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0일부터 기장 총회가 열렸다. 총회 표어가 '하나님은 화해하시고 자유케 하신다'라는 70년의 세계교회의 표어와 '하나님의 선교의 역군이 되자'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이 주제강연을 부탁해서 두 번 말씀할 영광을 가졌으나 모처럼의 기대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아직도 가슴이 얼얼하다.
나는 교회의 총회라는 것을 처음 구경했다. 내게는 정치라는 것을 무서워하는 소아병이 있나 보다. 총회도 교회정치를 하는 장소라고 해서 경원해 왔기에 그런데 가본 일은 없다. 나는 한국 교회에서 분열의 결투를 벌인다는 이야기는 무수하게 들었어도 한 번도 목격한 일은 없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조야 가지 말라!'라는 경고에 충실한 셈인가? 그렇다고 총회에는 까마귀만 모이고 나는 백조다라고 생각한다면 짐승도 실소할 게다. 문제는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그 구조성 때문이다. 그런데 총회란 정치적 의회형식을 가졌고 집행부도 있으나 국가가 가진 것 같은 절대권이 없다. 전에는 교회가 출교(出敎), 나아서는 사형권까지 가졌다. 그래서 억울한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그때의 교권주의를 그대로 지니려고 하지만 그런 결정권은 없다. 그래서 결국 당파 구성, 교인들의 교란 등의 모략으로 계속 싸움을 재연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지쳐서 물러서는 자는 있어도 배짱만 세면 누구도 내몰지는 못한다. 그러니 종당에는 국가법에 호소한다. 이래서 빌라도 법정이 계속 재연된다. 실력행사권도 없으면서 교권적인 정치체로 몽상하는 데 교회의 악순환이 있다. 그래서 남의 눈에는 '더 더럽고 치사하게' 보인다. 나는 교회가 특히 썩었다는 비판은 반대한다. 아무리 그래도 교회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깨끗하다. 교회의 위력은 아직도 많다. 그 멤버들도 이것이 참 진리라고 알면 복종할 태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나는 교회가 분열되는 현재의 죄는 중세기적 교회관의 잔재에 있다고 본다. 정치적인 도구로 된 그 교회관 말이다. 언젠가 나는 기차로 부산으로 가면서 십자가를 단 교회 건물아 그처럼 많은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구석구석 침투 안 한 곳이 없어 보였다. 교회는 자고 있는 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이 깨어나서 한 목표를 향한다면 누가 당해 낼까? 정치단체들의 소위 지구당설치 상황보고를 들을 때마다 교회의 분포도를 세력권의 분포로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힘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스스로를 위한 일에서 탈피해서 그 힘을 밖으로 뻗친다면 그 힘을 누가 당하랴!
그러나 교회는 '너'를 위한 싸움에서만 힘이 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너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련다'라는 각오가 서는 날이면 그리스도교회는 깨어난 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총회의 전국에서 모인 대표들의 진지한 모습을 모고 존경의 마음이 생겼으며, 주의 손이 저들을 깨여 일으켜 주시기를 기원했다.
'하나님은 화해하고 자유롭게 한다'
그런데 그의 손발은 사람인 것이다. 화해, 나아가서는 평화를 위하려면 평화를 가로막는 불의와 싸워야 한다. 평화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타개할까?
자유를 위한 싸움은 책임이란 것을 내세워야하는 아이러니가 뒤따른다. 이것을 어떻게 타개할까? 자유의 쟁취를 위해서 무엇인가 의지해야 한다. 무엇을 의지하면 또 그것에 예속된다. 제한성을 다 제거하고 자유만 주장하면 사람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하느님이 자유케한다'는 믿음만이 자유를 위한 싸움의 대열에 선 사람을 자유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교두보이다. 그렇기 때문에 있음에서 자유를 위해서라는 선의가 직접 불의를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은 버리고 나의 이 선의 마저도 불의 앞에 짓밟혀 죽는다는 현실을 승인할 때만 그 선의가 좌절되거나 변질되지 않을 것이다. 이기는 것은 하느님뿐이다. 나는 이 믿음을 애써 강조하려고 했다. 나는 이 강연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간다. 그리고 본회퍼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