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무위와 신앙
마태오복음 6, 24-34
1. 이거냐 저거냐?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 "doulow"는 종이 된다는 뜻이다. 자기를 예속 또는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어느 주인에게도 충성하지 않는 것인데, 그러면 어느 쪽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는 대신 선 자리가 없기 때문에 뿌리 없이 떠다니는 사람일 수 있다. 한 걸음 나아가서 두 주인을 가졌다는 것은 실은 두 주인을 다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치 이중 스파이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 중 스파이는 결국 어느 손에 의해서든지 파멸되고 만다.

사람이란 구체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한계를 갖는다. 때로는 우주를 손 안에 장악한 주인인 듯이 사변의 유희를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언제나 하나와의 관계에서 충실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리나라는 한 여인이 두 남자와 관계하고 있는데 하나는 남편으로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애인으로서 가지는 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결국 어느 사람에게도 귀결되지 못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그녀는 둘을 가졌기에 어느 하나와의 관계도 성립시키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둘 중 어느 하나도 참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분화될 수 없고 오직 전체로서 있을 때만 현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sowhol … auch"가 아니라 이거냐 저거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이다. 사람이 중립적인 입장은 순간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그 결단을 못하고 있는 동안은 나는 나로서 구체적인 존재가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둘이 있는 어린애는 슬프다. 그 어느 쪽에도 애정을 못 가져 결국 출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둘 중 하나를 결단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럴 때만 자기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거냐 저거냐의 딜레마에 잘 빠진다. 결단 못한 상태처럼 불안한 때도 없으려니와 자주성은 완전히 정지되고 그저 홍수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밀려갈 뿐이다. "좀 더 생각하고" 또는 "숙제로 하고" 하는 동안은 나는 나로서 사는 기간이 아니다. 시간적 존재로 인간은 "잠깐만 기다리시오" 할 여유를 허락받을 수 없다. 마치 죽음 앞에 선 사람이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가 죽을지 안 죽을지 생각해 보고" 하는 사람처럼, 결단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주인이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하느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 여기서 재물이란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즉, 내가 소유했다고 믿고 또 거기서 삶의 보장을 기대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성서는 하느님 외의 사람이 디딘 거점을 세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세상을 하나의 제동하는 힘으로 표현할 때는 "사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를 사로잡는 힘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재물"이라는 것이다.

재물!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집요하게 "내가 네 삶을 보장해 주마"라는 매력적인 유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것은 사람에 따라서 권리도, 명예도 또 배고픈 자에게는 한 그릇의 밥이, 목마른 자에게는 한 그릇의 물이 될 수도 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것은 이 물질이 얼마나 구체적인 유혹의 힘인가를 경험한 옛사람들의 고백이다.

