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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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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사람의 기본 도리를 다음의 두 가지로 압축했다. 그 하나는 전체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의 두 가지 다른 경우에 반복되는데, 주목할 것은 그의 강조점이 후자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단수로 묻는 데 대해서 첫째 것만 제시하지 않고 동시에 이웃사랑을 말함으로 복수적인 대답을 하는 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달리 볼 수 있다. 즉 이 대답은 둘이 아니라 나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저 유명한 이른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 내용이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두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후자 즉 이웃사랑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이 둘은 원래 구약성서에서 인용된 것인데(신명 6, 5; 레위 19, 18), 그것은 본래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각기 독립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에게 와서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질문한 자가 율법교사로 되어 있는데,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이미 예수 이전에 이 두 내용이 결합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은 예수 이후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자명화된 것을 환기시켰을 뿐이다.

거기에서 질문자는 이 계율을 실천할 것을 전제로 구체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에 대해서 저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따른다. 그 내용을 집약하면 수난을 당한 사람을 돕는 자 자신이 이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서술함에 있어서 유다 종교를 상징하는 레위인도, 제사장도 이미 그 수난당하는 자의 이웃이 아니고 유다인의 통념에서 소외당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라는 시대적 비판이 칼날같이 번뜩인다.

우리가 이웃이라고 할 때는 지역적인 전제가 앞선다. 가령 '이웃사촌'이라는 우리말은 먼 데 있는 사촌보다 내 집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 가깝다는 뜻이다. '이웃 동네'혹은 '이웃 나라'라고 하는 경우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을 전제로 한다. 한문 전통에 있어서도대체로 이런 의미에서 인(隣), 방(邦)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에서 발전하여 이웃이란 가까운 사람, 나아가서는 위해 주는 사람, 내 편 등의 의미로 발전되기도하였다. 가령 논어에서 공자가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즉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했는데, 이 경우에 이웃은 나를 인정해 주고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면 그것은 지역을 넘어 선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이웃에 대해 더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긴 역사가 있는데, 이 비유에 대해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대표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의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교회 안에서 통용되고 있다. 그의 해석의 초점은 수난당한 자가 바로 고난당하는(죄에 의해서) 인간이요,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고, 그것이 많은 종파를 파생하는 결과를 가져온 독소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진정한 이웃이라면 이웃은 바로 메시아라는 결론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근경에 성서학에서는 '네 이웃이 누구냐?'라는 물음과 그 대답으로서의 비유가 동떨어진다는 이유에서 그것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대답은 바로 질문 자체를 비판함으로 다른 시각에서 참 이웃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그 묻는 자의 질문 '네 이웃이 누구냐?'라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중심에 두고 이웃을 찾는 데 대한 대답으로서의 이 비유는 수난당한 자를 중심에 두고 그에게 누가 이웃이냐고 질문함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중심을 옮겨 놓아 그 의미가 달라졌다. 즉 이웃은 수난당한 자를 돕는 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가 바뀐 셈이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의 이웃이라는 뜻을 좀더 다른 시각에서 물어보자. 예수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 주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사람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만 보면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유비시킬만 하다. 그런데 적대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억울한 정치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된 그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는 쉽게 속죄론을 동원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으니 그는 우리의 참 이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의미로 뛰어넘지 말고 수난당하고 있는 그 현장에 머물러서 저가 누구인가를 물어보자!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예수와 불한당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 준 그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가? 아니면 지금 불의의 급습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그 이름 없는 수난자와 비견되는가? 대답은 너무도 자명하다. 예수는 예리고 도상에서 수난당하는 그 사람과 똑같이 누구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 절규하고 있다. 그러면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예수가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면 수난자를 도와 준 사마리아인 자신이 아니라 예리고 도상에서 불한당에 의해 사경을 헤매는 그가 이웃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예수의 민중들은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되는 그 예수에게서 진정한 이웃을 발견했다. 그렇게 처절하게 패배하는 비극적인 인물의 운명에서 참 이웃됨이 무엇인지를 인식한 것이다. 저들은 예수의 그 수난에서 자기들의 지금까지의 관념을 깨고 수난당하는 '그의 무능', '그의 버림받음'의 현장에서 일단 절망했으나 그 안에서 저의 고통이 나, 우리를 위한 것 또는 대신한 것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재기(부활)한 것이다. 저들에게 예수 수난의 뜻이 이렇게 새롭게 인식되지 않았더라면 저들에게 부활 경험도 없었을 것이며, 그들도 부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예수가 참 이웃이며, 그 이웃은 참 메시아라는 고백이 성립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다시 그 비유로 돌아가서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수난당하는 자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무명의 수난자는 도움을 받아야 할 객체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수난의 현장은 사람에게 질문이요, 도전이요, 심판이며, 동시에 구원에의 부름(절규)이 된 것이다. 그 수난자 앞에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처음 레위 인, 제사장은 그 절규에 귀를 막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이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의 고난에 동참해 이웃이 되었다. 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 이웃이 되는 구원의 길이라면 저 지나간 자들은 이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로 심판을 받은 것이며, 바로 저들이 멸시를 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키면 이웃이란 주체이면서 객체요, 객체이면서 주체인 셈이다. 수난자는 그의 수난에 동참할 이웃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그를 만나는 자에게 참 이웃되게 함으로써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웃이다.

우리는 이 간결한 비유에서 발전적 상상을 전개해 볼 수 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저 피습자를 도우려다가 똑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만한 각오가 없었다면 그의 이웃될 용기를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돕는 행위가 아니라, 그 수난에 동참하는 행위인 것이다.

성서에서 '이웃'은 '원수'와 반대되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간의 관계를 나타내기 전에 집단성을 나타낸다. 구체적으로 '이웃'은 이스라엘민 자체요, '원수'는 이방인을 지칭했다.

그러면 광주사건에서 누가 이웃인가? 물론 동족이 이웃일 수 없다. 까닭은 동족이 동족을 학살한 사건아니까! 동족인 상대방을 원수(적)로 간주하고 학살했다. 그러면 학살당하고, 총맞고, 몽둥이로 맞아 피 흘리는 사람들을 구하며 저들의 대열에 참여한 아들이 수난당한 자의 아웃인가? 그렇다! 그러면 수난자들은 한갓 구제의 객체인가? 아니! 피를 흘리고 목숨을 빼앗긴 저들은 주체의 객체로, 패배당한 수동자로 머물지 않는다. 저들의 고통이, 그 참상이 이웃과 원수를 가르는 심판자가 된 것이다. 저들이 피를 쏟고 목숨을 내던진 것이 참 이웃을 부르는 절규가 되었다. 그 절규에 귀를 막고 그대로 모른 척 지나가는 사람은 결국 원수 편에 가담한 것이며, 그 절규에 귀를 기울이고 그 현실에 뛰어든 사람은 참 이웃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참 이웃 이 되게 하는 것이 참 구원에의 길이라면, 구원의 객체는 바로 그 절규에 참여한 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누가 네 이웃이냐?'는 질문의 대답은 "너를 참 이웃되게 한 이가 바로 네 이웃이다"고 해야 한다.

이로써 이웃에 주객의 구별이 없어진다. 수난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수난자의 반열에 서는 것이며, 그는 또한 남을 이웃이냐 원수냐로 갈라놓은 심판자임과 동시에 이웃되게 하는 참 이웃이 되는 것이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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