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의 선구자 요한이 예수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한 말이다. '홍한다'(increase, wachsen) '쇠한다'(decrease, abnemen)는 상반개념이면서 함수관계에 있다. 이것은 '너도 잘 되고 나도 잘 되어야 하겠다'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염원이다. 너도 그리고 나도에는 일견 '서로'라는 뜻이 있는 듯하나 실은 유기적 관계가 계산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어떤 결과도 전제되지 않은 흔해빠진 이른바 휴머니즘에서 나타나는 삶의 자세다. 이에 대해서 '너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고'는 벌써 유기적인 깊은 관계를 전제한다. 그것은 내가 쇠해야 네가 흥할 수 있으며, 나도 흥하겠다고 너와 나란히 버티고 있는 한 너는 흥할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한다. 그러기에 여기에서는 결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한정된 면적에 두 나무가 서면 함께 자라지 못한다. 그럴 때 한 나무는 제거해야 한다. 한 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 쪽이 양보해야 한다. 또 하나가 땅에 들어가 썩어야 많은 씨알이 나온다는 것도 결국 자연에서 보는 생존원칙이다. 자연만이 아니다. 드높고 화려한 주택이 서면 어느 한 구석의 집들은 더 낮아지거나 없어진다. 치부하는 자가 소수면 대다수는 가난해진다. 그것은 한정된 물량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분배원칙이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벌었는데 무슨 상관이야'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논리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너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된 삶의 정신을 집약한 것이다. 세례 요한의 예수를 향한 자세가 그러했다는 것이나, 실은 예수는 '너'를 위해 자신을 철저히 버리기를 죽음에까지 했다. 이로써 그 후 순교자의 피가 역사라는 나무를 키우는 진액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자세가 있다면 그것은 큰 미담의 자료이고, '너는 쇠해야 하고 나는 흥해야 한다'가 생존싸움의 황금률 같이 되어 있다. 찰스 다윈의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논리가 마치 권리이듯 자기 주장의 무장으로 삼는 자들로 판을 치고 있다.
'나는 흥해야 하고' 하는 대전제 앞에서는 갖은 방법이 다 동원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흥할 길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은 제거해야만 한다. 이런 일이 정계에, 경제계에, 심하게는 학계에까지 번지고 있는 거 같다. 그들은 그것을 삶의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나'와 '너'의 정체다. 한 정치인이 정말 한 나라를 위한 위인이라면 '나'와 '너'를 통합해서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현명해야 한다. 너와 나는 통체의 어느 부분에 나타난 두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은 하나여야 한다. 그것은 '너'로서 나타날 수도 있고 '나'로서 나타날 수도 있다. '너'가 얼굴이 되어야 하겠다고 할 때에는 '나'는 '너' 안에서 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어야 하고, '나'를 내세울 때는 너를 흥하게 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서의 '나'임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나'와 '너'는 어느 개인아 아니라 한 나라 또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되, 정말 철저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나를 살리기 위해 나나 너는 죽어야 한다는 데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나와 너를 완전 분리시키고, 그 어떤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알고 서로 싸우다가 결국 그것을 완전제거하거나 불질러버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다! 너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살기 때문이다. 너나 나나 '나라'를 위한 제물이어야 하는 것인데, 어느 것이 그럴 수 있는 첩경이겠느냐를 선별하고 결단하는 일만이 있어야 한다.
(198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