성서에는 중립적인 모호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어서 결단하라고 촉구한 표현이 많다. 그런 엉거주춤한 자를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하고 토해버리겠다고 한다. 이런 존재는 구토의 대상이란 말이다. 또는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오는 자라는 뜻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서구의 기독교가 소위 우주적인 위대함을 나타내어 한 손에 십자가를 한 손에 칼을 들었다. 법왕의 관은 3층으로 이 세계와 천상, 지하의 세력을 다 장악한 상징으로 삼고 있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sowohl … auch)를 상징한다. 이에 반발한 것이 루터이다. 그래서 두 영역을 갈라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이런 양상에 구토를 느껴서 그런 것에서 탈출을 선언한 이가 니체이고 그것에 결사적으로 도전한 사람이 키에르케고르다. 그에게는 "entweder-oder"이지 중간 상태는 있을 수 없다. 본 훼퍼도 소위 기독교적이라는 모호한 이름 아래 "이것도 저것도"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포문을 연 것이다. 불트만은 예수의 안식일 논쟁 해석에서, "안식일에는 쉰다"는 것을 안식일을 중립적인 무위의 상태로 오인한 유대인들에게 말한 예수의 말인 "안식일에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할 것이냐, 사람을 살릴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죽일 것이냐"를 풀이하여 말씀 안에는 "소위 거룩한 무위란 없다"고 말한다. 즉, 선, 악 간의 결단만이 있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는 악에 가담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느님을 믿으려면 철저해야 하고 돈을 믿으려면 거기에 철저해야 할 것이다—사람에게는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없다.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미워하느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한다는 것과 미워한다는 사이의 그 거리는 양적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삽입구도 없으며, 매개한 어떤 다리도 없으며 아주 적은 분리부도 없다고 한다. 물체가 진공 속에서 무한한 속도로 낙하하듯이 사랑과 증오라는 절대 상대적인 것이 거의 동시적으로 연속될 수 있다고 한다. 또는 진공 가운데서 떨어지는 물체를 막을 제3의 사물이 없듯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멈출 제3적인 것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 사이에 많은 거리가 있어서 그 사이에 다양한 중간 상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람과 사귈 의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저를 미워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이것은 많은 사람과의 사귐이라고 그 사귐을 추상화할 때 그렇다. 그러나 사귀는 범위가 좁으면 좁을수록, 소위 사교적인 교제가 아니면 아닐수록 내면적인 관계가 되면 될수록 "이거냐, 저거냐"를 강요받게 되는 것이고 중립적일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면 소위 사교적일 수 없다. 즉, 사랑은 비사교적이다.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란 단독적인 관계다. 그는 나와 홀로 만나는 관계다. 그러므로 내가 제3적인 것으로 대할 수는 없다. "하느님이냐, 아니냐"이지 그 중간은 없으며 소위 기독교적인 취미 또 철학적인 귀결로서의 하느님의 인정 또는 교회 종교의식, 종교적 사귐 등으로써 대체할 수 없다.

2.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면 실제로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본문은 "그런고로"로써 구체적인 경우, 즉 목숨을 위해 몸을 위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첫째,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먹지 않아도 되고 입지 않아도 좋다거나 또는 그런 것을 위한 노력도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염려말라는 말은 생각 또는 계획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염려하는 특징은 목숨보다 눈에 보이는 이 음식이, 몸보다도 저 의복만이 눈에 보이고 그것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것을 얻으면 거기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거기에 궁극적 최후 목적이 있는 줄 아는 그런 근시안적인 삶의 자세를 금하는 것이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 듯이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정의고 신앙이고 하느님이고 까맣게 잊어버리는 자들, 그런 것들을 말로써는가장 귀중하다고 하면서도 그런 것을 다 팔아버리면서 먹을 것, 입을 것에서 보장을 찾으려는 무리에게 하는 말이다. "당장 배고픈데 우선 먹고 봐야지,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소위 입으로는 하느님하면서도 하느님을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는 자기를 반성하려고 않는 말이다." 이상주의 시대만 해도 또는 국가, 맹세, 또는 명예를 위해서 생명까지도 초개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고 혁명아들도 이런 희생을 스스로 자취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그것이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가?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음식이나 의복 등에 나를 노예화한다. 그럼으로써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3. 올바른 선택과 위로

그러나 본문은 다음의 위로와 약속을 한다. "공중에 나는 새도 들에 백합도 하느님이 먹이고 입힌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걱정마라, 네 삶의 보장은 내 하느님이 한다." "염려 말라." 이 말에 우리는 반문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나 그런 반문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이 약속과 유리되어 있다. 이 말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절대적인 말이다. 이것은 오직 "믿고 복종하느냐" 아니면 "난 당신을 못 믿겠소" 둘 중 하나만이 허락된 약속이다.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지 그것은 내게 속한 일이 아니다. 이 약속을 "그럼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당신이 먹여 주고 입혀 주겠지"라고 이해해서도 안 된다. 이 말의 뜻을 "백합이나 공중에 나는 새나 되었으면" 하는 시인의 노래와 같은 염원을 안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내 실존을 내맡기느냐 아니냐 뿐이다. 우리는 백합이나 새처럼 먹이고 입혀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인데, 그대로라면 "나도 내일 아궁이에 던짐받더라도 지금 당장 먹을 것, 입을 것만 주면 한이 없겠오" 하는 기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람을 새나 꽃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꽃과 새를 입히고 먹이는데 하물며 너희들은 보호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이 자연은 그에게 주어진 궤도에 아무런 반항도 없이 순응한다. 거기는 반역이 있을 수 없다. 자연의 복종은 영원한 침묵으로 한다. 자연은 자기 운명을 걱정하거나 주어진 궤도에서 벗어나 다른 보장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침묵하고 그 궤도 안에서 산다. "가만있어도 먹인다고 하니 누워 있지" 하지도 않고 그저 침묵으로 복종한다. 한마디로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고초나 기쁨을 그대로 조건반사적으로나타낸다.

