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예배에 나가면 똑같은 순서가 매 주일 계속된다. 똑같은 송영, 주기도, 찬송,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설교 등 어떤 이들은 그것이 귀찮아서 설교 시간에 맞추어 교회에 나타난다. 반복은 지루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설교도 본문에 충실하려면 반복을 피할 수 없다. 나도 같은 본문으로 여러 번 설교한다. 물론 그날의 본문을 보는 컨텍스트가 반영하기 때문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귀착점은 본문에 돌아가기에 같을 수 있다. 반복을 싫어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에게나 듣는 자에게도 같은 심정이기에 되도록 반복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삶은 반복에서 진전하지 않나! 어떤 측면에서든 반복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반복성(윤회)에서 탈출하자는 것이 구도의 궁극적 목적일 수 있다. 불교는 윤회의 쳇바퀴에서 해방되는 길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삶이라는 것은 무한의 반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반복의 시간성에서의 탈출의 현실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역사 안에 살고 있는 한 이 반복은 불가피하다. 반면에 우리는 이 반복에 노예화된 일면이 있다. 그래서 반복을 원한다. 매일 같은 삶을 영위한다. 하루 세 끼 같은 밥을 먹는데도 밥을 못 먹으면 허전하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밥맛이 제일이라고 한다. 매일 만나는 얼굴은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얼굴도 하루만 못 봐도 큰 것을 잃은 듯이 허전하다.
그런데 삶에는 반복이 불가능한 것과 반복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과 반복이 반복이 아닌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삶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인 것으로 나눈다. 그의 견해는 어떻든 간에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보면 반복의 의미는 달라진다. 심미적인 생활에 중점을 두면 언제나 새것으로 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다니듯 전 전해야 한다. 까닭은 무엇이나 처음 대할 때와 두 번 더 대할 때 그것이 곧 달라지며 마침내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미적 삶의 자세는 언제나 변화와 다른 것을 계속 요구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윤리적인 삶의 자세는 반복이 중축을 이룬다. 그것은 의무의 세계요, 질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의무는 좋든지 싫든지 수행해야 하며, 그렇게 반복하는 동안 질서가 생기고 전통이 이루어지고 또 축적되어 소유의 바탕 위에 안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축적의 충이 두꺼워질수록 새로운 가능성과는 차단되어 그 안에서 지루함을 씹으면서도 그것을 자명한 숙명처럼 알고 길든 짐승처럼 살면서 시들어 간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말하면 심미적인 욕구와 윤리적 요청이 한데 응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참 종교적 경지는 윤리적인 요청이 있기 때문에 반복이 있다. 그러나 그 반복에 갇혀 있는 한 종교적 경지일 수는 없다. 종교적 경지는 시간적 반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것을 뚫고 다른 현실로 탈출한다. 그것을 '영원한 순간'이라고나 할까?
'새삼스럽다'는 말의 어원을 나는 모른다. '새삼스럽다'는 말인가? 그것은 같은 것이 반복인데 어느 순간 그것이 전혀 다른 것, 처음 만난 것처럼 새것으로 내 앞에 와지는 것을 새삼스럽다고 한다. 말하자면 반복 속에 새 삶(新生)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아침'을 '아-참'이라고 했다. 늘 반복되는 아침인데 눈을 비비고 동이 트는 것을 볼 때 '아-참' 하는 황홀함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는 반복 속에서 영원한 순간을 만난 것이리라.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늘 보는 반복 속에서 새삼스럽게 그것이 압도해 올 수 있다. 늘 보는 얼굴에서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이를 만난다. 사랑을 발견했다. 그게 진자라면 영원한 수간을 만난 셈이다.
성서를 본다. 설교를 듣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어 왔나? 얼마나 같은 성서를 보고 또 보아 왔나? 그런데 그 반복 속에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순간을 경험한다. 그런 순간 그 성서는 내게 완전히 새것으로 마주한다! 아-참! 이 순간 우리에게 쌓인 때와 먼지를 말끔히 없애고 새 삶의 문이 열린다. 그러므로 반복이면서 이미 반복은 없는 어떤 현실을 경험한다. 이 감격, 이 만남, 이 영원한 순간이 없으면 삶은 지루함, 그것일 따름이다.
광신자들을 나무라기만 할 수 없다. 저들은 같은 것이 반복되어도 아무런 서광을 볼 수 없는 지루함 속에서 무엇으로나 이 반복의 일상성 속에서 탈출하고 싶은 몸부림이다. 이런 심정이 없는 이가 있느냐? 일상성에 그대로 휘몰려 반복을 계속하다가도 어떤 때면 꼭 어떤 액체 속에 저장된 것 같은 숨 가쁨을 느낄 때 발광이 난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싶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 망각의 세계에라도 가자! 무엇엔가 취하자. 정신이 없어질 정도로! 그러나 그런 취태에서 깨면 반복은 더 증오스럽다. 그래서 계속 취경을 찾으면 그것이 또 일상성과 만성으로 바뀐다. 광신자란 마찬가지로 그런 만성에 빠져들어 간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면 이미 광신자도 아니고 그런 형태만 습성처럼 남는다.
K씨, 그러므로 나는 당신의 광신적 태도에 속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1973. 8. 『현존』)