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구유에 누운 아기'는 크리스마스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성서에는 예수 탄생에 대해서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태오라는 편자는 어린 아기 예수의 탄생에 동방의 현인들이 찾아와서 경배하고 보화를 바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루가라는 편자는 이 아기가 짐승의 우리인 마굿간에서 났으며, 그를 찾아온 아들은 천민인 목동들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마태오가 전하는 이야기는 왕적인 존재의 탄생으로 성격화했다. 그러나 루가가 전하는 이야기는 맨 밑바닥에 온 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가 교회 전통에 의해서 각색되어 제3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내려온다. 즉 말구유에 나신 아기를 현인들과 목동들이 경배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말구유와 현인의 경배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태오에는 말구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굿간의 말구유에 누운 이는 목동이 경배해야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런데 교권은 이 이야기를 뒤섞어서 미화해 버렸다. 그러자 이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해괴한 현실을 빚어냈다.

서구에 가본 사람이면 교회 건물들의 웅장함에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다. 그 규모나 풍요함은 동양 어떤 종교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아름드리 대리석 기둥들, 하늘 높이 솟은 종탑들, 온 벽을 누빈 조각들, 온갖 황금 보화로 꾸민 제단, 그 구조가 어찌 큰지 그 안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큰 동굴 안에 어른거리는 개미새끼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어떤 왕궁도 더 이상 웅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계절이 오면 묘한 일이 벌어진다.

교회마다 크리스마스의 마굿간이 세워지고 말구유 위에 어린아기를 눕히고 한 편에 현자들이 다른 한 편에 목동들이 경배하는 세트가 마련된다. 그런데 그 세트는 어떤 것은 실물 크기로 만들어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크기 때문에 화려한 방 한구석의 쓰레기통같이 부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이 무슨 장난들인가?

교회란 바로 말구유의 사건 위에 세워졌는데 언제부터인가 교회 건물이 이 사건을 축소시켜 삼켜버린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변질된 것인지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마굿간이나 구유와는 인연이 없다. 따라서 구유에 눕힌 아기 사건이 담은 메시지를 전승할 수 없는 것이 됐다.

오늘의 한국의 그리스도교회도 날로 변질돼 간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망국의 슬픔과 가난의 서러움을 안은 민중들의 피난처요 품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 모습을 바꾸어 가게 됐다. 교회 건물들이 커지고 장식이 화려해지고 목사가 근거 없는 가운을 입기 시작하더니 찬양대들까지 가운을 입고 오늘에 와서 헌금을 걷는 사람들마저도 그런 것을 걸친다. 그리고 마루에 그대로 앉을 자리에 의자들이 들어서고, 앞에 덩그러니 강단만 있던 것이 점차 제단처럼 장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이제는 밥술이나 먹고 외출복 몇 벌 정도 가진 사람은 그 자리에 참여하기에 쑥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졌다. 결국 목동은 추방되고 보화를 가진 현인들이나 참여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말구유에 어린 예수를 눕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는 장소는 기득권자들로 만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소외된 자의 자리에 왔다는 뜻이다. 그것은 섬기기 위해 온 자의 위치이다.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위해서 삶을 바치는 자의 길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는 성탄을 해마다 축하하면서도, 그리고 구유에 누운 아기를 축하하면서 자신은 날로 팽창하고 위신을 세우고 화려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묵살하거나 하나의 동화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섬기는 자의 상징은 아니다. 아니 군림하려는 기관이다. 남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안간힘을 다 쓰는 '기관'으로 보이게 됐다. 수 억원, 심지어는 수백 억원을 들여 맘모스 건물을 짓는 경쟁에 혈안이 되고 버스를 위시한 각종 차를 동원하는 것은 교인 쟁탈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의 인상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행태는 결국 구유의 아기를 추방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자기 모순은 다른 면에서도 드러난다.

도처에 교회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비록 전세로 출발했어도 십자가 탑을 높이 세운다. 밤이 되면 앙상한 해골 같은 탑은 보이지 않고 붉은 빛의 십자가상이 즐비하게 보인다. 십자가는 사형 틀로서 기존체제에 의해서 배척받되 철저히 받은 구체적 증거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됐다는 것은 말구유의 아기의 운명을 철저화한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버림받음으로 버림받은 자의 친구가 됐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 십자가의 뜻이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이와 밤거리를 거닐었는데 시야에 붉은 십자가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향해 몰려 오는 듯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던 그 이가 그것이 마치 KKK패를 연상하게 한다고 했다. 소름이 끼쳤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 십자가 군상이 혹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복면을 쓰고 가슴에 십자가상을 붙이고 횃불을 들고 몰려오는 테러리스트 패를 연상하게 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현상인가!

교회가 평소 어떤 인상을 주었으면 그 밖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게 됐을까? 따지고 보면 십자가형을 크게 내세우나 십자가 사건은 교회에서 소외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가톨릭에서 이 십자가형이 장식품이 된 지 오래지만 개신교에서도 십자가형은 날로 화려해져만 간다. 그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각오가 소멸된 것과 때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은 종교적 상징 이상의 의미가 없고 따라서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장리품이 되어 '조롱'을 당하게까지 된 것이다.

바로 이런 판이기에 말구유에 누운 아기가 그리운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다 비워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