4. 자연과 무위

공자는 순례의 정치 설교자다. 그는 왕도주의자로서 덕치의 설계도를 가지고 나라를 쪼개어 가진 봉군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그의 구상으로 설득해 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그나름으로 베틀에 앉아 실을 가로 세로 엮으면서 베도 만들고 비단을 짜내듯 인의예지 삼강오륜을 골자로 한 정치윤리의 틀을 짜려 하고 있다. 그러나 노자에게 인간을 위한다는 그것이 실은 인간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그물로 보고 이에 반기를 들었다. 무, 무위란 바로 공자에 의해 닫혀진 유교의 그물을 찢는 칼이 되었다. 그렇다고 저들은 대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나무라는데 바로 대안을 내놓지 않는 게 대안이다. 한마디로 <내맡김>이다. 이름할 수 없는 것에(그는 도라는 말에 매이지 않는다) 그냥 무장해제하고 전신을 내맡기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자는 잔소리꾼이고 일일이 제 손이 가지 않으면 세상이 망할 듯이 불안해하는 잔 걱정꾼인데 대해 노자는 큰 품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품에 안겨 잠을 자는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다. 둘을 폭풍 만난 호수에 뜬 배에 탄 일행 중의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과 그물을 베개로 하고 코를 고는 예수와 비길 만하다. 공중에 나는 새가, 들에 핀 꽃이 인간의 덧없는 걱정과 불안해하는 꼴을 비웃고 있지 않다. 무위 속에서도 저 꽃은 솔로몬의 영화를 앞지르고 있지 않나, 예수는 이것을 최제우처럼 무위아화(無爲而化)로 보았는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무위아화를 믿게 된 최제우가 잘못되어 가는 나라 일에 예민했듯이 예수도 시대의 흐름에 예민했다. 그러길래 제자들에게 너희가 자연현상인 날씨를 판별할 줄 알면서도 이 때에 대한 역사의식이 없느냐고 나무랐다. 예수는 자연주의자는 아니었다.

5. 먼저 구할 것

그러한 근심을 내맡기고 낮잠이나 자라고 하지 않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한다. 마태오복음에는 그 나라에 그 의를 덧붙였으나 그 나라 안의 포함된 내용일 뿐이다. 무위이화를 믿는 최제우가 하원갑(下元甲, 현세)에 대해 상원갑(上元甲, 올 새 세계)을 말하고 개벽을 말했듯이 예수도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것은 기묘한 공통점이다. 그런데 예수는 무위를 말하지 않고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한다. 그것은 그 나라를 기다리고만 있는 방관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그저 오는 세계가 아니라 내가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싸움에 참여할 때만 실현될 수 있는 그 나라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온몸을 기울여 쟁취할 것의 초점이 무엇인가 알고 자기 힘을 우선적인 것에 기울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이 바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참 길이라는 것이다. 밥은 생명 줄이다. 그러나 그것에 매이면 나를 잃는다. 밥을 생명이 되게 하려면 밥에서 해방되라. 그때만 그 밥은 내 것이 되며 나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라는 외점에 발을 디뎌라. 그러면 지구를 밀 수 있듯이 밥의 주체가 된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