 저에게서 먹을 권리를 뺏었나? 증오의 화신이 된 권력이 그랬다. 권력이!
이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의 축소판 아닌가? 진리가 양심이 정의가 설 자리가 어디 있는가? 그런 것을 그대로 나타내면 그대로 밟아 죽이려는 현실이 아닌가? 오늘의 엄마들은 자식들의 정당한 권리를 수호하며 정당한 것을 주장하게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진리와 정의의 대부분이 짓밟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무덤으로 향하고 있지 않는가?
성탄은 칼(권력)과 독점력이 도사린 바로 그런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오늘 우리는 그같은 현실에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바로 지금 예수는 그 어디엔가 탄생했을 것이다.
그는 말구유에 놓였다. 그럼 오늘의 말구유는 어디 있는가? 오늘의 무덤 있는 곳은 어딘가? 교회당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들로 꽉 차 있다. 성탄축제의 장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삶의 즐거움을 확산하는 흥겨움으로 점령되어 있다. 고요하고 단아한 가정들의 성탄나무 밑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안정과 기득권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 우글거리는 저 민중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다. 초상집보다 잔치집에 마음이 쏠리고, 슬픔보다 즐거움을 찾고, 고통이 싫어 악에 타협하고 편승하여 모든 것을 적당히 넘기려는 그 마음이 있는 한 수난을 숙명처럼 지니고 난 어린이가 누울 자리는 없다. 아니다. 오늘의 그 어린이도 있을 곳이 없어 쫓겨난 자들의 품에 있을 것이다. 인권을 유린당하고 맘과 행동에 속박을 받은 채 여명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 속에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눈물을 음식으로 하는 그런 이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 어린이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2천년 전의 헤로데의 칼은 아직도 모두 꼽힌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어린이를 찾는 일은 시급하다. 그러나 그를 찾아 그의 편에 선다는 일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 까닭은 그 어린이는 이미 십자가를 지니고 났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구유는 어디 있나? 헤로데의 칼이 그것을 찾기 전에 급히 찾자.
(1973. 4. 『세계와 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