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따르면, 예수에 대해 우리의 갈 수 있는 길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나에게 충족하지 않고 자기 의무를 피해 버릴 수 있는 도피처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체로 이런 관계에 있기 때문에, 생활에는 아무 영향도 수용하지 않고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길이다. 가령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 같다……"(마태 7, 34 이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정말 그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산상수훈의 말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다가는 얼마 못 살아갈 것이다.
셋째는 예수를 따르는 길이다.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그것은 그처럼 살라는 말이다. 본회퍼가 Nachfolge(따르는 자)라는 글을 썼을 때, 그처럼 그를 따른다는 것은 죽음에의 각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따른다"는 것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첫 관계에 머물고 꼼짝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한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14, 12)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 못해도 믿기는 한다는 말이 옳으며, 그런 삶이 가능한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첫째 경우 즉, 그를 따르는 길의 한 면을 배우겠다.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간 길을 가는 것이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를 만나 그 병을 고쳐달라고 사정했다. 나병 환자! 이는 당시 사회의 관습에서 천벌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자이다. 병으로 수난당하는데 동정은 고사하고 저주받은 자로 모멸의 대상이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 집, 제 가정에서 배제 되어야 했다. 그는 이중으로 버림받았다. 자신의 몸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길도 이중의 해방이어야 했다. 병에서의 해방, 그리고 소외상태에서의 해방이다.
예수는 그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내가 그렇게 해 주마. 다시 깨끗해지라!"고 함으로 그는 병에서 해방되었다.
그것으로 다 되었나?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그것은 소외상태에서의 해방인데, 그것은 그가 제 집, 제 가정에 돌아가서 더불어 살 수 있는 권리를 도로 되찾아 주는 일이다. 즉, 복권(復權)이다. 유대사회에서 몇 가지 병 중의 하나로서 나병은 그 병이 완치되었을 경우에 제사장의 인정서가 있어야만 복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를 "이제는 나를 따라 선교 활동에 참여하라"고 하지 않고, 그의 동리로 보내면서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여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수속을 밟으라고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경우를 예수의 행태에서 자주 본다.
"집으로 가라"
2장의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명한다.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을 가라!"고 말한 것처럼, 또 5장의 거라사의 귀신들렀던 자가 나은 후 예수와 함께 가기를 애원했는데도 예수는 거절하시며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하느님이 네게 행한 큰 일과 큰 자비를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신다.
가라! 집으로! 가족에게로! 이것이 복권선언이다.
금년 봄 타계한 유영모 선생은 "더러운 것이란 따로 없고, 있는 곳에 있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밥알이 밥그릇에, 똥이 변소에 있으면 더러운 게 아니다. 있을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더럽다. 무자격자가 무슨 수를 써서 격에 맞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더럽다. 일러 악화가 양화를 내쫓는 사회는 망한다고 한다. 군인은 전선에, 학생과 교수는 학교에, 목사는 교회에, 중은 절에 있어야지,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그 있을 자리에 있지 못한 때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건 더러운 것, 썩어간다는 말이다. 성서는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데에 서면 그것이 바로 위기라고 한다.
있어야 할 자리!
자식은 부모와의 관계가 정상이 될 때, 그게 있어야 할 자리이다. 양은 목동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정상이다. 그리고 죄 없는 사람이 불한당을 만나 구석진 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그 자리를 그냥 지나가는 종교인들은 있을 곳에 있지 않기에 더럽다.
우리 중에 많은 형제들이 정부에 의해 죄수로 낙인찍히고 감옥에서 살았다. 그것은 제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있을 곳이 아니다"고 생각지 않았다. 우리의 싸움은 바로 자기들이 있을 자리가 아닌 것을 총칼로 뺏고, 민에 군림하며, 천하의 협잡꾼들을 졸지의 부자로 만들고, 그 등을 쳐 먹는 저들이 더러워서 저들을 비판했다고 국민권을 박탈한 그 권리를 찾아 주기 위해서 싸우다 감옥에 갇히었다. 즉 예수를 따르는 자로써 복권운동을 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아주 상식적인 과제가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속한 것은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다. 어떤 계기로든 사람들이 남의 것(우리는 이것을 천의 것이라고 한다)을 가로챘다. 우리도 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 가로채는 방법은 꼭 불법적이 아닐 수도 있다. 가령 고리대금을 한다, 담보물을 받고 빌려 준다, 합법적으로 남의 재산을 가로챈다 등등을 통하여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을 "합법적"이라는 이름으로 한다.
이렇게 무엇이나 있을 곳에서 한쪽으로 몰리면 세상이 균형을 잃어 마침내 파도에 시달리는 배가 균형을 잃어 침몰되듯이 함께 침몰된다. 예를 들면 생태학적 위기도 바로 그런 것이다. 오염, 오염하지만, 오염하는 물질이 지구 밖에서 새삼 들어온 것이 아니다. 아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할 것들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거기 살던 생물들을 죽여버린다. 있을 것이 제자리에 또는 흐를 것이 제 길로 고루고루 가게 되면 새삼 독극물이 될 까닭이 없다. 권력이 한쪽으로 몰리거나 재산을 극소수가 독점하면 그 나라가 썩고 망하듯이, 소비물이 한 곳으로 몰리면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위기에서의 해방도 바로 있을 것을 있을 자리에 있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하나도 제거할 수 없는 유용한 것으로 작용하도록 된다. 그것도 시급한 복권운동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말들이 영어에는 되돌린다는 뜻의 Re-가 붙는다. Reformation, revolution, release, rehabilitation, renaisance 등은 모두 어디로 되돌아간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성서에서도 안식년, 희년은 원래 있던 자리로의 되돌아감이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지금 오래 대학에서 쫓겨났던 교수들이 대학으로 되돌아 왔다. 이를 일컬어 복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슨 복권! 가르칠 권리를 되찾았나? 그러면 가르칠 내용은 복권되었나? 발언권은 복권되었나? 그렇지 않다. 나는 몇몇 교수들과 더불어 75년에 대학에서 추방되었다가, 80년에 "복권"되었다가, 불과 몇 달만에 다시 탈권되었다가, 만 4년만에 "복권"되었다. 그러니 나더러 복권을 기뻐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오늘날의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권운동도 결국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자는 것, 아이는 엄마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농부는 농토에, 노동자는 공장에 돌아가서 거기서 사람의 자기 자리를 되찾아 주자는 것이다.
개인 사이의 막힘은 그 중 누가 남의 것을 뺏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관계가 막혔다. 제물 드리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보다 돌려 줄 것 돌려 주라. 그러지 않고는 하느님과의 길은 막혀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돈 벌었으면 그 사회에 어떤 형태로나 돌려야 한다. 돌리지 않으면 남의 것을 뺏은 원한을 산다. 사회는 뺏고 뺏기는 사회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뺏기는 자의 뺏긴 것을 찾아 주고, 뺏기지 않도록 견제세력이 되어야 한다. 예수가 한 일은 결국 이것이다.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