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학생 전체가 주최하는 기념 강연회가 4월 10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였다. 내가 맡은 제목은 "부활의 현대적 의의"였다. 가톨릭의 신부 한 분과 학생 한 분이 강사였다. 나는 "십자가는 의(義)는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요, 부활은 이 패배 자체가 승리한다는 사실의 입증"이라고 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는 소리를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차례로 현실의 불의한 곤봉에 얻어맞으면 체념하게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 부활은 "정의는 진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긴다"의 신앙이다.
강연장의 분위기는 긴장돼 있었다. 작은 장소이기에 학생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으나 400명을 넘지 못했다. 나는 정의하면 죽음이 연상되고, 부활하면 십자가가 연상됐다. 말하는 동안도 내 말에 정말 성실하려고 하니, '피',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내 다음의 두 분의 이야기까지 듣고 도중에 나와야 했다. 그 다음의 과제가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 나는 비로소 신문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서 그 모임의 학생들이 십자가를 메고 남산에 다음 날 있을 부활절 예배에 참여할 전제로 행진하다가 경찰과 충돌되어 십자가는 부서지고 대소동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확실한 것인지는 몰라도 십자가를 발로 밟았다는 말을 들을 때 거의 본능적으로 속으로부터 분노를 느꼈다. 그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무언데!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한 조각의 나무지만 그것에 응결된 신앙 또는 정신이 밟힌 때문이다. 내 머리에는 십자가에 얽힌 사실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밟으라고 강요하는 일본 그리스도교 박해사가 연상됐다. 그것을 밟으면 살리고 안 밟으면 죽였다. 생각에 따라서는 그 따위 쯤 밟는 것과 생명을 바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끝끝내 그걸 밟는 대신 목숨을 내댔다. 혹은 약해서 그걸 밟은 그리스도 인들이 있었으리라. 그 얼마나 속으로 울었을까 생각됐다. 형식과 내용은 유리돼 있지 않다. 상징은 경우에 따라서 그 본체 그대로가 될 수 있다. 본체와 상징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은 정신이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십자가가 밟혔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리스도 자신을 밟은 것 같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내가 밟혔다는 것보다 분하다. 그러나 내 분노는 안으로 향했다. 도대체 수백만 명을 헤아리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무능하게 보였으면 이렇게 멸시를 받아야 만하는가고! 그 무능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밟히지 않으려고 몸을 빼는 데서 와진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대신 또다시 십자가 자체가 밟혔다.
그 후 신문 가십에 그 십자가의 수난의 한 토막이 또 보도됐다. 그 부러진 십자가는 어느 경찰서 뒷뜰 쓰레기통에 버려졌더라고! 체포돼야 할 그리스도인들 대신 또 그 십자가가 체포됐다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바 되어 쓰레기통에 던지워졌다. 그것도 부활절에!
(1971. 3.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